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 *
힌치 백작이 왕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오랜만이네.”
자정을 넘긴 늦은 밤이었기에 방문하는 사람이나 맞이하는 사람이나 모두 표정이 좋지 못했다. 주름진 얼굴에 피로가 쌓여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왕의 보좌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힌치 백작이 집무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와 절도 있게 허리를 숙였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왕은 의자를 뒤로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엔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가득했다. 시종들이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간단한 음식은 손도 대지 않은 모습으로 쟁반 위에서 식어 갔다.
왕이 유리창을 통해 힌치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쉰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를 상인연합 대표로 임명해야 한다고 말한 건 레위시아였어.”
“알고 있습니다.”
“부모보다 코델리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녀석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자네가 그 자리에 앉기에 가장 적합한 인사라는 점에서도 이견이 없었고.”
“과분한 말씀입니다.”
“자네가 올린 보고서를 읽고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이유는 그게 못 미더워서가 아니야.”
“전하.”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왕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힌치 백작 앞에 섰다.
“말해 주게. 바다를 통해 내 나라에 오고 있다는 바이칸의 병장기는 누가 주문한 것인가?”
힌치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병장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알아낸 건 마조람 파벌의 귀족들이 해적의 금화를 제국으로 유통하며 불법적인 돈세탁을 해 왔고, 그 기간과 액수가 상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반역을 일으키기 위한 자금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나?”
“반역이라니요, 전하!”
“병장기라고 했어. 공성 병기라고! 바이칸의 황제를 통일 황제로 만들어 준 그 공성 병기가 내 나라에 들어오고 있단 말이다. 도대체 누가, 왜!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여!”
왕이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화들짝 놀란 시종이 달려와 왕의 주먹을 붙잡았다. 노쇠한 왕은 시종의 손을 뿌리치려 애를 썼으나, 힘이 없어 그러지 못했다.
“놔라!”
“전하, 다치십니다. 제발!”
힌치 백작이 왕의 보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왕과 함께 늙어 가는 수석 보좌관이 시름 깊은 얼굴로 백작에게 말했다.
“첩보가 있었소이다. 바이칸 제국에서 우리 왕국으로 병장기와 공성 병기가 들어올 것이라고.”
“누가 그런 짓을…….”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시종의 만류로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힌 왕이 힌치 백작에게 말했다.
“해군을 소집해야겠다. 왕국군을 모두 집합시키는 한이 있어도 막아야 해. 오르테가에 바이칸의 공성 병기 따위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 이게 반역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감히…… 어떤 빌어먹을 놈이! 알아내기만 한다면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다!”
왕의 고함이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겁 많은 짐승이 내는 비명. 힌치 백작은 그의 고함을 그렇게 해석했다.
왕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공성 병기는 바이칸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심지어 왕은 그가 평생 의지했던 동지를 의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왕권이 약한 나라의 왕은 눈치가 빨라야 한다.
왕은 그동안 마조람 후작과 그의 파벌 귀족들이 전임 상인연합 대표와 전임 남부 함대 사령관을 이용해 해적의 금화를 몰래 유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힌치 백작이 의심스럽다며 올린 보고서에도 그런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왕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증거로 보이는 것들이 속속 발견되어도 불충분하다고 밀어냈다. 마조람 후작은 왕의 반신과도 같은 자였다.
그를 미워하거나 그의 세력을 견제할 수는 있어도, 그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전하, 해군을 움직이면 그들이 금세 눈치챌 겁니다.”
힌치 백작이 무겁게 입을 뗐다. 왕의 곁을 지키는 늙은 보좌도 그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장기를 들이려는 세력.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해군이 움직이는 순간 물건을 빼돌리거나 멀리 달아날 가능성이 큽니다.”
‘병장기를 들이려는 세력.’
힌치 백작은 마조람 후작을 그렇게 돌려서 말했다. 왕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건은 바다로 온다고 하는데.”
“놈들이 예측하거나 대적할 수 없는 자에게 부탁하지요.”
“뭐? 그게 누구지?”
“무혈 제독입니다.”
왕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곤 힌치 백작을 한참 동안 주시했다.
그러고 보니, 카루스 란케아가 드추바 섬에 있었다.
그에겐 남부 함대가 있고, 유명무실한 오르테가 해군보다는 그가 거느리고 있는 제국군을 이용하는 편이 좋았다. 병장기를 들이려는 자들도 카루스가 움직일 거라고는 감히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카루스 란케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남부에 파견된 신임 제독이란 걸 알았을 때, 적대하거나 배척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왕의 표정을 살피던 힌치 백작이 적당한 때에 또 한 번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전하, 충심으로 말씀드립니다.”
