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의사가 한동안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는데도 샤트린은 목발을 짚은 채 정원에 나와 있었다. 부러진 다리를 율리아가 걱정스레 바라보자, 샤트린이 턱짓으로 안쪽 응접실을 가리켰다.
“따라와.”
그러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율리아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해방군을 만나게 해 줘.”
“네?”
“넌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내 주위엔 해방군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날 죽이려는 놈들을 내가 직접 찾아다닐 수도 없고. 또 이걸 아버지가 알면 난리가 날 게 뻔하니까.”
“그들을 왜 만나려고 하세요?”
“오해를 풀고 친하게 지내보려고.”
샤트린다운 발상이었다. 해방군을 용서하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율리아도 그녀의 배포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단순해서 철없어 보이는 게 문제일 뿐,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샤트린 전하, 그들은 전하를 해치려고 했어요.”
“누가 그걸 몰라? 어젯밤엔 진통제 없었으면 엉엉 울었을 수도 있어. 생각보다 훨씬 아프단 말이야.”
“그런데 왜…….”
“레위시아가 말해 줬어. 오빠를 죽인 게 해방군이 아니라며.”
샤트린은 강한 진통제를 먹고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다. 해방군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억울했겠지. 이해해. 날 죽이려고 하는 건 이해할 수 없지만, 억울해하고 있다는 건 알겠어. 그러니까 한 번은 용서해 주려고.”
“반제국파가 되시려고요?”
“그게 그렇게 되나.”
“해방군은 오르테가가 바이칸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 국가로서 바로 서야 한다고 외치는…….”
“율리아, 나 그렇게 바보 아니야.”
샤트린이 웃었다. 부러진 발목에서 때때로 올라오는 통증 때문에, 눈매는 찡그리고 입으로만 웃었다.
“해방군이 그렇게 순수하고 착한 놈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
판에 박힌 말로 샤트린을 설득하려던 율리아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곤 잠시 공주를 지그시 응시했다.
샤트린은 율리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그냥 공주가 아니다. 왕이 되려는 여자다. 형제를 죽이고서라도 그 자리에 오르겠다고 결심한 사람인데,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단순하다고 해서 머릿속까지 평면인 건 아닐 터.
해방군은 복잡한 집단이었다. 오르테가의 독립을 원하지만 친제국파로부터 활동 자금을 지원받았고,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저들끼리 싸웠다.
블라이스와 손잡은 이들은 급진파였다. 그들은 마조람 후작의 손에 죽은 간부들이 원수와도 같은 그들로부터 거액을 받아 왔다는 걸 모르고 공격을 감행한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율리아가 판단하기에, 온건파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능구렁이처럼 모른 척하며 비겁하게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긴 자들이었다.
샤트린이 생각에 잠긴 율리아에게 말했다.
“난 아버지 같은 왕이 되지는 않을 거야. 그건 진짜 왕이 아니잖아. 아버지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하나뿐인 공주가 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파혼을 당했어도 후작 따위에게 큰소리 한 번 치지 못하셨지.”
샤트린은 여태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군림하는 장미, 관상용 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 아버지도 뒤늦게나마 그 사실을 알고 발악하고 계신 걸 테고.”
왕이 들었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이야기였다. 샤트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왕이 안쓰러웠는지,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이대로라면 난 부러진 칼이 되겠지.”
부러진 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끊임없이 주위를 경계하며 공허한 위협만 가할 뿐이다.
군림하는 장미와 부러진 칼. 샤트린은 약하고 무능한 왕을 그렇게 불렀다.
“왕가를 위협하는 세력이 둘인 건 곤란해. 다행히 그 둘이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으니까, 둘 중 하나는 나와 손을 잡게 해야지.”
“그래서 택한 게 해방군이군요.”
“그래, 마조람 후작보다는 낫잖아.”
율리아는 샤트린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해방군은 상상 이상으로 한심하고, 무지하고, 비겁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레위시아는 샤트린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율리아가 왕자궁으로 돌아가 샤트린과의 대화를 털어놓자, 그는 온건파에 속하는 해방군의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이상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냐고 물었다.
“어찌 됐건 우리 왕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잖아. 냅다 칼부터 휘두르는 급진파 놈들하곤 달리 제정신이니까 온건파라고 불리는 거 아니야? 괜찮을 거 같은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고민하던 율리아가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맑은 눈이 자신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선택은 레위시아가 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왕이 될 사람이니까, 그가 직접 겪어 보는 게 좋았다.
왕위 후계자의 임명식을 엉망으로 만든 습격자들에 대한 수배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바이칸에서 들여온 병장기를 두른 정체불명의 폭도들이었다.
많은 사람이 해방군을 의심했다. 마조람 후작을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왕은 그들을 어떤 이름으로도 부르지 않고 긴급 수배령만을 내렸다.
해방군은 조급해졌다. 잡히면 최소한 사형이었다. 샤트린 오르테가를 죽이는 데 실패한 것도 모자라 꽤 많은 수의 동료를 잃기까지 했다. 그들은 더욱 깊은 음지로 숨어들었고, 점점 더 블라이스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반제국파의 젊은 귀족들이 주로 찾는 은밀한 사교 클럽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티타니아였다.
