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샤트린 오르테가를 나의 후계자로 삼겠노라.”
가을의 마지막 날, 샤트린을 위한 후계자 발표 연회가 개최되었다. 왕궁에서 가장 큰 연회 홀이 개방되고, 오르테가의 모든 귀족이 초대장을 받았다.
레위시아는 그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가 거기 오리라고 기대하는 자도 없었다.
놀라운 일은, 샤트린이 후계자로 임명되었음에도 레위시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본궁에서는 샤트린의 후계자 임명식이 치러지고 있는데, 은밀하게 2왕자궁의 문턱을 넘는 귀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연회에 참석하기 전에 레위시아를 만나선 짧은 인사와 함께 그를 응원하고 돌아갔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석양이 내려앉은 정원에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레위시아는 편한 옷을 입고 저녁 식사를 막 끝낸 참이었다.
“왕자 전하, 무탈하십니까?”
“왜 그러지? 내가 멀리 도망이라도 쳤을까 봐?”
“그게 아닙니다. 전하, 당분간 외출을 삼가시라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왜?”
“후계자 임명식이 끝난 뒤, 원로들과 함께 왕가의 무덤으로 가시던 샤트린 공주 전하께서 습격을 받으셔서…….”
샤트린은 임명식이 끝나면 원로들의 손을 잡고 왕가의 무덤으로 가서 선조들께 인사를 올려야 했다. 그런 뒤에는 왕궁 밖으로 나가 중앙 광장에서 중앙 부두까지 행진하는 게 순서였다.
레위시아는 샤트린이 왕궁 밖 가도를 행진할 때 해방군의 습격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렇지 않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행진할 때는 왕실 기사단이 사방에 포진해 공주를 철통같이 지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조들의 무덤에 갈 때는 비교적 적은 인원이 이동한다.
율리아는 그 점을 지적하며, 해방군이 블라이스의 지휘로 움직인다면 오히려 그때를 노릴 것이라고 말했다.
“샤트린은? 많이 다쳤느냐?”
“말에서 떨어져 발목이 부러지셨습니다. 몇 군데 상처가 있긴 하지만, 그 외엔 가벼운 부상으로 보입니다.”
“죽은 사람은?”
“원로들이 두 분…… 그리고 왕실 기사단이.”
기사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율리아가 레위시아에게 재킷을 내밀었다. 그녀 역시 드레스 위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레위시아가 재킷을 걸치며 문밖으로 나섰다.
“샤트린에게 가자.”
* * *
샤트린은 레위시아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반신반의했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쪽에 약간의 불안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 불안은 국왕이 그녀를 후계자로 임명하면서 어느 정도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샤트린은 아버지에게 왕좌를 약속받았다. 이제 이대로 시간이 흐르기만 하면 그녀가 왕이었다.
전례 없이 화려한 임명식 연회를 직접 준비하면서, 샤트린은 몇 번이나 레위시아를 떠올렸다.
나는 그 녀석을 죽여야 할까. 미혼인 왕족이 으레 그렇듯, 혼인 외교의 희생양으로 써먹어야 할까. 아니면 멀리 추방령이라도 내려서 다시는 오르테가에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나.
한데 그중 어느 것도 내키지 않았다. 샤트린은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레위시아의 부드러운 눈동자를 떠올렸다.
‘연기하는 거야. 거짓일 거야. 그 자식이 날 걱정하다니.’
어디서 우연히 비명횡사라도 하라고 기도하면 모를까, 걱정이라니. 샤트린은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 쳤다.
그사이 국왕은 마조람 후작과의 연결 고리를 착실하고 섬세하게 끊어 내고 있었다. 왕궁을 뒤져 후작이 심은 사람을 솎아 내고, 그쪽 파벌에 속하는 귀족들을 따로 분류했다. 후작 부인이 데려갔다는 왕손을 찾기 위해 비밀리에 병사들이 파견되기도 했다.
샤트린은 그녀의 아버지가 생각보다 꼼꼼한 성격이라는 걸 깨달았다. 국왕은 자신의 궁 안에 마조람 후작의 흔적이 남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후작이 선물한 골동품까지 모조리 치워 버렸다.
궁내부 대신이 바뀌고, 그 아랫사람들까지 한차례 폭풍 같은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궁내부 다음은 왕실 기사단이었다. 공공연히 후작에게 충성했던 몇몇 기사들이 이유도 없이 강등되거나 먼 지방으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임명식 당일, 샤트린은 얼마 전에 왕실 기사단장을 꺾었다는 알렉사의 방문을 받았다.
“레위시아 왕자 전하와 코코 시녀장님, 그리고 율리아 수석 시녀께서 저에게 오늘 하루 동안 샤트린 공주 전하의 호위 기사로 자원하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기가 막혔다. 샤트린은 실제로 알렉사를 눈앞에 두고 큰 소리로 웃었다.
“이게 무슨 애들 장난 같은 짓이야? 하하하하! 네가 날 죽이러 온 자객일지 어떻게 알고?”
