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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157/319)

138화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걸음을 멈춰 선 시종들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왕위 후계자가 아니었을 때는 은근히 그를 훔쳐보거나 슬그머니 피해 가기만 했던 자들이 이제는 멈춰 서서 확실하게 존경을 표했다.

그게 바로 권력이었다.

허탈했다. 그는 그토록 가기 싫었던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자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샤트린의 말이 옳다. 레위시아는 율리아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통증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다. 갈수록 더 아프고, 갈수록 무기력해진다.

굳은 얼굴로 걷던 레위시아의 시야에 국왕이 나타났다. 최근에 살이 많이 빠진 왕이 레위시아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돌아가는 거냐?”

“예,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레위시아는 왕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 증오했던 아버지였기에, 이렇게 매일 마주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왕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힘든 거 안다.”

“……예.”

“많은 사람이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기억하거라.”

표정 없이 서 있던 레위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왕은 할 말을 다 했는지 그를 지나쳐 걸어가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이 너무 쭈글쭈글했다. 보좌보다 더 가까운 위치에 의사가 붙어 있는 걸 보니, 건강이 좋지 않다던 말도 사실인 것 같았다.

건강하세요. 그 말은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이 말도 마찬가지였다. 레위시아는 어릴 때도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다니던 아이였다.

그가 빨리 죽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입술에 힘을 줘서 꾹 닫아 버린 레위시아가 가던 길을 다시 걸었다. 걸음걸음마다 국왕과 그의 거리가 멀어졌다.

레위시아가 돌아간 뒤, 국왕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자마자 제일 먼저 약부터 삼켰다. 넓적한 대접에 담긴 쓴 약을 꿀꺽꿀꺽 마시고 나니, 의사가 대기하겠다며 옆방으로 물러갔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찌뿌둥했다. 몸이 고된 나머지 일과를 소화하는 것조차 힘이 부쳤다. 나이를 실감하게 되자, 자꾸 과거를 돌이키며 후회를 반복하게 됐다.

나는 왜 왕이 되려고 했던가. 왜 형제들을 죽였나. 마조람의 그늘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는데, 그게 실책이었나. 사랑하는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한 자가 왕국을 지킨다는 게 말이나 되나.

“전하, 이것부터 보셔야 합니다.”

보좌들이 서류를 가져와 책상 위에 쌓았다. 샤트린과 레위시아가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왕의 업무가 확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왕이 한숨을 삼키며 서류를 손에 들었다.

“제국의 동태는 어떻지?”

“여전합니다. 남부를 주시하는 병력의 수는 그대로인데, 북부의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황제 직속 기사단이 북부로 향했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전쟁인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황제의 가장 강력한 검은 카루스 란케아인데, 그가 지금 저희 왕궁에 내려와 있으니까요.”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몇 번 만나 보니, 카루스 란케아는 나이에 비해 신중한 사람이던데. 나 같으면 가장 가까이에 두고 이용했을 거야.”

“황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 그래서…….”

두려웠다. 국왕은 눈을 감고 그 말을 간신히 삼켰다.

백성들은 모른다. 20년 전, 황제는 오르테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고 남부 전체를 식민지로 삼으려 했다. 황제가 티타니아를 넘는 순간 오르테가의 백성들은 바이칸의 노예가 될 예정이었다.

그때 자신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면,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오르테가도 무참하게 정복당했을 것이다.

크세노 황제는 무서운 남자였다.

그래서 카루스 란케아가 더 대단해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 젊은 나이에 황제의 신임을 얻고 그의 두 번째 기사라는 높은 위치에 올라섰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건 그토록 신임하는 부하를 황제가 오르테가 남부 함대로 쫓아냈다는 것이다.

“카루스 란케아가 두려웠던 것일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국왕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크세노 황제는 두려움이 없는 사내로 보였다. 차라리 데네브라 황비와 카루스 란케아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이라는 소문이 더 타당하게 들렸다.

“전하! 첩보입니다!”

갑자기 보좌 중 하나가 다급하게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우리 왕국과 바이칸 제국 사이에 상당한 양의 자금이 오갔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게다가…….”

“한두 번 있는 일인가.”

“그동안엔 사용처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보좌가 국왕에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급한 첩보인 듯 휘갈겨 쓴 글씨가 빽빽했다. 국왕이 눈매를 찡그리며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그러곤 시간이 멈춘 듯 한동안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왕이 시름과도 같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당장 힌치 백작을 불러오라.”

상인연합 본부. 힌치 백작은 밤늦은 시간에 국왕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곁에는 조금 전 왕궁에서 도착한 코코가 서 있었다.

급히 입궁을 바란다는 국왕의 전갈을 받자마자, 힌치 백작이 코코를 바라보았다.

“제 말이 맞잖아요. 왕이 부를 거라니까요?”

코코가 속삭였다.

