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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170/319)

149화

29. 내 심장을 먹어요, 나는 텅 빈 채로 살아갈 테니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샤트린 오르테가가 열 명이 넘는 해방군 수뇌부를 잡아 들였던 날, 바이칸 북부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카루스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맥스웰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다.

“황제는?”

“친정 선언을 했답니다. 황제의 기사단을 이끌고 북부로 가겠죠.”

“데네브라가 날뛰겠군.”

카루스는 황제가 북부에서 무슨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황제의 감시에서 벗어나게 된 데네브라 황비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마조람 후작의 동태는 어떻지?”

어쨌거나 지금은 율리아의 일이 우선이었다. 언젠가부터 카루스 란케아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보다 율리아의 소식이 먼저였다.

“파벌 가문이 또 한 차례 대거 탈주한 모양입니다. 자식이 반역자가 되어 잡혀갔으니, 국왕을 찾아가 발바닥이라도 날름날름 핥아야죠.”

“더러운 새끼.”

“아니, 제가 핥겠다고 했습니까? 왜 그러시는 거예요?”

“마조람 후작도 이제 곧 발가벗겨지겠군.”

카루스가 기분 좋게 웃었다.

처음 율리아에게 공성 병기를 빼앗아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일이 이렇게까지 확대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기껏해야 마조람 후작에게 누명을 씌워 왕과 반목하게 만드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녀는 블라이스를 역이용해 해방군을 와해시키고, 후계자가 된 샤트린을 움직여 친제국파를 쳤다.

도대체 그 여자의 머릿속엔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가끔은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어났다.

“율리아는?”

“저녁에 모시러 갈 예정입니다.”

“축하 선물이라도 해야 하나?”

“마음 놓지 말라던데요. 가진 게 많은 자와는 싸우기 쉽다면서요. 맞는 말입니다. 후작이 왜 지금까지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겠습니까? 지킬 게 너무 많아서 하나씩 쳐다보기만 해도 바쁘니까 그렇죠.”

“누가 그걸 몰라?”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건 잃을 게 없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율리아 시녀님이 후자였기 때문에 괜찮았는데…… 마조람 후작에게 잃을 게 없어지면, 그때야말로 본격적인 개싸움으로 가는 거라고.”

“율리아가 이길 거야.”

“저도 압니다. 아는데요.”

“아는데 뭐가 걱정이야?”

“개싸움이면 차라리 괜찮아요. 그게 뭐 별겁니까? 힘세고 쪽수 많은 쪽이 이기는 건데. 그런데 만약에…… 그쪽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겁한 놈들이면 어떻게 합니까.”

맥스웰은 진심으로 율리아를 염려하고 있었다. 카루스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바바슬로프 같은 놈.”

“뭐요?”

맥스웰이 진심으로 화를 냈다. 카루스는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치고 말에 올랐다. 기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맥스웰도 카루스를 따라 말에 올랐다. 보고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사람 많은 부두에선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겨울인데 따뜻했다. 바람이 세게 부는데, 춥지는 않았다. 코트도 없이 셔츠에 조끼만 입고 돌아다니는 남자들도 있었다.

“이게 남부의 겨울인가.”

말을 탄 채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던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맥스웰이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말했다.

“따뜻하죠? 이게 무슨 겨울인가 싶고. 제가 오르테가에 처음 왔을 때도 겨울이었는데, 여기서 평생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바이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바바슬로프는 아직도 반바지만 입고 잔다고 하던데.”

“무식한 새끼.”

맥스웰이 욕을 했다.

“그러는 너는 뭐 입고 자는데?”

“반바지요.”

“미친놈.”

카루스가 혀를 쯧 찼다. 그러는 그도 여태 반바지만 입고 잔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기지에 도착하자마자 카루스의 집무실까지 따라 들어와 그간의 일을 보고한 맥스웰이 율리아를 데리러 가겠다며 왕궁으로 갔다.

카루스는 느긋하게 율리아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저녁이나 함께 먹고, 밤바다를 거닐 생각이었다.

남부의 겨울은 따뜻하니까 밤바다에 데리고 나가도 괜찮을 것이다. 옷을 얇게 입고 온다면 자신의 코트라도 대충 걸쳐 주면 되겠지.

카루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창문 앞에 섰다.