어두운 클럽엔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보다 술에 취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 달콤한 술과 어지러운 조명에 취한 사람들이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음악 소리가 컸다. 커다란 테이블 위엔 거액의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티타니아! 이쪽입니다!”
한 젊은 귀족이 레위시아에게 다가와 술잔을 내밀었다. 그 역시 이미 반쯤은 취한 상태였다.
“당신이 그동안 내 초대를 계속 거절해서 고국으로 돌아간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렇게 와 줘서 얼마나 기쁜지!”
“아가씨께선 몸이 좋지 않아 요양 중이셨습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어쩐지…… 전보다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은데요? 새삼 반할 것만 같습니다.”
레위시아 대신 대답하던 맥스웰이 난처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왕자가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레위시아가 웃었다. 진한 화장으로 뒤덮인 눈매에 유혹적인 곡선이 그려졌다.
젊은 귀족이 멍하니 풀린 눈으로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하하…… 제가 오늘 당신을 위해 이 클럽에서 가장 비싼 술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가시죠.”
레위시아는 잘 취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고 잡기에 능해 도박에도 소질이 있었다.
술에 취한 젊은 귀족들과 어울리는 건 레위시아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말을 하지 않는대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듣는 것보다 말하는 걸 훨씬 좋아하는 자들이었고, 어떤 말이든 잘 들어주는 레위시아에게 금세 호감을 느꼈다.
“티타니아! 당신이 또 이겼군. 세상에, 오늘 얼마나 딴 거야?”
“이제 카드는 지겹지 않나? 새 술병도 땄겠다, 잠시 앉아서 담배나 피우자고.”
레위시아를 이 클럽에 초대하기 위해 애썼던 젊은 귀족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점점 과장된 말과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 친구가 누구냐면, 아버지가 그 유명한 노란 수염 백작인데……. 아, 이렇게 말하면 모르는구나. 아무튼, 대단한 귀족이랄까. 우리 왕국에서 손꼽히는…….”
혀가 꼬이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런데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여긴 정말 특별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클럽이거든요. 당신도 사실 나 아니었으면…… 예? 초대받지 못했을 거란 말입니다. 끅! 아시겠어요?”
거들먹거리며 으스대는 그에게 레위시아가 고맙다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늘 오만하고 도도하게만 굴던 티타니아가 자신을 존중한다는 생각에, 젊은 귀족이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영광으로 여기는 게 좋을걸요? 당신…… 진짜 특별한 곳에 와 있는 거거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냐면…….”
모두가 친해지고 싶어 안달하는 티타니아의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에 고무된 나머지, 그는 안 해도 될 말까지 입에 담았다.
“우리가…… 독립 왕국으로 오롯이 설 수 있는 그 날까지…… 여기서 피의 맹세를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구나.
레위시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여기가 해방군의 본거지로구나. 여기서 해방군이 만들어졌구나.
“우린 늙은이들처럼 비겁하게 타협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저항하는 자의 것이란 말입니다! 자, 말해 보게! 누가 나의 전우인가!”
“여기!”
“나다!”
그가 잔을 들어 올리자, 다른 테이블에 있던 자들이 너도나도 잔을 들었다.
레위시아도 제 몫의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단번에 비웠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을 확인한 맥스웰이 다가와 말했다. 좋은 정보를 손에 쥔 그의 눈동자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오르테가의 젊은 귀족들을 상대로 하는 회원제 클럽이었다. 클럽 안에 있는 자들은 주로 20대에서 40대였다. 그중엔 친제국파 귀족의 자제도 있었고, 반제국파 귀족의 자제도 있었다. 부유한 상인이나 예술가들도 있었다.
해방군은 이들이 술에 취해 만든 집단이었다.
국왕이 피눈물 흘리며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게 누구를 지키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고. 귀족으로 태어나 잘난 부모덕에 온갖 사치스러운 삶은 다 누렸으면서 해방군이라는 무용담까지 갖고 싶었던 자들.
취한 척 비틀거리며 클럽을 벗어난 레위시아가 마차 안에서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언젠가 전하께서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그리 정의롭거나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거예요. 백성은 천사가 아니에요. 그들의 이야기는 낭만적이거나, 사랑스럽지도 않고요. 그들은 약하지 않아요. 멍청하지도 않아요. 귀족도 마찬가지예요.”
그때 그는 율리아에게 누가 그걸 모르냐고, 그들도 사람인데 무슨 당연한 얘기를 하는 거냐고 대답했다. 인간은 누구나 탐욕스럽고 비열한 거라고. 남에겐 날 선 칼을 들이대고 휘두르면서, 자기 자신은 깃털로 간질이고도 아파 죽는다고 엄살을 떠는 족속이라고.
“해방군의 정체를 알게 된 뒤에도 전하께서 그들을 안고 가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족쇄와 채찍을 준비해 두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