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 *
마조람 후작의 영지, 버려진 부두에 지엄한 왕명이 내려졌다.
밀수업자와 노예 상인들의 은밀한 거래가 다수 발각되어, 부두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마조람으로부터 영지를 회수한다는 명령이었다.
고작 영지 하나. 그러나 그 반향은 엄청났다.
귀족들이 단체로 공황에 빠졌다. 왕가와 마조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혹자는 마조람 후작이 오랫동안 국왕을 무시해 왔기에 그 해묵은 갈등이 터진 거라고 해석했고, 혹자는 국왕이 침몰하는 마조람 후작의 파벌과 이별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직 몇몇 사람만이 진실을 알고 침묵했다.
“시녀장님, 이거 보셨어요? 골동품인 것 같은데, 너무 아름답죠?”
“예쁘네. 현관 장식 테이블 위에 올려놔.”
“이건요? 저는 그림은 볼 줄 몰라서…… 수석 시녀님도 그렇고, 알렉사 시녀님도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면서 시녀장님께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그건 그냥 창고에 넣어 둬. 비싼 작품이긴 하지만, 계절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하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왕자궁의 증축을 축하한다며 어마어마한 양의 선물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연회를 열어 달라고 다들 난리예요. 증축 공사가 끝나고 나면 꼭 알려 달라고 하던데요.”
“정 많은 전하께서 왕가에 닥친 비극에 슬퍼하며, 이번 가을 동안만이라도 자중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해.”
왕비가 저렇게 되었는데 연회는 무슨. 코코가 중얼거렸다.
선물보다는 뇌물에 가까운 물건들이 끝없이 쌓였다. 자신의 서재에서 편지를 분류하던 코코의 얼굴에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들 꼬리 흔드느라 난리네. 엉덩이 떨어지겠어.”
“내 시녀장은 왜 말을 꼭 저렇게 할까.”
“모시는 분을 닮았나 보죠.”
레위시아가 코코의 서재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그러곤 코코의 하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단것 좀 줄래?”
“예, 전하.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하녀가 응접실로 달려가더니 달콤한 과자와 고소한 향이 나는 차를 쟁반이 담아 왔다.
“코코, 입맛이 변했어?”
“아뇨.”
“이건 그럼…….”
“율리아 먹으라고 가져다 둔 거예요. 전하가 뺏어 먹고 있지만.”
입맛이 떨어진 레위시아가 과자를 도로 내려놓았다.
“내가 이 궁의 주인이야.”
“누가 아니래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화가 났어?”
“화난 거 아니에요. 기분이 너무 좋아서 화난 척하는 거죠.”
코코는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더욱 차갑게 굳혔다. 자세히 보니, 두 눈은 무섭게 치뜨고 있는데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웃음이 터지기 직전이다. 소파에서 일어난 레위시아가 코코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냥 웃어.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으흐흐흐…….”
코코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들고 있던 편지로 얼굴을 가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레위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낚아채자, 악마처럼 사악하게 웃고 있는 코코의 얼굴이 드러났다.
“진짜 못됐다.”
“기분 좋은 걸 어쩌라고요. 전하도 내숭 떨지 말고 그냥 웃으세요. 아까부터 입꼬리가 춤을 추고 있다고요.”
“그럴까.”
레위시아와 코코가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차마 박장대소할 순 없었지만, 한차례 웃고 나니 갑갑했던 마음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이상하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는데 피곤하지가 않아요. 세안 물이 너무 차가웠는데, 짜증이 아니라 시원해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안 먹던 향신료도 향긋하게 느껴지고, 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 그것조차 재밌어요.”
“나도 그래.”
“세상이 조금 더 살 만해 졌어요. 이게 다 마조람 후작이 왕가와 갈라섰기 때문이에요.”
코코가 책상 위에 있던 편지 중 하나를 레위시아에게 내밀었다. 마조람 파벌로 분류되던 중진 귀족의 초대장이었다.
“반역은 돌이킬 수 없는 죄지.”
고작 영지 하나를 압수했을 뿐인데 귀족들의 동요가 거셌다. 마조람 후작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가신 가문 전체에 비상 소집령을 내렸다고 들었다.
“그 거대한 파벌이 한 번에 와해되지는 않을 거야. 특히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것들이 그렇겠지. 악행은 여럿이 함께 저질렀을 때 죄책감도 줄어들고 서로의 약점을 틀어쥘 수 있으니까.”
레위시아가 손가락으로 마조람 파벌 귀족 가문의 수를 헤아리며 말했다. 그가 아는 가문만 해도 서른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코코가 분류해 둔 편지와 뇌물 목록을 보니, 이번 기회에 그중 절반은 후작에게 등을 돌릴 생각인 것 같았다.
