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율리아 아르테는 잔인하다.
레위시아는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율리아의 차가운 초록색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라, 뒤척이고 괴로워하다가 해가 뜨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트린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레위시아를 죽여 없애겠노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밉거나 증오스럽거나,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레위시아가 샤트린에게 느끼는 감정은 약간의 동질감과 소속감, 그리고 미안함이었다.
바깥에선 어슴푸레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본궁으로 갈 준비를 마친 레위시아가 1층으로 내려왔을 때,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난 율리아가 복도 저편에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넌 왜 벌써 일어났는데?”
“잠을 못 잤어요.”
율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레위시아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난 지금 샤트린의 궁으로 갈 거야.”
“……네.”
“사실대로 말할 거고.”
“공주님은 안 믿으실 거예요.”
“그럼 그거야말로 그 녀석 탓이지.”
위선자라고 욕해도 할 수 없었다. 레위시아는 샤트린을 죽여서라도 왕좌에 오를 생각이었으나, 해방군이 그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 침묵할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예상하긴 했어요.”
“내가 만약 방관하겠다고 말했으면, 그땐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 네가 나서서 샤트린을 구하진 않았을 것 같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정보가 새어 들어가도록 조종했으려나?”
율리아는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샤트린은 믿지 않았다.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경고하러 온 레위시아를 비난하기까지 했다.
“해 뜨자마자 남의 궁에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해방군 따위가 내 목숨을 노릴 거라고? 심지어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는지, 그건 알려 줄 수가 없다?”
“샤트린.”
“레위시아,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알겠어. 알겠는데…… 이건 너무 억지 아니야? 해방군은 오합지졸 폭도일 뿐이야. 오빠는 안일하게 굴다가 재수 없게 죽었지만, 난 아냐.”
“난 경고했어.”
“뭐라는 거야, 진짜. 나도 경고하나 할까? 아버지가 조만간 나를 왕위 후계자로 지목하실 거야. 너나 네 목숨 잘 지켜.”
국왕과 마조람 후작이 반목하게 된 이후, 샤트린은 지지 세력을 상당히 잃고 조금 불안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최근 왕이 가장 가까이에 두고 조언을 듣는 사람은 힌치 백작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레위시아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고 목숨을 잃거나 멀리 추방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신한테 기도라도 해. 혹시 모르잖아? 신이 널 불쌍하게 생각해서 내 목을 대신 쳐 주기라도 할지?”
“샤트린, 말조심해.”
“왜? 내가 못 할 말 했어?”
“네가 걱정돼서 온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야?”
샤트린이 보란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날카롭고 불안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내 궁에서 나가.”
“너야말로 내가 꼴도 보기 싫을 만큼 미웠다면 궁 안으로 들이지 않았으면 되었잖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도, 실은 내가 그리 싫지 않으니까 가능한 거고.”
“이게 아침부터 웃기고 있네?”
“네가 내 입장이었어도 똑같았을 거야. 만약 누군가 날 죽이려는 계획을 짜고 있고, 그걸 네가 알게 됐다면.”
“그야 당연히……!”
“나한테 달려와서 목숨 줄 좀 잘 붙들고 있으라고 온갖 짜증을 냈겠지. 왕자궁에 처박혀서 한 걸음도 나오지 말라고 화를 내면서.”
아니라고 말하려던 샤트린이 입을 다물고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엔 여러 가지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미움, 질투, 염려, 짜증, 안쓰러움, 슬픔…… 그리고 안도.
레위시아는 샤트린의 감정까지는 다 알아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면서 동시에 정을 느끼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말하기로 했다.
“1왕자를 죽인 건 해방군이 아니야.”
레위시아가 샤트린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녀들은 듣지 못했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뭐?”
“사실이야.”
샤트린이 고개를 빠르게 돌려 레위시아를 노려보았다. 한 손을 휘둘러 시녀들을 물러나게 한 그녀가 레위시아에게 물었다.
