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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158/319)

139화

트루디가 돌아간 뒤에는 혼자서 달구경을 했다. 발코니 난간에 걸터앉아 달을 보며 과자를 먹고 있으려니, 문득 카루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다우면서도 기묘하게 매혹적인 얼굴선. 남부에서 드문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언제나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예상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감정을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목소리엔 언제나 미미한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처음엔 눈치채기 어려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하게 느껴졌다.

피도 눈물도 없어 무혈 제독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기엔 어린애처럼 짓궂고 심술 맞은 구석도 있었다.

그와의 거리가 아슬아슬했다. 한 걸음 멀어졌더니 두 걸음 다가왔다. 두 걸음 멀어지려 하니까 발길을 붙잡았다.

율리아는 다시 시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죽거나, 달아나거나. 선택지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기로.

그러니까 그와 이런 식으로 얽히는 것도 마지막이다.

카루스는 황제와 맞설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황제가 북부에 정신이 팔려 남부에 신경을 덜 쓰고 있지만, 그 일이 해결되고 난 뒤에는 카루스와 같이 자신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를 남겨두지 않으려 하리라.

카루스는 언제나 황제에게 척결 대상이었다. 질투는 무서운 감정이다. 카루스는 황제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

무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하들의 진심 어린 충정, 그와 싸웠던 적들조차 경의를 표할 만큼 관대한 구석도 있었다. 심지어 젊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폭군이 영웅을 만들었다. 황제는 그가 쌓은 업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리라.

‘조금 더 오래 살았으면 좋았을걸.’

마조람 후작가에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장작처럼 태우며 살다 보니 매번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카루스와 황제의 전쟁이 누구의 승리로 끝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걸 알았다면, 그에 관한 정보까지 손에 쥐었다면.

카루스 란케아를 남부의 왕으로 만들어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율리아는 자신이 그의 연인이 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저주는 불행을 먹고 산다. 제때 보살피지 않으면 남의 불행을 먹으려고 몸을 키운다.

자신은 그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과자를 다 먹어 갈 때쯤, 율리아가 발코니 아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확장 공사 때문에 왕자궁은 일부 벽을 허물어 개방된 상태였다. 일꾼들이 쌓아 놓은 자재가 여기저기에 보였다.

그 사이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블라이스 백작이었다.

그는 몰래 들어온 듯 보였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는 몰라도,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가만히 서서 율리아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어디를 다녀온 건지 옷은 구겨져 있고, 머리카락도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래도 얼굴만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안녕.’

블라이스가 입술로 말했다.

율리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블라이스가 천천히 걸어 율리아의 방 아래까지 왔다. 그가 목을 바짝 들어 올려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나 좀 초대해 줄래?”

그녀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네 적을 대신 처치해 줘도 거부하고, 내가 가진 가장 값비싼 것을 건네도 싫어하고……. 율리아, 네 관심을 받으려면 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그러면 수상해서 지켜보게 될 테니까.

“제국에서 전갈이 왔어. 내 주인께서 무척 화가 나셨더라고. 도대체 뭐 하는 거냐며, 어서 빨리 성과를 보이라고 재촉하셨지.”

그에게 주인이란 황제가 아니라 데네브라 황비를 말하는 거였다. 율리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말한 성과가 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아마도 카루스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율리아.”

블라이스가 웃으며 물었다.

“나와 함께 제국에 갈래?”

오늘은 그에게서 향수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대답을 좀 해 줄까.

“주인이 있는 개는 관심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달빛과 함께 내려앉아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쓸모없으니까.”

늘 차분하기만 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노래처럼 들렸다. 감정이 듬뿍 담긴 눈빛이 쏟아졌다. 오만하고 순수한 악. 율리아는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북부의 악마 같았다.

그래, 저걸 원했다.

블라이스는 솟아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데네브라에게 처음 무릎을 꿇고 복종을 맹세했을 때처럼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짜릿함 쾌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율리아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탐내지도 않았다. 그가 눈앞에 있으면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선을 넘으면 응징당한다. 선을 벗어나면 잊힐 것이다. 그러니까 아슬아슬하게,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그 위태로운 선 위에서 놀아야 한다.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데네브라는 그를 개처럼 바라보았기에 목줄을 채우고 복종하게끔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율리아는 그를 자신의 선 위에 올려놓고, 다가오지도 벗어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널 황비보다 먼저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블라이스는 율리아 아르테를 섬기는 번견이 되었을 것이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아주 멀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새의 날갯소리처럼, 귓가를 맴돌다 사르르 흩어지는 소리였다.

창백한 달빛을 조명 삼아 발코니 난간에 기대 서 있는 율리아는 블라이스에게 너무 먼 사람처럼 보였다.

