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뭐?”
“죽은 1왕자 전하의 연인이었던 여자를 기억하십니까. 그 여자가 죽지 않고 살아서, 후작 부인이 비밀리에 마련해 둔 안가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왕비 전하께서 급하게 저를 보내었으나, 눈치 빠른 그들이 여자를 빼돌린 뒤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1왕자의…… 아이를 가졌다던 그 여자?”
“그렇습니다. 전하, 제가 본 것은 산실이었습니다. 마을 산파를 불러 확인해 본 결과, 그 여자가 맞았습니다. 겨울이 오면 태어날 거라고…….”
“이 빌어먹을 것들이-!”
왕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가 책상 위에 있던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며 고함을 질렀다. 깜짝 놀란 시종이 의사와 함께 달려와 왕을 달래려 애를 썼다.
“반역이구나. 반역이 확실해! 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반역자를 믿었어! 감히 왕손을 빼돌려 왕좌를 찬탈하려 해? 나와 내 핏줄을 다 죽이겠다는 건가! 이 쳐죽일 놈들……!”
“전하, 진정하십시오!”
“도대체 얼마나 오만한 것이냐! 어디까지 나를 우습게 보는 거야! 허수아비로도 부족해서, 꼭두각시를 세우려 들다니!”
왕손이 저들의 손에 있다. 혼란이 확신으로 바뀌는 데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용서하지 않겠다! 절대로, 다시는!”
왕이 미친 듯이 분노하고 있었다. 시종들이 그의 발아래 엎드려 벌벌 떨었다.
* * *
율리아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쳤다.
왕비궁의 시녀장은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왕은 시녀장에게 왕비와 후작 부인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물어볼 것이고, 시녀장은 그에게 알맞은 정보를 전달할 것이다.
후작 부인이 방문했을 때 왕비의 상태가 얼마나 안 좋았는지, 그리고 왕손을 가진 여자가 살아 있다는 사실까지.
충성스러운 시녀장이 왕비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리 없었다. 궁내부 대신과의 관계라거나, 그 비밀을 몰래 알려 준 사람이 레위시아 왕자궁의 수석 시녀 율리아 아르테라거나.
누군가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다는 건 이토록 강력한 힘이었다. 왕비는 4왕자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율리아를 절대 공격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왕의 집무실에 다녀온 레위시아가 시녀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부왕께서 힌치 백작을 또 불러들이셨어.”
늦은 저녁이었다. 왕자궁의 세 시녀가 식사를 마치고 모여 앉아 증축 공사의 진행 상황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코코는 율리아에게 지금보다 더 큰 방과 응접실, 서재를 따로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알렉사는 연무장과 기사 숙소를 원했다.
활발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그들을 보며, 레위시아가 물었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그럼요.”
코코가 설계도를 덮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레위시아가 율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힌치 백작은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제국파의 대표 격인데, 부왕께서 자꾸 불러들여 가까이에 두니까…… 밖에서 말이 많아.”
“그렇겠죠.”
“심지어 오늘은 나와 샤트린을 중간에 내쫓기까지 했어. 백작과 은밀하게 상의할 일이 있다는 뜻이겠지.”
“샤트린 전하께서 화가 많이 났겠네요.”
“나랑 한마디도 하지 않더라고.”
“국왕 전하께서는 궁내부 대신의 빈자리에 누구를 앉혀야 하는지, 아버지와 그걸 상의하고 있을 거예요.”
코코가 말했다.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두었어요. 전하께서 선택한 후보들의 명단이 왕께 전해졌을 거예요. 마조람 파벌과 과격한 반제국파는 모두 제외하되, 공정하고 학식이 높은 사람으로.”
“이왕이면 날 좀 좋아해 주면 더 좋고.”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코코가 뇌물로 받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다음 왕좌의 주인은 레위시아 전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자를 특별히 엄선했죠.”
정말로 공정하고 중립적인 귀족을 추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코코는 일을 일부러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레위시아 왕자가 샤트린 공주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경쟁할 수만 있다면야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여유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마조람 후작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작 저택에 첩자를 심었어야 했습니다.”
알렉사가 아쉽게 되었다며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왕자궁의 시녀나 기사가 될 게 아니라, 마조람 후작가의 병사로 지원해서 은혜를 갚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겠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마조람 후작의 곁에 남은 귀족들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후작과의 줄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들일 거예요. 손을 놓는 순간 상대를 죽이거나, 자신이 죽는 결말만 남은 사람들이요. 마조람 후작을 배신하느니 왕가를 배신하는 게 낫다고 여기는 자들이기도 하고요.”