힌치 백작은 왕의 전령에게 차림새를 정돈하는 대로 출발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곤 코코를 책망하듯 말했다.

“내가 전임 대표가 저지른 돈세탁에 대해 왕에게 보고하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이런 짓을 벌여?”

“아빠를 믿었으니까.”

“이번에도 율리아냐?”

코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새침한 얼굴로 뇌물로 받은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힌치 백작이 의자에서 일어나 재킷을 집었다.

“바이칸 제국의 자금이 대량으로 오르테가에 들어왔는데, 그게 죄다 마조람 파벌의 귀족들에게 가고 있었다. 전임 상인연합 대표가 금고에 숨겨 뒀던 장부를 분석해 본 결과, 그들이 해적의 금화를 제국으로 빼돌려 세탁한 뒤에, 다시 오르테가로 들여오고 있었다.”

코코가 씩 웃었다. 힌치 백작이 재킷에 팔을 꿰며 계속 말했다.

“마조람 후작이 지시한 일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왕이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보고했지. 가타부타 답변이 없길래 왕은 아직도 놈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싶었고.”

“율리아가 말했어요. 마조람 후작이 자금줄을 잃으면 파벌이 흔들릴 거라고. 배신자가 나오기 시작하고, 몰래 뒷돈을 챙기는 자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라고요.”

“그게 바이칸의 전쟁 자금이라고? 너무 심한 비약이야.”

“해방군이 마조람의 수족을 넷이나 격파했어요. 그러니 슬슬 불안해지지 않겠어요? 이럴 때일수록 후작이 자기들을 지켜 줘야 하는데, 왕궁에서 일어난 비극 때문에 입지가 더욱 좁아지기만 했죠.”

“딸아.”

“돈만 들어왔으면 여느 때처럼 이것들이 뒷돈 좀 챙기는구나, 했을 거예요. 그런데 아빠, 공성 병기예요.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죠.”

“그거 해방군에게 가는 거라며.”

“받는 사람이 누구건 우리가 알 게 뭐예요. 그 대단한 제국의 병장기가 우리 왕국에 온다는데! 아빠, 왕은 겁쟁이예요. 아마 오늘부터 한동안은 밤잠도 이루지 못한 채 벌벌 떨걸요.”

재킷을 입고 입궁 준비를 마친 힌치 백작이 우묵한 눈으로 코코를 보았다. 못된 고양이처럼 음흉하게 웃고 있는 딸을 보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도대체 누가 널 그렇게 키운 거냐.”

“아빠가.”

“나쁜 새끼.”

힌치 백작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왕궁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이 비장했다.

* * *

율리아는 2층 자신의 방 발코니에 나와 있었다. 달빛이 찬란했다. 둥글게 차오르는 달을 보니 적막한 왕궁도 평화롭게 보였다.

“시녀님, 간식 가져왔어요.”

트루디가 둥근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달콤한 과자와 고소한 차가 올려져 있었다. 반짝거리는 은 식기가 시선을 끌었다.

시녀장이 된 이후, 코코는 궁내부를 쥐어짜다시피 괴롭혔다. 궁내부 대신이 자리를 비우자 코코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그동안 궁내부가 2왕자궁을 얼마나 괄시했는지 수년 동안 모아 놓은 증거를 들고 다니며 그들을 땅콩처럼 달달 볶았다.

은 식기와 지원금, 새로운 하녀들과 병사들까지. 확장 공사 비용도 모두 궁내부에서 나왔다.

“새로 들어온 하녀들은 잘 감시하고 있어?”

“네, 그럼요. 제가 언니들하고 한 명 한 명 지정해서 잘 감시하고 있어요. 수상해 보이는 애가 있으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래.”

율리아가 트루디에게 쟁반을 받아들었다. 쟁반을 발코니 테이블에 올려놓고 과자부터 하나 입에 물자, 트루디가 눈치를 살피더니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며 물었다.

“조만간 궁내부에 불려갈 것 같아요. 코코 시녀님이 시녀장이 되고, 율리아 시녀님이 수석 시녀가 됐잖아요. 제 담당 관리가 저희 궁 소식을 궁금해해요. 아마도 마조람 후작가에서 재촉하는 거겠죠?”

율리아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트루디를 바라보았다. 트루디는 이제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가 아니라, 저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다 어느 날 진짜 큰 사고 치는 거 아닐까.

“아무 정보도 안 주면 너를 의심할 수도 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율리아 아르테가 해방군과 접촉하려 한다고 해.”

“네에?”

트루디가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그렇게 대단한 정보를 흘려도 되는 건지, 그걸 물어보려는 것 같았다.

벌써 안절부절못하는 트루디와는 달리 율리아는 한없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해방군이 마조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으니까, 그들과 손잡으려 한다고 말해. 그럼 너한테 정확한 날짜와 장소를 알아오라고 할 거야.”

“네, 네.”

“그때 다시 얘기하자.”

트루디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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