“그럼 누군데.”
“블라이스 백작.”
“너는 그걸 알면서…….”
“내가 그걸 말하면, 누가 내 말을 믿어 줄 것 같은데?”
아무도 안 믿을 것이다. 증거도 없고,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하물며 레위시아는 외면받는 왕자였다.
샤트린이 다시 물었다.
“블라이스 백작이 왜 오빠를 죽였는데?”
“오르테가에 분란을 일으키려고.”
“왜?”
“바이칸의 황제는 우리 왕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싶어 하니까.”
샤트린은 처음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1왕자는 대표적인 친제국파였기에, 블라이스 백작이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어지는 레위시아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마조람 후작의 세력을 깎는 동시에 해방군의 세력을 키우고 있어. 그래야 내전이 일어날 테니까. 만약 해방군이 공주인 너까지 공격한다면…… 그땐 부왕께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킬 수도 있지.”
가능성 많은 이야기였다. 실제로 국왕은 1왕자가 죽은 뒤, 죄 없는 민간인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
“이 모든 게 바이칸의 황제에겐 빌미가 돼. 명분도 되지.”
“레위시아.”
샤트린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그건 너만 알고 있어.”
떨리는 목소리였다. 담담한 척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말끝에 배어 나오는 잔 떨림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알았지? 만약…… 누가 묻더라도 아니라고 해야 해. 너는 그래야 해.”
“왜.”
“안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죄 없는 백성을 학살한 무능한 왕이 될 테니까.”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게 밝혀지면 백성들의 분노는 모두 왕을 향하게 되어 있다.
가뜩이나 왕권이 약한 국가였다. 제국의 그림자 속에서 평생 눈치만 보며 살았던 왕이다. 왕보다 힘센 귀족이 있어도 큰소리로 나무라지도 못했다.
그런 그가 백성을 오해해서 죽였다는 것까지 밝혀지면, 왕의 권위는 밑바닥으로 떨어질 게 뻔했다.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해방군 몇몇이 일으키는 소규모 난동이 아니라, 왕국을 뒤흔드는 폭동.
그건 호시탐탐 왕을 노리는 마조람 후작과 왕국을 탐내는 바이칸의 황제, 모두에게 커다란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었다.
레위시아가 샤트린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율리아는 그 사실을 알면서 그를 말리지 않았다. 뒤늦게 일어난 코코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왕자님이니까 선택한 거야. 세상 미련 없는 나비처럼 굴면서, 쓸데없이 정은 많거든.”
“알아요.”
“난 레위시아 전하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해. 감히 이 나라 왕족을 죽이겠다니. 왕궁 시녀로서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어.”
알렉사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레위시아 전하는 당연히 샤트린 공주님을 위험에서 구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직접 몸을 던지지만 않는다면, 경고하는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율리아의 생각은 다릅니까?”
알렉사가 물었다.
지금의 삶이 여덟 번째였다면 율리아는 샤트린이 죽게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차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레위시아에게 선택을 맡긴 것도 그런 이유였다.
머리로는 샤트린이 죽어야 일이 쉬워진다는 걸 알고 있는데, 목에 자물쇠가 채워진 것처럼 그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레위시아가 상처 입을까 걱정되고, 그를 바라보는 코코가 걱정스러워할까 걱정이 되었다. 알렉사를 실망케 하고 싶지 않았고, 샤트린이 그리 싫지도 않았다.
삶을 반복하며 마모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들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사람에 대한 정, 관계에 대한 미련. 복수에는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연약하고 거추장스러운 감정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대충 웃으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코코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전하께서 샤트린 공주님이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을 지켜 드리는 게 시녀장의 의무지.”
“수석 시녀의 의무이기도 한가요?”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코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왕은 조만간 샤트린을 후계자로 삼을 텐데, 정적인 공주를 지키기까지 해야 한다니.
율리아가 알렉사의 곁에 앉아 두 눈을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