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율리아는 잔인하다.
레위시아는 그녀를 만나고 왕이 가져야 할 자질에 대해 배웠다. 왕이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배웠다. 왕의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배웠다.
이제 그녀는 그에게 왕이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길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더러운지.
선택은 언제나 당신의 몫이라고, 왕은 끊임없이 선택하며 그에 따른 희생자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괜찮으십니까?”
맥스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레위시아를 보았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정보 상인조차 그를 염려했다.
“괜찮아.”
레위시아는 장갑을 벗고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남자치곤 희고 고운 손이었다. 펜을 잡거나 책을 넘기는 것 외엔 아무 고생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떠돌이 소금 장수가 되고 싶었으면 무거운 짐을 들 수 있도록 몸을 단련했어야 했다. 집시가 되어 떠나고 싶었으면 노래와 시를 배웠어야 했다.
왕족을 혐오한다면서 왕가의 돈으로 사치스럽게 놀기만 했던 왕자. 왕을 부정하면서 왕이 되려는 왕자. 살고 싶어서라는 말로 포장해 두고, 실은 한 여자를 위해 권력을 갖고 싶어 하는 왕자.
레위시아는 저들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끔찍하네.”
“예? 뭐가 말입니까?”
“다들 모르고 왕이 되는 건지…… 알면서 외면하는 건지.”
레위시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맥스웰이 마부에게 서두르라는 뜻으로 벽을 두드렸다.
“맥스웰.”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바이칸의 황제를 본 적이 있어?”
“그야…… 있죠. 저도 오래전에는 그의 기사였으니까요.”
“그는 어떤 사람이지?”
많은 의미가 내포된 질문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맥스웰에게, 레위시아가 다시 물었다.
“그는 무정한 사람인가? 양심이나 부끄러움이 없어? 측은지심이나 수치스러움, 그런 거 말이야.”
“그거야 황제 본인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건데요? 안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레위시아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허망하고 공허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는 이날 처음으로 왕좌의 바닥을 보았다. 수치심을 이긴 욕망. 그 위에 위태롭게 놓인 의자. 왕좌란 그런 것이었다.
잠행을 마치고 돌아온 레위시아가 아침이 되자마자 식당으로 내려와 말했다.
“안고 가자.”
그는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잠을 쫓으려 미간을 문지르던 코코와 커다란 고기를 잘게 썰어 율리아의 접시에 놓아 주던 알렉사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코코가 묻자, 레위시아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별거 아냐. 심심한 귀족들이 무용담을 갖고 싶어서 만든 집단이 해방군이라 불리고 있다는 걸 알아 버렸을 뿐.”
“별거 아닌 게 아닌데요?”
코코가 잠이 확 깬 얼굴로 몸을 꼿꼿이 했다.
율리아는 말없이 레위시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과 눈빛, 그리고 그가 내뱉는 말.
레위시아는 해방군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꼭 그만큼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기도 했다. 사교 클럽 안의 귀족들에게서 권력자의 민낯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정말 좋은 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타의에 의해 선택한 왕족이었으나, 최선으로 평가될 사람.
율리아는 레위시아가 해방군을 업신여긴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과거에 해방군의 손을 잡았다가 크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마조람 후작가를 향한 율리아의 복수심을 자신들의 싸움에 이용해 놓고, 막판엔 그녀를 팔아넘겼다.
“해방군은 오르테가의 젊은 권력자들이 부모 몰래 만든 조직이에요. 말로는 왕국의 미래를 위해 용맹하게 싸우며 뭐든 희생할 것처럼 떠들어 대지만, 마지막엔 결국 가문으로 돌아갈 테죠.”
냉정하기 짝이 없는 평가였다. 코코가 찬물을 들이켜고 말했다.
“그게 귀족이지.”
“이해해요. 그래서 전하의 선택을 존중하고요.”
한없이 차가운 질타가 이어질 것 같았는데, 율리아가 갑자기 레위시아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존중한다고? 반대하는 게 아니고?”
“제가 왜 전하의 선택을 반대해요. 말씀드렸잖아요. 전하께서 그들의 민낯을 보고도 포용하겠다고 결심하신다면, 저는 족쇄와 채찍을 준비하겠다고요.”
“그 족쇄와 채찍이라는 게 뭔데.”
“지금까지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각 가문에 공개하고, 멸시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거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탄압이 아니었다. 율리아는 그 점을 지적하며 레위시아에게 말했다.
“상상해 본 적도 없을걸요. 귀족이 아니게 되는 결과 같은 건.”
가문의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자들.
“정말 불쌍한 건, 그들에게 선동당한 줄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싸우는 진짜 해방군이에요.”
“하…….”
이 세상은 어쩌면 인간이 망치고 있는 게 아닐까. 레위시아가 중얼거렸다.
이날 이후 레위시아는 한동안 밤마다 잠행을 나갔다. 티타니아가 아무나 받아 주지 않는다던 은밀한 사교 클럽의 귀빈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레위시아의 드레스룸엔 점점 드레스와 장갑, 가발과 스카프 등이 쌓이고 있었다. 덩달아 신난 맥스웰이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다.
율리아는 레위시아가 가져오는 정보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해방군 수뇌부의 명단을 완성했다.
“이게 뭐야?”
그리고 샤트린에게 그걸 쥐여 주었다.
“해방군을 만든 귀족들의 명단이요.”
명단을 바라보던 샤트린이 끔찍한 욕설을 입에 담았다. 율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침대 앞 의자에 앉았다.