신분은 고작 평민에 별것도 아닌 시녀. 모시는 왕족은 애첩의 아들이고, 데네브라처럼 눈에 띄는 미인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만 그를 끌어당겼다. 이러는 자신이 낯설었다. 꼭 덫에 걸린 느낌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없는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레위시아 오르테가는 네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그 애송이는 그저 불나방처럼 네 주위를 맴돌다 운명이라는 불길에 타 죽겠지.”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너 같은 사람이 충성하기엔 너무 무가치한 왕족이란 말이야. 뒷배 하나 없는 애첩의 아들. 왕은 심지어 평생 없는 자식처럼 무시하고 살았다면서. 그런 왕자가 정말 왕좌에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해?”

율리아가 그를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취한 탓인지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나와 함께 제국으로 가자. 율리아, 내가 널 끌어올려 줄게. 네가 상상치도 못했던 높은 자리, 고귀한 자들이 사는 세계로.”

“무가치해.”

율리아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에게 한 말인지, 혼잣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블라이스가 물었다.

“그럼 원하는 걸 말해.”

“내가 원하는 꽃은 당신의 정원에 피지 않아요.”

그녀는 바이칸에서 유명한 시인의 말을 인용해서 말했다.

그 시인은 몹시 가난했으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녀를 후원하고 싶다는 귀족이 줄을 설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시인은 귀족들의 돈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한 남자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후원을 거절할 때마다 저런 말을 했다고 전해졌다.

블라이스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는 율리아가 던진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다가, 그러는 자신이 우스워 웃었다.

“난 내 주인을 배신할 수 없어. 몸과 마음과 영혼을 모두 바쳐 충성을 맹세했거든.”

“배가 들어오는 날짜가 언제죠?”

율리아가 갑작스레 물었다. 창처럼 멀리서 훅 찔러 들어온 질문이었다. 말문이 막힌 블라이스가 입을 열었다가 닫고, 다시 열었다.

“배라니?”

“병장기를 실은 배가 오르테가로 오고 있잖아요. 그 배의 항로와 도착하는 장소, 예상 날짜를 말해 주세요.”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오갔다. 블라이스가 입술을 날카롭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내가 그걸 알려 주면?”

“무가치한 이 순간에, 어떤 의미 같은 게 생기겠죠.”

“어떤 의미?”

“어쩌면 당신과 나 사이에 닮은 점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율리아가 난간에서 몸을 떼었다. 그러곤 그에게서 한 걸음 더 멀어졌다. 달빛이 쏟아지는 발코니,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 그녀의 실루엣이 블라이스의 망막에 새겨졌다.

“배는…….”

그가 입을 열었다.

“서남부 먼바다의 옛 항로를 통해 오는 밀수선이야. 날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배를 댈 부두가 어딘지는 알지.”

블라이스는 밀수선이 들어올 부두 이름과 위치까지 정확하게 말했다. 율리아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짜야, 율리아. 거짓말 아니라고.”

“알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으로 봐?”

블라이스는 그토록 대단한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율리아에게 털어놓았다. 마치 이 모든 게 너를 위한 선물이라는 듯, 빈손을 내보이며 웃었다.

“지금 당장은 내 목적과 당신의 목적이 같으니까, 그래서 던져 주는 미끼겠죠.”

“율리아.”

“내가 그 정보를 가지고 무슨 짓을 벌일지 그것까지 예상하니까.”

은밀한 경로를 통해 들여오는 병장기. 그 속엔 바이칸의 정복 전쟁을 상징하는 공성 병기까지 있다고 했다.

블라이스가 두 손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물었다.

“그래, 이번 선물은 어때. 마음에 드나?”

율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이 없는 늪처럼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렇게 그의 심장이 한 번, 두 번, 세 번…… 열댓 번 정도 뛰었을 때였다.

율리아가 웃었다.

얇은 붓으로 그린 것 같은 미소였다. 깨끗한 얼굴에 매혹적인 선이 그려졌다. 엄청난 변화였다. 늪인 줄만 알았던 초록색 눈이 그를 순식간에 다른 장소로 이끌었다. 푸르른 상록수로 가득 찬 정원이었다.

블라이스는 순간 자신의 가면이 벗겨진 줄도 모른 채 넋을 잃었다.

그 짧은 미소 하나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블라이스의 정원엔 율리아가 원하는 꽃이 단 한 송이도 피어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정원은 그가 원하는 꽃으로 가득했다.

적을 향해 대신 칼을 휘둘러도,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보석을 선물해도, 율리아는 그를 무가치하게 여겼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그녀가 웃었다.

블라이스의 심장이 미친 말처럼 뛰기 시작했다. 경주마, 혹은 야생마처럼. 바퀴가 고장 난 마차처럼. 꼬리에 불을 붙인 황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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