남부도 겨울엔 해가 짧았다. 푸르던 하늘이 점점 연한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요즘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꾸만 그날의 율리아가 떠올라 몸이 뜨거웠다.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던 여린 뺨이나 젖은 입술,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여름이 한창일 때보다 겨울인 요즘이 더 덥게 느껴졌다. 찬물로 샤워를 해도 소용없었다.

의도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 봐도 소용없었다. 한번 잠을 설치기 시작하면 밤새도록 그녀와의 일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첫 만남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율리아의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뇌가 미친 것처럼 움직였다.

자신이 무언가에 그렇게까지 집중해본 일이 있었던가. 처음 검을 배울 때도, 처음 전쟁터에 나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피하지 않았지.’

율리아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뺨을 물어도, 입술을 헤집어도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심해와도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 감정은 무엇인가. 카루스는 자신의 마음에 이름이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간지럽고 아름다운 느낌이 아니야. 따뜻하거나 충만하지도 않고. 다정해지는 것도, 벅차오르는 것도 아니다.’

미칠 것 같은 갈증, 끝없는 욕망, 자기 파괴적인 헌신. 그런 것들이 모여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다. 이 이야기가 다시없을 비극으로 치닫는대도 괜찮았다.

불행하면 어떤가. 상관없었다. 율리아는 그가 불행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갖고 싶어질까 봐 두렵다고 했지만, 카루스에게 그 말은 지독한 쾌감으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율리아 아르테의 삶에 새겨지고 싶다. 그 지친 영혼을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어서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

한편으론 바실리 마조람을 죽이고 싶기도 했다. 영혼까지 갈기갈기 찢어서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일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율리아의 머릿속에 있는 놈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한 줌의 재로 만들어 삼키고 싶기도 했다.

레위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카루스는 왕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불쑥불쑥 치솟는 살의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도 이렇게까지 미친놈처럼 굴지는 않았는데.

“카루스 님.”

문밖에서 덩치 큰 기사가 그를 찾았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카루스가 애써 침착함을 되찾았다.

“들어와.”

“바이칸 북부에서 온 연락입니다.”

기사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는 카루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곤,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무사히 북부 독립군에게 보냈습니다. 돌려받은 자는 광산 주인의 후계자로, 보석을 받자마자 암시장 경매에 부쳤다고 합니다.”

“괜찮은 방법이군.”

“보석은 곧 황제에게 전해질 듯합니다.”

바이칸의 암시장에 나오는 물건은 모두 황제에게 보고된다. 그곳은 아주 귀하거나 특별한 것들만 취급하는 경매장이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이번에도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게 될 것이고, 데네브라와 블라이스가 북부 독립군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리라.

카루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그리고 이것을…….”

덩치 큰 기사가 묵직한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그 안엔 꽤 많은 양의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카루스가 의아해하며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러곤 보고서를 하나하나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죽지 못하는 자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소실되어 정확한 출처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얼음산의 부족민들과 해적왕, 바이칸 이전에 대륙에 존재했던 부족 국가의 옛 문헌에서 간혹 그런 전설이 내려온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율리아의 저주, 그에 관한 조사 보고서였다.

[구전된 이야기는 객관성이 없어 제외하되, 기록으로 남은 것은 아무리 허무맹랑한 전설일지라도 특이점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죽음에 관한 저주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보고서를 넘기는 카루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의 심장이 점점 거칠게 뛰고 있었다.

[저주는 보석의 형태를 띠고 있고, 주인을 선택해 찾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이 사실을 확인한 뒤부터 저주받은 보석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하였습니다. 대부분은 북부 부족 국가의 샤먼들이 꾸며 낸 이야기라고 추측하였으나, 경악스럽게도 저 먼 남부의 해적들에게 똑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카루스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덩치 큰 기사가 우묵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부의 해적?”

“남부까지 조사하기엔 손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하…….”

돌고 돌아 이곳이었다. 카루스가 보고서를 꽉 움켜쥔 채 덩치 큰 기사에게 말했다.

“맥스웰은 쓸 수 없다. 놈은 당분간 해야 할 일이 많아.”

“제가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부탁한다. 정말…… 중요한 일이야.”

율리아를 괴롭히는 저주의 정체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대가로 내놓을 수 있었다. 카루스는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는 덩치 큰 기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모든 걸 던져서 지키고 싶은 여자다.”

“알겠습니다.”

덩치 큰 기사가 입매를 꿈틀거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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