율리아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마조람 후작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고 있다는 걸, 레위시아는 알았다.
“첩자는 심을 필요 없어요.”
율리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는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거든요.”
처음부터 계획은 하나였다. 마조람 후작이 지배하는 그 높은 곳을 향해 가되, 그를 받치고 있는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
하나씩 차례대로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그렇게 할 것이다. 나락에 떨어진 뒤에는 아무도 그를 돕지 못하도록.
바실리는 연막이었다. 그는 자신이 후작의 눈을 가리기 위해 율리아가 준비한 무대 위의 배우라는 걸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바실리로부터 시작된 국왕과 후작 사이 미움의 싹이 드디어 꽃을 피웠다.
이간질은 섬세하게 해야 한다. 누가 이 판을 짰고, 누가 이 판을 지배하는 사람인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 이길 수 있었다.
“마조람 후작은 가신들을 모아 놓고 후계자를 발표해야만 할 거예요. 가문의 미래가 공고함을 알리기에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요.”
“크리스틴이 후계자가 되겠군.”
“그리고 그건 국왕 전하도 마찬가지예요.”
마조람의 손을 놓아 버린 국왕을, 귀족들은 불안하게 바라볼 것이다. 가뜩이나 1왕자의 죽음과 왕비의 병환으로 왕가에 흉조가 들었다는 말이 많았다.
왕은 후계자를 지명해야 한다.
레위시아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샤트린이겠네. 난 아직 그 정도로 존재감을 키우지 못했으니까.”
“네.”
“그 녀석에게서 마조람을 떼어 냈다고 좋아했더니, 이런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정말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구나.”
우리가 언제는 그렇게 편하게 살았냐며, 어려운 문제일수록 풀었을 때의 쾌감이 큰 법이라고, 코코가 투덜거렸다.
“맞습니다. 강한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이루기 어려운 경지에 도달했을 때가 가장 기쁘죠.”
알렉사도 코코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이 지난 시각, 다들 자러 가고 웬일로 늦게까지 남아 있던 율리아가 레위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레위시아 전하.”
그녀는 그를 곧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무섭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그래?”
“만약 누군가가 샤트린 공주 전하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뭐?”
레위시아가 읽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러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 의자를 끌고 율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답해 주세요.”
“당연히 막아야지.”
레위시아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누군가 샤트린을 죽이려 한다면, 당연히 막아야만 한다고.
그러자 율리아가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샤트린 공주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전하께서 이 나라의 왕이 될 텐데요?”
이번에는 레위시아도 대답하지 못했다.
샤트린이 죽으면 그가 다음 대의 왕이 된다. 국왕이 그를 왕위 후계자라 여기지 않는대도 상관없었다. 4왕자가 가진 출생의 비밀을 아는 이상, 경쟁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위시아가 물었다.
“누가 샤트린을 죽이려고 하는데?”
“해방군이 왕족을 죽이려고 합니다.”
“왜?”
“억울하고, 화가 나서요.”
“그런다고 왕족을 죽여?”
“왕께서도 그랬으니까요.”
율리아의 말에는 배려가 없었다. 온기도 없었다. 늘 그를 향하던 다정함도 없었다. 레위시아가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부왕께서 해방군을 잡아 죽였으니, 그들도 똑같이 하려는 거라고?”
“바이칸에서 들어온 건 공성 병기뿐만이 아니에요. 다수의 병장기라고 했어요. 1왕자 전하를 살해했던 석궁처럼 좀 더 강력한 위력을 가진 무기들이 해방군의 손아귀에 들어갈 거예요.”
“블라이스 그 개자식이…….”
“증거는 없어요. 그들이 샤트린 전하를 노릴 거라는 건 순전히 저의 추측이에요. 처음엔 레위시아 전하를 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요.”
율리아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왕께서 샤트린 공주님을 후계자로 지목하면 해방군은 곧바로 그분을 노릴 거예요.”
그러니까 선택해야 한다. 율리아는 최대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레위시아를 응시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샤트린에게 이 사실을 알릴 것이냐, 아니면 좀 더 빠르고 손쉽게 왕좌에 오를 것이냐.
선택은 레위시아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