그런데 알렉사는 웃지 않았다.
“저는 공주 전하를 지키러 왔습니다. 거절하신다면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날 왜 지키려 하는데?”
“제가 지키려 하는 사람들이 공주님을 지키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말문이 막혔다. 샤트린은 알렉사에게 돌아가라고,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거울처럼 맑은 그녀의 눈동자를 보곤 하려던 말을 삼키고 다시 물었다.
“왜 오늘 하루만인데?”
“오늘이 공주 전하께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날이라고, 율리아 수석 시녀께서…….”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저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알렉사는 긴말로 샤트린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었다는 그녀의 말은, 오늘 알렉사가 샤트린을 해치기라도 하면 자신이 공주의 사람들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샤트린과 공주궁의 시녀들은 알렉사가 누군지 안다. 누구에게 충성하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왕궁에 들어왔는지.
알렉사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샤트린을 설득했다.
“좋아.”
샤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어. 네가 딴맘을 먹는다면, 왕자궁의 그 잘난 시녀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겠어.”
“그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알렉사가 씩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습격이 일어났을 때, 샤트린은 우아하게 치장한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의전용 말은 무척 온순했다. 승마를 좋아하는 그녀는 부드럽게 갈기를 쓰다듬곤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공주를 죽여라!”
해방군은 처음 보는 병장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샤트린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석궁 화살을 피해 몸을 숙였다. 하지만 갈기 사이에 콱 박히는 화살을 보곤 서둘러 말 위에서 내리려고 했다.
다급해진 샤트린이 허둥거리는 사이, 고통에 몸부림치던 말이 그녀를 떨어뜨렸다. 자칫 잘못했다간 말에 깔리거나 해방군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렉사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샤트린의 망토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전하! 이쪽으로!”
발목이 부러졌는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샤트린은 알렉사의 한쪽 팔에 매달려 섰다. 왕실 기사임을 증명하는 방패가 시야를 가리는가 싶더니, 그 위에 화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제 뒤에 붙으세요.”
알렉사가 샤트린을 등 뒤로 보내곤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기사들이 해방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앞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이 방패로 얼굴과 가슴을 가리고, 기사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겁니다.”
샤트린은 대답 없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방군의 습격은 매서웠지만,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왕실 기사들이 대열을 정비해 맞서고 있었다.
불안해진 샤트린이 예정보다 호위 기사의 수를 두 배로 늘린 덕이었다.
“내 앞을 막아라!”
알렉사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알렉사의 명령에 따랐다.
“안전한 곳까지 후퇴한 뒤에 말을 탈 겁니다. 괜찮으세요?”
“알렉사…… 앞에!”
해방군 전사들이 샤트린이 있는 곳을 눈치채고 달려들었다. 그들에게도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살아 돌아가고자 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알렉사 콴에게 해방군이란 그저 갑옷 입은 하룻강아지일 뿐이었다.
알렉사의 검이 은빛 궤적을 그릴 때마다 검붉은 핏물이 튀었다.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에 핏방울이 튀었다. 오싹하면서 아름다웠다.
샤트린은 자신에게 달려들던 해방군이 알렉사의 검에 쓰러지는 모습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나 발목이 부러진 것 같아.”
“업히세요.”
알렉사는 주위에 있던 해방군을 처치한 뒤, 망설임 없이 샤트린을 등에 업었다. 그러곤 기사들을 방패 삼아 그곳을 벗어났다.
“레위시아 왕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의사들에게 둘러싸여 치료를 받고 있던 샤트린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의사가 안정을 취하라고 말했으나 소용없었다. 샤트린이 고집스러운 얼굴로 문을 노려보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
“공주 전하! 지금은…….”
“어서 들어오라고 해. 모두 물러가라. 다 나가 있어!”
의사와 시녀들이 한숨을 내쉬며 문밖으로 나갔다. 국왕이 다녀간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방문자라니. 죽다 살아난 환자가 자기 몸 추스를 생각이나 하지, 왜 이렇게 손님을 반긴단 말인가.
“괜찮냐?”
레위시아가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율리아가 그를 따라 들어오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샤트린은 웃고 있었다.
“내가 안 죽어서 서운하지?”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괜히 왔네. 가자, 율리아.”
“넌 쓸데없이 정이 많아서 그렇다 치고, 율리아. 네가 말해 봐. 왜 그랬어?”
샤트린이 가까이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레위시아는 율리아를 데리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율리아 너라면 나를 해방군의 손에 죽게 놔두자고 말했을 것 같은데, 왜 그랬냐고. 레위시아가 우겼니?”
“아니요.”
율리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주 전하께 빚을 지워 놓고 싶어서요.”
“빚?”
“네.”
“언제, 무엇으로 갚아야 하는데? 후계자 자리를 내놓으라고 말할 거면 돌아가. 더 얘기할 필요 없어.”
“그런 건 아니에요.”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레위시아와 샤트린을 한 번씩 응시하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언젠가 레위시아 전하께 공주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때 오늘의 일을 기억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