“만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전하를 그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 그들이 누군지 알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새끼들이 날 죽이려고 한 거야?”
“그건 아닐 거예요. 그쪽은 블라이스 백작에게 넘어간 급진파이고, 이 명단에 있는 건…….”
“해방군을 만들고 조종하는 자들이라는 거지.”
샤트린이 또 한 차례 욕설을 쏟아내었다. 보면 볼수록 기가 막혔다. 그 안엔 왕의 충신으로 구분되는 자의 아들도 있었고, 반제국파의 딸도 있었으며, 친제국파의 후계자도 있었다.
“샤트린 전하.”
율리아는 샤트린의 혼란을 달래 주지 않았다. 물리쳐야 하는 대상에게 정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제 대가를 주세요.”
“대가?”
명단에 있는 이름을 태워 죽일 기세로 노려보던 샤트린이 고개를 들어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레위시아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그때 갚으라면서. 왜? 마음이 바뀌었어?”
“그건 전하의 목숨을 구해 드린 대가잖아요. 이 명단의 대가는 따로 받고 싶어요.”
“하.”
샤트린이 짧게 웃었다가 멈추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저는 전하의 시녀가 아니니까요.”
“알아, 빌어먹을.”
샤트린이 아픈 다리를 이불 밖으로 꺼냈다. 그러곤 침대에서 일어나 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좋아. 원하는 걸 말해. 율리아 아르테.”
샤트린은 하나뿐인 왕의 후계자였다. 왕이 마조람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는 지금, 이용할 수 있는 최상의 패이기도 했다.
계산은 진작 마쳐 놓았다. 해방군의 배신으로 한 번 죽었으니, 그게 아깝지 않을 만큼의 대가를 받아야 수지가 맞는다.
율리아가 샤트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거기 적힌 이름 중에서 마조람 파벌에 속하는 자들만을 골라 해방군 수뇌부임을 공개하고, 반역자의 낙인을 찍어 주세요.”
다른 건 필요 없었다. 마조람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너…… 그게 무슨 말인 줄 알고 하는 소리야?”
“네.”
당연히 안다. 아홉 번째를 살면서 해방군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정해 두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들은 친제국파를 무너뜨리기 위한 제물이었다.
* * *
과거 율리아 아르테는 해방군이었다.
다섯 번째 삶, 알렉사를 만나기 전에 그녀는 해방군으로 들어가 친제국파를 대표하는 마조람 파벌을 상대로 싸웠다.
해방군 수뇌부는 복수심에 불타 물불 가리지 않는 율리아를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고, 한때는 왕국의 독립이라는 신념에 취해 명예를 좇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군은 마조람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약한 세력이었다. 해방군이 활약할수록 마조람과 왕가는 하나도 똘똘 뭉쳐 그들을 탄압했다.
율리아는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반제국파가 무너져가던 해방군에 가담한 것도, 해적과 손을 잡은 것도 모두 그녀가 한 짓이었다.
해방군은 율리아가 두려워졌다. 그녀 때문에 오르테가에 내전이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국왕이 바이칸의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해방군 수뇌부는 마조람 후작에게 율리아를 넘기는 조건으로 투항을 결정했다.
“재밌어질 거예요.”
과거를 되새기던 율리아가 샤트린에게 준 것과 똑같은 명단을 코코에게 넘기며 말했다.
“친제국파가 와해될 거예요. 자식이 해방군 따위를 만들어 왕족을 공격했으니, 부모는 왕 앞에 납작 엎드려 빌고 빌어야죠. 친제국을 부르짖던 자들은 목소리를 잃게 될 거고, 끝까지 마조람 후작의 곁에 남았던 자들은 극도로 몸을 사리게 될 거예요.”
자식을 잃느니 명분을 잃는 게 낫잖아요. 율리아가 웃으며 꺼낸 말에, 코코가 혀를 차며 물었다.
“나머지는?”
“누명을 벗으려고 발악하겠죠.”
“블라이스 백작에게 속아 넘어간 급진파를 족치겠구나.”
동료들이 반역자가 되어 끌려가는 걸 보면서 남은 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할까. 급진파를 붙잡아 공주에게 바치면, 누명을 벗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블라이스 백작에게 선물이라도 하나 할까 봐요.”
“왜?”
“해방군을 제물 삼아 마조람을 족치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일을 쉽게 만들어 줘서요.”
율리아가 속눈썹을 나비처럼 팔랑이며 웃었다.
그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억울해하고 있진 않을까. 샤트린을 죽인 뒤에 대규모 학살과 폭동을 일으키려 했을 텐데, 그 모든 게 어그러져 버렸다.
블라이스가 1왕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해방군에게 바이칸의 병장기를 쥐여 주지 않았다면, 샤트린을 습격하지 않았다면.
율리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들여 다른 판을 짜야 했을 것이다.
배를 통해 들여온 공성 병기는 눈속임이었다. 블라이스가 정말 숨겨야 했던 건 병장기를 짊어진 채 산맥을 넘어온 데네브라의 병사들이리라.
“뭐가 좋을까요.”
“귤이라도 한 바구니 보내 줘.”
“귤이요?”
“겨울이잖아.”
나쁘지 않네. 율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름 복숭아의 답례라고 하면 될 것이다. 이왕이면 장미 꽃바구니에 부러진 칼이라도 꽂아서 보내고 싶었지만, 그건 참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