“뭔가.”
“반역을 저지르려는 자가 누군지 알게 된다면, 절대 용서하지 마십시오.”
왕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하고도 이틀이 지났다. 카루스는 국왕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기로 했다.
맑은 가을 하늘에 둥그스름한 구름이 떠다녔다. 오랜만에 만난 순풍 때문인지, 돛이 세차게 펄럭이며 배의 속도를 더했다.
“저기 오네요.”
선수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바바슬로프가 망원경을 건네며 말했다. 카루스가 그에게서 망원경을 받아 멀리 수면 위를 바라보았다.
대형 무역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서 왕의 보좌와 기사들에게 알려.”
“귀찮아 죽겠네.”
바바슬로프가 빠르게 혀를 찼다.
그들의 군함엔 오르테가의 국왕이 신임하는 보좌와 8명의 기사가 함께하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해 왕에게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바바슬로프가 은근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왕이라는 자가 말입니다. 자기 나라에 반역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저렇게 무시무시한 게 들어오는 것도 막지 못한다니.”
“그러니까 나한테 막아 달라고 하잖아.”
“그걸 왜 자기 힘으로 못한단 말입니까. 기사들한테 들어 보니까 이 나라도 한때는 해상 전력이 강한 것으로 유명했다던데.”
“왕년에 잘나갔었다고 자랑하는 놈치고 진짜 대단한 놈을 본 적이 없어.”
“그거야 그렇지요.”
바바슬로프가 검은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해군 병사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신호를 주고받았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왕의 보좌와 기사들도 서둘러 다가왔다.
“저희가 먼저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혹시 모를 반격에 대비해 카루스의 기사들이 앞장서서 움직였다. 그들은 무역선과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놈들을 막아 세웠다.
그러곤 오르테가 남부 해상의 평화를 위한 불시검문이 있겠다며, 무역선에 넓은 판자 다리를 댔다.
그들은 모두 제국군임을 상징하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거대한 군함엔 번들번들한 대포와 잘 훈련된 병사들이 가득했다.
무역선의 선원들은 겁에 질린 채 선상에 엎드렸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예? 왜 이러시는데요.”
군함에서 무역선으로 건너온 카루스가 중앙에 서서 배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밀수선이군.”
선원들이 고개를 숙인 채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그들도 무혈 제독이 누군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질문하기 전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마라.”
카루스가 시끄럽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선원들은 그가 두려웠던 나머지, 대답도 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무역선 안엔 묵직하고 거대한 상자가 많았다. 카루스는 바바슬로프와 함께 몇 개의 상자를 뜯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흠.”
조립하기 전, 부품 상태의 공성 병기였다.
철갑 조각의 크기를 눈짐작으로 잰 바바슬로프가 공성 병기의 크기를 가늠하며 말했다.
“카루스 님, 이거…….”
“그래.”
그가 웃었다.
“이건 좀 놀랍군.”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건 바이칸 제국에서도 아무나 함부로 소유할 수 없는 성능 좋은 공성 병기였다. 부품의 크기와 상태로 보건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하나뿐인 것도 아니었다.
그가 그 사실을 왕의 보좌와 기사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들도 막상 눈앞에서 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제국의 병기를 목격하게 되자, 말을 잃은 채 분노에 휩싸였다.
카루스가 밀수선 선원들에게 물었다.
“누가 주문한 거지?”
“예? 그런 건 모릅니다. 저희는 그저…… 이 물건들을 정해진 장소로 가져가라는 의뢰만 맡았을 뿐이에요. 그,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밀수선 선원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공성 병기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희가 밀수 같은 짓거리나 하면서 사는 쓰레기인 건 사실이지만, 그런 건 절대 손대지 않습니다. 진짜예요! 그냥 돈을 많이 주길래 받은 의뢰입니다!”
“누가 한 의뢰인데?”
“그것도 잘…….”
“다 털어놓을 때까지 한 놈씩 바다에 던져.”
카루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겁에 질린 선원들이 억울하다며 그에게 애원했다.
“어마어마한 수고비였습니다. 이번 한탕만 해치우고 그만두자고 약속했을 정도로요!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는 게 조건이었습니다. 받는 사람도 누군지 몰라요. 저희는 그냥 이 상자들을 캄캄한 밤에 정해진 장소에 내려놓기만 하면…….”
“거기가 어딘데?”
“바로 요 앞에 있는 부두요. 버려진 부두라고…….”
카루스가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 수평선 너머에 작은 부두가 있었다.
갈매기 한 쌍이 하늘을 날았다. 그러곤 저만치 떨어진 수면에서 사이좋게 물고기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카루스는 맥스웰이 가져온 율리아의 전언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