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67/319)

146화

* * *

겨울의 첫날, 마조람 후작이 가신 가문과 파벌 귀족들을 불러 모았다. 국왕과 드러내 놓고 반목하게 되면서 한동안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던 후작이 자신의 저택을 개방한 것이다.

“마조람의 다음 후계자를 발표할까 하오.”

귀족들의 시선이 후작에게 쏟아졌다. 후작 부인은 완벽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그의 곁을 지켰다.

“크리스틴 마조람, 내 하나뿐인 딸이 마조람의 무게를 짊어질 것이오.”

크리스틴이 집사의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왕궁 연회장 못지않은 거대한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크리스틴은 꼿꼿한 자세로 그 가운데를 지나쳐 걸었다.

예쁘장한 얼굴엔 차가운 가면을 쓰고, 앳된 눈엔 진한 화장을 했다. 크리스틴은 마조람 후작과 후작 부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묵직한 드레스는 짙은 보라색이었다. 허리엔 번쩍거리는 황금색 띠를 둘렀다. 긴 머리카락은 싹둑 잘라 이목구비가 잘 드러나도록 했다.

마조람 후작이 크리스틴에게 물었다.

“가주의 책임과 귀족의 의무, 후계자로서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느냐.”

“맹세합니다.”

“가문의 무게를 오롯이 짊어지고, 영광과 죄악을 모두 끌어안겠느냐.”

“맹세합니다.”

크리스틴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단단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후작이 그녀에게 후작가의 후계자임을 뜻하는 반지를 건넸다. 크리스틴은 그걸 손가락에 끼우고 천천히 일어났다. 반지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이걸 갖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바실리는 그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녀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간신히 기회를 잡았다.

귀족들이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잘해 달라며 당부하는 자도 있었다. 크리스틴은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꼿꼿하면서 단정한 자세, 우아한 태도, 단단한 눈빛.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질투하는 율리아를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저 한 계단 올랐을 뿐인데, 이 작은 권력에도 취하고 중독되었다.

‘내가 이뤄 낸 거야.’

크리스틴은 자신이 후계자가 되는 데 아버지나 어머니의 도움은 받지 않았다고 여겼다. 죄악을 짊어지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그녀에게 바실리는 형제가 아니라 경쟁자, 적이었다.

연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국왕이 마조람의 적으로 돌아선 이상, 남은 이들은 뭉치는 수밖에 없었다. 연회가 끝나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없었다. 밤이 새도록 술과 회의, 토론이 이어졌다.

새벽이 깊어갈 무렵 크리스틴은 후작 부인과 단둘이 대화하고 있는 후작을 발견했다.

“아버지.”

후작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크리스틴이 다가가자,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 후작이 딸의 어깨를 두드리며 연회장 밖을 가리켰다.

“다 즐겼으면 들어가서 쉬어도 된다. 수고했어.”

“무슨 일 있으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넌 몰라도 돼.”

후작은 습관적으로 크리스틴을 배제했다. 무슨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 같은데, 그녀에게는 말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 이제 말씀해 주셔도 되잖아요.”

“응? 뭐라고 했느냐?”

“이제 저한테도 말해 주세요. 국왕의 배신으로 가문에 위기가 닥쳤다는 것도 알고, 제가 어려운 시기에 가신들을 달래기 위해 미봉책으로 선택된 후계자라는 것도 알아요.”

“크리스틴, 얘야.”

“저는 맹세했어요.”

크리스틴의 눈빛에서 광기가 일렁였다. 후작은 난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남편 곁에서 크리스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작 부인이 불쑥 말을 꺼냈다.

“어제 샤트린 오르테가 공주가 왕위 후계자로 내정되어 임명식을 치렀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 어머니.”

“선조들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왕가의 무덤으로 가던 공주가 웬 불한당들의 습격을 받았다.”

“네?”

크리스틴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절로 낮아졌다.

“범인이 누군데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 공주궁에 심어 놓은 첩자가 말하길, 공주는 발목이 부러진 것 외에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크리스틴은 다행이라고 말하려다 그 말을 꿀꺽 삼켰다.

후작 부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크리스틴, 네 의견을 듣고 싶구나.”

허락이 떨어졌다. 크리스틴은 손가락 끝에서부터 간질거리는 열기가 올라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실리를 외면했을 때처럼 끈적끈적하고 더럽고, 짜릿한 기운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래.”

“우리는 해방군과 손을 잡아야 해요.”

마조람 후작은 크리스틴을 아직 사랑스러운 딸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어떤 철없는 말을 해도 용서해 줄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해방군이라니. 얼굴을 일그러뜨린 후작이 크리스틴을 윽박지르듯 말했다.

