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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156/319)

137화

맥스웰이 한 손으로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바바슬로프가 슬그머니 끼어들어 말했다.

“최악의 경우엔 납치해서 고문하는 것도…….”

“안 돼, 인마! 황제의 사절이 오르테가에서 납치당하면 전쟁의 빌미가 된다고! 카루스 님이 했던 말 잊었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르테가를 정복하는 게 아니라, 남부를 지키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하라고!”

바바슬로프와 맥스웰이 다투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만약 블라이스 백작이라면. 해방군이라는 카드를 손에 쥐고, 무엇을 희생하고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블라이스의 목적은 남부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오르테가가 헤어 나올 수 없는 분란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마조람과 그 세력, 국왕과 친제국파, 분열된 귀족들, 죽은 1왕자와 버려진 백성들.

나라면 이 판에 어떤 수를 던질 것인가.

생각을 마친 율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고 말했다.

“왕궁이에요.”

“예?”

“뭐라고?”

맥스웰과 바바슬로프가 되물었다. 율리아는 쪽지를 꽉 쥐어 구겨 버리곤, 그건 등잔불 속에 집어넣었다.

“1왕자를 살해한 건 그들이 아니니까, 억울함을 표현하기 위해 왕궁을 공격할 거예요. 지금 여기서 마조람의 세력을 줄이는 것보다는, 왕을 공격하는 편이 훨씬 큰 충격을 줄 수 있어요.”

마침 시기도 딱 좋았다.

여름 태풍 때 죽어간 백성들의 원한이 다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은 해변을 가득 채우던 흰 꽃들을 기억했다. 1왕자가 죽었다는 이유로 증거도 없이 잡아들인 무고한 자들의 피가 아직도 중앙 광장을 물들이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자들의 절규가 여전했다.

왕국은 친제국파를 옹호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나뉘어 저들끼리 싸웠다.

자금이 끊긴 마조람은 커다란 타격을 입어 숨을 죽였고, 국왕은 아들에 이어 왕비와 궁내부 대신까지 연이어 잃고 무력감에 빠졌다.

“해방군의 힘을 만천하에 보여 주면서 국왕의 무능함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예요. 제가 만약 블라이스 백작이라면 그렇게 할 거예요. 틀림없어요.”

“왕궁을 친다, 라……. 그럼 시녀님, 놈이 공격하려는 대상은 왕궁입니까? 아니면 왕족입니까?”

“왕족이겠죠.”

율리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맥스웰이 골치 아프다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막아야 합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여기서 왕족이 하나라도 더 죽었다간 왕가의 분노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학살이 일어나거나,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율리아는 블라이스가 왕족을 노릴 거라는 건 예상했으나, 누구를 공격할지 그것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샤트린, 혹은 레위시아.

바바슬로프가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나는 곧장 섬으로 돌아가서 카루스 님께 알려야겠다. 율리아는 맥스웰 네놈이 데려다줘.”

“그래, 쓸 만한 정보가 들어오면 곧장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씀드려.”

바바슬로프가 전당포 밖으로 나갔다. 율리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맥스웰에게 물었다.

“병장기는 언제쯤 들어온다고 하던가요?”

“15일에서 20일쯤 걸릴 예정입니다. 배를 통해 들여온다고 하니까, 바다에서 감시하는 편이 좋을 것 같고요.”

이용해야겠다. 율리아가 결심을 마쳤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빠르면 15일, 늦어도 20일이라.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판을 짜는 건 어렵지 않다. 심지어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맥스웰.”

“말씀하십쇼.”

“부탁이 있어요.”

율리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맥스웰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 * *

레위시아는 국왕의 집무실에 불려 와 있었다. 맞은편엔 샤트린이 의자에 앉아 그와 똑같은 표정으로 서류를 읽었다.

국왕의 업무 중 덜 중요한 것들이 두 사람에게 주어졌다. 규정에 따라 순서대로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들이었다.

다만 그 규정이라는 걸 모두 외우고 있지 않으면 수십 권에 달하는 오르테가 법전을 펼쳐 두고 비슷한 사례를 찾아 사건에 일일이 적용해야 했다.

심지어 설득력이 떨어지면 서류를 반려당했다. 국왕의 보좌관에게 꾸짖음을 당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 모든 순간이 왕위 후계자를 가리기 위한 경쟁이라는 게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집중하십시오.”

국왕의 집무실은 숨 막히는 곳이었다. 깐깐한 인상의 보좌관들이 쉼 없이 오가며 일을 처리했다. 왕궁 각 부서에서 날아오는 보고서와 귀족들, 그리고 왕국군에 이르기까지 하루에도 수십 가지 문제가 국왕에게 전해졌다.

레위시아가 서류 너머로 슬쩍 샤트린을 훔쳐보았다. 그러자 샤트린이 복화술 하듯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물었다.

“뭘 봐?”

“그냥.”

“놀지 말고 일해. 오늘도 너 때문에 늦어지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았어?”

전날 레위시아와 의견이 달라 늦게까지 국왕의 집무실에서 논쟁을 벌였던 샤트린이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레위시아도 힘들긴 매한가지였다. 그는 샤트린이 들고 있는 서류를 슬그머니 넘겨보려다가 도끼눈을 뜨는 그녀에게 제지당하곤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내가 어제 너무 맞는 말만 했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까지 언성을 높일 이유가 있었냐? 애도 아니고.”

