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2화 (161/319)

27. 이간질

“난 오랫동안 자네를 믿었어.”

왕은 며칠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그의 눈 밑이 퍼렇다 못해 검게 변해 가고 있었다.

시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뜨거운 수건으로 왕의 손을 닦았다.

“무능한 놈이었으니까.”

왕이 자기 입으로 한 말에 시종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조람 후작은 집무실 중앙에 멀거니 서 있었다. 왕의 부름을 받았을 때, 후작은 왕실 기사들이 자신의 영지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상태였다.

분노한 가신들이 달려와 왕의 만행을 고발했다. 후작은 왕을 두둔하지도 못하고, 그들을 편들지도 못했다.

“이유를 알려 주셔야 해명할 수 있습니다.”

마조람 후작이 시종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할 일을 마쳤으면 어서 꺼지라는 뜻이었다. 시종이 재빨리 일어나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왕이 그 모습을 쳐다보다 웃었다.

“네놈의 왕은 누구더냐?”

“예?”

“후작이 네놈의 왕이냐고 묻는 것이다. 나가도 된다고 누가 허락했느냐? 대답해 보아라.”

시종이 새파란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제발 용서해 달라고 말하며 왕에게 싹싹 빌었다.

“됐다. 네놈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이 나라에 왕보다 높은 귀족이 있어 그런 것을.”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가라. 꼴도 보기 싫구나.”

왕이 시종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찌할 바 모르던 시종이 뒷걸음질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앞으로 그가 다시 왕의 시중을 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조람 후작이 얕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변덕이 심해지셨습니다.”

“늙어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정신 차려. 자네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지.”

“전하, 왜 그러셨습니까?”

“자네가 반역을 저지르려고 하니까.”

왕이 갑작스레 본론을 꺼냈다.

마조람 후작이 일그러진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순간일수록 말을 아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해명은 짧게, 억울함은 감정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누명입니다.”

“누명이라고?”

“도대체 누가 무슨 말을 전하께 했는지 모릅니다만, 전부 억측일 것입니다. 마조람은 오르테가 왕가의 수호자이며, 전하의 충복이라는 걸…….”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돈을 빼돌렸나?”

왕이 물었다. 마조람 후작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저었다.

왕은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아무렇게나 움켜쥐고, 후작에게 집어 던졌다. 구겨진 종이가 이리저리 흩날렸다. 후작은 잠시 가만히 서서 화를 삼킨 후에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건 전임 상인연합 대표가 마조람 파벌의 귀족들을 위해 착복해 왔던 비자금 장부였다.

“고작 이 정도로 제게 반역자라는 누명을 씌우려 하십니까?”

“후작!”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하십시오. 이제는 저와 제 사람들을 쳐내고 권력을 독식하려 한다고.”

“네놈이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겠어!”

“배반이라니요.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네놈이 끝까지 왕을 기만하려 하는구나. 왕보다 큰 의자에 앉아 권력을 휘두르다 보니까 이번에는 이 자리에 앉아 보고 싶더냐? 도대체 네놈에게 얼마나 더 많은 걸 내어 줘야 하느냔 말이다!”

“전하.”

“해적의 금화를 빼돌려 거하게 비자금을 만들고, 그걸로 파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거나 멋대로 권력을 휘둘러도 그러려니 했어! 네놈이 저지른 모든 죄악에 눈을 감았다! 못 본 척했어! 한데, 그런 내게 반역이라니!”

“그게 왜 저 혼자만의 죄악입니까?”

“뭐…… 뭐라고?”

“제가 저지른 죄악이 단 한 번이라도 전하께 누가 된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 반대였지요. 전하는 제 덕에 왕좌에 앉았고, 그 자리에서 편하게 살고 계신 겁니다. 저와 제 사람들이 당신을 지키려고 했으니까요!”

후작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비자금이 의심스럽다고 하셨습니까? 그 돈이 어디에 쓰였을 것 같습니까. 당신을 지지하는 귀족들, 당신이 옳다고 말하는 귀족들, 왕가를 보살피는 자들의 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것인가?”

“변명이라니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후작이 강하게 말했다. 그는 적당히 누명이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왕의 분노가 생각보다 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결백하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 사람들에게 욕심이 없다고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당신을 배신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후작의 말이 길어질수록 왕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열변을 토하는 마조람 후작을 앞에 두고, 왕은 그동안 내내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자네는 왜 나를 선택했나?”

“전하.”

“나보다 영리하고, 나보다 더 큰 지지 세력을 가진 형제들이 있었잖아. 나는 왕좌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했던 왕자였는데, 자네는 도대체 왜 나를 선택한 건가?”

다루기 쉬웠기 때문이다.

마조람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왕은 그의 침묵에서 진실을 읽었다.

“후작,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저는 이 모든 게 누명이라는 말밖에 드릴 수 없습니다.”

“바이칸의 공성 병기를 들인 이유가 무엇인가?”

왕이 마지막 기운을 쥐어짰다. 군주답게 서서, 군주답게 물었다. 높은 곳에 서서 오만한 자세로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마조람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공성 병기라니. 그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 떨어지자 후작은 본능적으로 입을 꽉 다물었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꼬투리가 될 수 있었다.

“크세노 황제와 손이라도 잡았나? 이제는 나보다 더 다루기 쉬운 왕이 필요해지기라도 했어?”

“…….”

“올해 초부터였지. 자네가 내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게.”

왕이 후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처음엔 그냥 철없는 아이들이 저지른 실수라고 여겼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것조차 자네의 계획이었을 수도 있겠어.”

바실리와 크리스틴이 왕족을 상대로 저지른 실수. 왕은 당시 일을 떠올렸다. 마조람 후작은 그때도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대신 왕을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전하.”

후작이 주먹을 꽉 쥐었다.

“누명입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를 내친다면, 당신도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후작은 그 말을 하려다 억지로 삼켰다.

왕이 손가락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더는 듣기 싫으니 썩 꺼지라는 뜻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을 보니, 어떤 말로도 설득하기 어려워 보였다.

마조람 후작이 몸을 돌렸다. 돌아선 그의 얼굴도 굳어 있긴 매한가지였다.

저 무능한 왕이 감히, 저가 지금까지 누구 덕에 그 자리에서 호의호식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고.

불신이 깊었다. 왕은 후작의 반역을, 후작은 왕의 배신을 마음에 담았다.

머리가 두 개인 뱀. 한 몸과 다름없는 두 사람. 그렇게 불리던 왕과 후작이 서로를 적으로 인식한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게 한 시녀가 아홉 번의 삶을 거쳐 촘촘하게 깔아 놓은 덫인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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