“그런 소릴 하려거든 그만 방으로 돌아가거라.”

“아버지, 제 얘길 들어 보세요.”

“차라리 가서 공부나 더 해.”

그놈의 공부. 크리스틴이 이를 악물고 웃었다.

“공부하면 뭐 해요. 저기 있는 귀족들도 어차피 다 알아요. 제가 권력을 이용해서 학력을 갈취한 파렴치한이라는 걸.”

“크리스틴!”

“가주는 영리한 자가 오르는 자리가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제가 여기서 더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이러는 게냐.”

“적의 적은 나의 벗이잖아요. 국왕이 갑자기 힌치 백작을 가까이에 두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가 우리 가문의 오랜 적이니까 그렇죠. 해방군은 국왕을 증오해요. 왕가를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고요. 그런 그들이 우리의 벗이 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크리스틴의 말이 길어질수록 후작 부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후작 부인은 그들과 대화하고 싶어 가까이 다가오려던 귀족들 눈짓으로 물리치고, 조금 더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해방군은 왕가만큼이나 마조람을 증오해.”

“국왕을 더 증오하잖아요.”

“우리더러 반제국파가 되라는 말이니?”

“친제국파니, 반제국파니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요. 사실이 그렇잖아요. 알게 뭐예요. 모두가 원하는 건 이 나라에서 가장 힘센 권력자가 되는 건데. 바이칸의 황제도 마찬가지일걸요. 남부를 통째로 식민지로 만들 수만 있다면, 친제국이니 반제국이니 누구의 손이건 상관치 않고 잡겠죠.”

크리스틴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후작 부부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해방군이 왜 그토록 마조람을 증오하는지, 그 자세한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다.

침묵하는 후작을 대신해, 이번에도 후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해방군에게 몰래 자금을 지원해 왔어.”

“네?”

“검은돈이었고, 그들 중 일부만 아는 사실이었지. 그런데 놈들이 별안간에 1왕자를 죽였잖아. 아무래도 낌새가 수상해서 꼬리를 잘라 내려다가…….”

“죽였어요?”

“다 죽였단다.”

그런데 놈들이 그걸 알아 버렸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랐으나, 해방군은 그 일에 대한 보복으로 마조람의 가신 가문 4개를 공격했다.

“그들은 우리와 손을 잡지 않을 거야.”

후작 부인이 냉정하게 말했다. 후작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꼬리를 자르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랬으면 지금 국왕을 상대로 함께 싸울 수도 있었을 텐데.

크리스틴이 마른침을 삼켰다. 가문의 원수라고 생각했던 자들이 실은 이쪽에서 지원해 주는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니. 적과 동침하면서도 그걸 몰랐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시 물을 수 있었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진짜 바이칸 제국과 손을 잡는 건 어때요?”

* * *

공주궁의 시녀가 찾아왔다.

율리아는 알렉사와 함께 새로 지어진 연무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넓고 깨끗한 연무장과 무기고, 작은 기사단 숙소까지. 아름답기만 했던 왕자궁이 어엿한 왕족의 공간으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수석 시녀님, 샤트린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언젠가 왕자궁에 심부름 왔던 앳된 시녀였다.

율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저, 그것까지는 저도 잘…….”

“지금 찾아뵈면 될까요?”

“네, 네!”

심지어 그녀는 빈손이 아니었다. 그녀를 따라온 공주궁의 병사들이 왕자궁 입구에 커다란 상자를 쌓아 놓았다. 그 안엔 연회용 기사 예복과 온갖 사치품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샤트린 전하께서 알렉사 시녀님께 하사하는 것들입니다.”

알렉사가 입술을 씰룩이며 율리아를 보았다. 그러곤 그녀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공주 전하께서는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때, 사치품을 보내는 습관이 있나 봅니다.”

“다녀올게요.”

율리아가 웃으며 걸음을 떼었다.

공주궁으로 가는 도중엔 앳된 얼굴의 시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그녀가 말하고 율리아는 대답하는 쪽이었는데, 샤트린이 습격을 받은 이후 공주궁 시녀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중이라고 했다.

“시녀님들이 다들 가문에 사람을 보내서 빨리 범인을 잡아 족치라고…… 어머, 죄송해요. 범인을 체포해 오라고 화를 내시는 것 같았어요. 우리 궁엔 기사 가문 출신이 많거든요. 샤트린 전하는 이제 곧 왕이 되실 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다들 알렉사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알렉사 시녀님은 너무 멋있고, 또…….”

그녀는 솔직해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녀는 모시는 왕족을 닮는다더니. 레위시아가 했던 말이 떠올라 율리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두 사람이 병사들과 함께 공주궁의 문턱을 넘었을 때였다. 쏘는 듯한 말투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샤트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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