“닥쳐, 레위시아. 난 너처럼 무책임한 이상주의자가 제일 싫어. 왕족의 의무 같은 건 내팽개치고 혼자 멀리 떠나 살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 와 이러는 이유가 뭐야?”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그리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야? 죽기 싫으니까, 방법이 없다고 했잖아.”

“그건 너무 이기적인 변명 아니야? 내가 널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이 소모적인 경쟁을 그만두기라도 할 거야? 아니잖아.”

레위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샤트린은 지난번 임명식에서 율리아와 그를 죽이겠다며 대놓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또 그러지 않을 거라 말하면서 혼란을 부추겼다.

그가 샤트린의 말투를 똑같이 흉내 내며 빈정거렸다.

“너야말로 거짓말하지 마. 왕이 되자마자 내 목을 잘라서 왕궁 벽에 걸어 놓을 속셈이잖아. 대단하신 샤트린 공주 전하께서는 형제고 나발이고 왕좌를 위해서라면 다 제거하실 수 있지.”

“잘 아네?”

샤트린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러는 너는 얼마나 대단히 너그럽기에, 편찮으신 내 어머니를 이용해서 율리아를 수석 시녀로 앉혔을까?”

샤트린은 율리아가 왕비를 협박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하지만 그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건 알았다.

“말해 봐. 레위시아, 내 어머니께 무슨 말을 한 거야?”

“궁금하면 왕비 전하께 가서 물어봐. 나한테 이러지 말고. 애초에, 그 대단하신 왕비 전하가 나 같은 놈한테 휘둘릴 정도로 만만한 분이었나?”

샤트린이 들고 있던 서류를 레위시아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그의 뺨에 얇게 종이에 베인 상처가 났다.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서류 뭉치는 다 흐트러지고, 샤트린이 던진 종이 뭉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왕의 보좌관들이 모두 이쪽을 돌아보았다.

“두 분,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레위시아가 담담한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샤트린은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곳은 국왕 전하의 집무실입니다. 여기서 결정되는 모든 것이 왕국과 연결되며, 백성의 삶을 보살핍니다. 한데 두 분은 이 중요한 곳에서 고작 싸움이나 하고 계시는군요.”

늙은 보좌관이 샤트린와 레위시아를 꾸짖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이건 마저 처리하고…….”

“돌아가십시오.”

레위시아와 샤트린은 결국 국왕의 집무실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오늘 두 사람이 한 일은 집무실에서 어린애들처럼 싸운 것밖에 없다고 보고될 것이다.

샤트린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평소 공작새처럼 화려한 차림새를 즐기는 그녀도 왕의 집무실에선 치장을 자제한 모습이었다.

“샤트린.”

“말 걸지 마.”

“왕비 전하는 좀 어때?”

“네가 알 바 아니야. 어차피 네 친어머니도 아니잖아? 걱정하는 척도 하지 마. 그동안 그렇게 미워했으면서. 차라리 잘됐다고 비웃지그래?”

“너는 내가 그분을 먼저 미워했다고 생각해?”

샤트린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레위시아를 홱 돌아보았다.

“내 어머니가 너를 먼저 미워했으니까, 정당하다는 거야?”

“억지 부리지 마. 그분을 그렇게 만든 게 내가 아니라는 것쯤은 너도 잘 알 텐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왕비 전하께서 그렇게 되자마자 네 곁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적당히 추려지지 않겠어?”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샤트린이 워낙 감정적으로 구니까, 레위시아도 자꾸 냉정함을 잃었다.

샤트린도 의심은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정말 미친 건지, 아니면 미친 척하는 건지. 만약 미친 척하는 거라면, 누구를 피해 달아난 건지.

“마조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샤트린이 물었다.

레위시아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레위시아, 순진한 생각 하지 마.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조람 후작을 적으로 돌리고 그와 싸우기라도 할까 봐?”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하겠지.”

“율리아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어? 공주를 만나거든 이간질을 하세요, 이렇게 말했냐고.”

“그런 거 아니야.”

“내 말이 틀려? 넌 율리아가 시키면 뭐든지 하잖아.”

“함부로 말하지 마, 샤트린.”

“율리아를 아무리 사랑해도 그 아이는 네 아내가 될 수 없어.”

레위시아가 덜컥 숨을 멈췄다. 갑자기 샤트린의 말투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무겁고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그토록 증오하는 아버지처럼 될 뿐이야. 율리아는 왕비가 될 수 없어. 침전에 갇힌 여자, 왕을 홀린 요부, 애첩이라고 불리면서 결국 온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받겠지.”

“닥쳐, 샤트린.”

“너와 율리아, 왕비가 될 여자 모두가 불행해질 거야.”

그러니까 포기해. 샤트린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네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증오하게 된 것도 시작은 애정결핍이었지. 레위시아, 넌 결국 그 결핍을 채워 달라고 율리아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될 거야. 사랑은 주는 거지, 받아서 채우는 게 아니야.”

“닥치라고 했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떠들어 대지 말라고 레위시아가 경고했다. 샤트린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그를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위시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멈춰선 샤트린을 지나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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