웃음기를 지운 레위시아가 다시 소파에 앉았다.
“내가 걱정하는 건 부왕의 확신이야.”
“국왕 전하요?”
“서로 사랑하는 연인보다 서로 미워하는 연인이 더 헤어지기 어렵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잖아. 부왕은 끊임없이 망설일 거야. 이게 옳은 결정인지, 마조람 후작이 정말 반역을 저지르려 하는 건지, 내가 오해한 건 아닌지.”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더 그랬다. 비자금 장부는 물론이거니와 공성 병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게 후작을 가리키고는 있었으나, 대놓고 그의 이름이 적혀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 반역자요, 하고 얼굴에 쓰고 다니는 사람도 있어요? 이 정도면 사형을 내린다고 해도 다 그러려니 할걸요.”
“난 후작이 저질러 온 나쁜 짓들이 꼭 그 하나만을 위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
“국왕 전하도 연루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코코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러곤 레위시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혼자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크겠네요.”
그럼 더 헤어지기 어려운 거 아닌가.
자꾸만 율리아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머리가 두 개인 뱀의 이야기였다. 하나뿐인 몸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잡아먹으려 아귀다툼을 하다가 자멸하고 만다는 이야기.
생각에 잠긴 코코의 귓가에 레위시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꿈을 꿨어.”
“무슨 꿈이요?”
“율리아가 내 궁에 처음 왔던 날의 꿈.”
그때는 뭐 이런 맹랑한 평민이 다 있나 했다. 무모하고 철없는 소녀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바실리 같은 개자식한테 홀렸던 거라고.
브레웨 훈장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놀라웠으나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매사에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레위시아는 율리아가 왕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금세 떠날 거라 예상했다.
처음 마조람과 왕가를 이간질하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진짜 어이없었는데.”
“그 계집애가 지금 전하의 수석이에요.”
“후작을 반역자로 만들었고.”
돌이켜 보면 소름 끼치도록 절묘한 순간들이었다. 운명의 신이 잠시 세상에 내려왔다가 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코코와 레위시아가 율리아를 떠올리며 이른 봄부터 일어났던 사건들을 회상하고 있을 때, 율리아가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두 분 뭐 하세요?”
아름다운 크림색 드레스에 산호색 허리띠가 잘 어울렸다. 긴 머리카락은 우아하게 땋아 늘어뜨렸다.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자신을 바라보는 코코와 레위시아를 보고, 율리아가 말했다.
“국왕께서 왕비궁의 시녀장을 찾으셨대요.”
레위시아는 코코를 바라보고, 코코는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왕이 왕비의 시녀장을 찾았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왕이 왕비의 시녀장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율리아가 완전히 서재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러곤 두 사람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왕가와 마조람이 완전히 등을 돌릴 거예요. 이번 기회에 비어 있는 궁내부 대신의 자리에 우리 사람을 앉혀야 해요.”
율리아의 말대로였다.
국왕이 왕비궁의 시녀장을 불러들였다.
“전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왕비가 쓰러지기 전에 왕비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낱낱이 고하라.”
“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라고 말씀하시면.”
“마조람 후작 부인이 다녀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자네도 그 자리에 있었겠지? 혹 후작 부인이 왕비를 괴롭히거나 협박했느냐? 조금이라도 그런 사실이 있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고하도록 해라.”
“저는…….”
당황한 시녀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 역시 왕이 마조람 후작을 내치기로 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간 왕비에게 있었던 일을 다 말해야 할지, 아니면 모르는 척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왕이 다시 말했다.
“왕비의 병이 깊어진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왕비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 역시 큰 죄일 터, 당장 바른대로 말해라.”
“전하, 후작 부인께서 방문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와서 무슨 말을 했느냐.”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는 않으셨습니다. 왕비 전하께서 편찮으시어 화를 많이 내셨고, 후작 부인은 그런 전하를 달래 주지 않으셨습니다.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왕비의 의무를 다하라고…….”
시녀장은 그날 있었던 일을 천천히 말했다. 후작 부인이 방문했을 때, 왕비가 얼마나 슬피 울고 있었는지. 하지만 궁내부 대신과 왕비 사이의 일까지는 말할 수 없어 적당히 건너뛰어야만 했다.
의아해진 국왕이 시녀장을 노려보며 물었다.
“숨기는 게 있구나. 죽고 싶으냐?”
“아닙니다. 전하,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도 마조람 후작과 한패인 거냐? 그런 자가 감히 왕비궁의 시녀장 노릇을 하고 있었어?”
“아닙니다!”
시녀장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살기 위해, 그리고 가엾은 왕비를 위해 애써 감추고 있었던 비밀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후작 부인이 왕손을 숨겨 놓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