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돌이킬 수 없는
율리아의 뺨은 향기로웠다. 카루스는 달콤한 과실을 입에 문 짐승처럼 정신을 빼앗겼다. 입에 고인 침이 탐욕을 부추겼다. 자꾸만 더 깊이, 더 세게 밀어붙이라고 속살거렸다.
카루스는 자신이 미쳐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상상한 적도 없는 격렬한 희열이 온몸을 관통했다. 감각이 날카롭게 서고, 숨이 거칠어졌다. 고작 입을 맞추고 있을 뿐인데, 영혼이 맞닿은 기분이었다.
율리아가 멈췄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카루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에 지독한 열망이 들끓었다. 이성은 저 멀리 물러나고, 본능이 바짝 몸을 세웠다. 어쩌면 망가진 건 네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그만두라고 말해.”
카루스가 율리아의 입꼬리에 입술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루스의 입술이 뺨을 지나 입꼬리에 닿았다. 율리아는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제 뺨을 깨물었다. 그리고 입을 맞추고 있다.
젖은 숨이 안타까움을 머금고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카루스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율리아의 입꼬리에 입술을 대고, 느릿느릿 숨을 뱉었다.
율리아는 웃고 싶었다.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줄 아느냐고, 나중에 얼마나 크게 후회하려고 이렇게 충동적으로 구는 거냐고 비웃고 싶었다.
그가 말했다. 그만두라고 말하라고, 율리아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비겁하잖아. 먼저 다가와 입 맞출 때는 언제고, 이제 와 그만두라고 하라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 네가 거절하라고? 누구 마음대로?
율리아가 그를 살짝 밀었다. 그러곤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카루스는 그녀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조금 밀려났던 얼굴을 다시 가까이하고, 이번에는 율리아의 턱을 깨물었다. 그러곤 잔뜩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싫다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기가 막혔다. 율리아의 가슴이 그를 따라 빠르게 오르내렸다. 더운 기운이 목덜미에서 얼굴로, 이내 심장으로 번졌다.
카루스가 고개를 잔뜩 숙인 채 그녀의 턱을 깨물고 입술로 물었다. 율리아는 그를 힘으로 밀어내고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곤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이 검었다. 까맣고, 어지러웠다. 불붙은 어둠이 그 안에 있었다. 율리아는 그 빨려 들어갈 듯한 검은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
카루스가 손바닥으로 율리아의 눈을 덮었다. 그녀가 더는 자신을 보지 못하게 시야를 차단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소리가 불규칙했다. 잇새로 흘러나온 것이 한숨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율리아가 말했다.
“저는 경고했어요.”
“싫어.”
“뭐가 싫다는 거예요, 도대체.”
“그냥.”
카루스가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웃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율리아는 자신의 눈을 덮고 있는 그의 손을 치우려 했지만, 그 전에 카루스가 입을 열었다.
“미친놈이 된 것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입술이 간지러웠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숨이 율리아에게 닿았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네가 눈앞에 있으니까, 내 손에 닿아 있으니까. 그걸 방해하는 세상의 모든 걸 부정하고 싶어졌다고,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 * *
율리아가 바바슬로프를 찾아와 자신을 왕궁까지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나야 좋지. 네 덕에 오랜만에 육지도 좀 밟아 보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와야겠다. 맥스웰 자식이 숨은 맛집을 많이 알더라고. 탈탈 털어먹어야지.”
바바슬로프는 카루스에게 무슨 바쁜 일이 있어 그러는 줄 알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날씨가 좋은 날엔 작고 날렵한 쾌속선을 이용할 수 있어 좋았다. 율리아는 바바슬로프를 재촉하며 배에 올랐고, 배가 출발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괜찮아요.”
“고민 있으면 마음껏 털어놔. 난 머리가 나빠서 해결책 같은 건 제시하지 못해도, 네 편에서 욕하고 화낼 수는 있거든. 내가 또 욕을 아주 찰지게 잘하지.”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율리아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아직도 카루스의 입술이 닿아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했던 행동, 말, 그의 입술 온도까지 생생하게 떠올라 괴로웠다. 무슨 정신으로 드추바 섬을 나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가 눈을 가렸고, 입술이 닿았다.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는데 뜨겁고 부드러운 게 들어와 멋대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집중력이 흐트러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왜 그래? 누가 그랬어.”
바바슬로프가 걱정스레 물었다. 율리아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야, 진짜 무슨 일 있나 보네.”
바바슬로프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가 이를 꽉 다물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뚝에 바짝 선 근육이 꿈틀거렸다.
“어떤 개놈의 자식이 괴롭혔어? 말해. 내가 가서 확 죽여 버릴 테니까.”
그건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율리아는 바바슬로프와 함께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와 맥스웰을 찾았다. 오랜만에 전당포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온갖 물건들로 어지러운 전당포 안에서 맥스웰이 심각한 얼굴로 뭔갈 노려보고 있었다.
“시녀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무슨 일 있어요?”
“블라이스 백작이 해방군에게 제대로 된 병장기를 지원해 주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율리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지럽게 들끓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정리되고, 맥스웰이 건넨 정보가 자리를 잡았다.
“제국에서 들여온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해방군이 한 짓이라고 해 봤자, 저희 눈에는 귀족들 창고에 불 지르고 병사들 상대로 드잡이질이나 하는 수준이었는데 말이죠. 이 병장기들로 무장한 뒤라면 조금 문제가 달라집니다.”
맥스웰이 들고 있던 쪽지를 내밀었다. 율리아가 그걸 받아 빠르게 읽었다.
“군마와 공성 병기?”
그건 본격적인 전쟁을 앞둔 자의 준비물이었다.
“오르테가엔 방어벽이나 수성 병기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이칸에서 들인 군마와 공성 병기만 있으면 오합지졸 같은 해방군도 꽤 괜찮은 군단이 될 수 있겠죠.”
“블라이스 백작은 해방군에게 그걸 쥐여 주고 누굴 공격하려는 거죠?”
“모르겠습니다.”
“네?”
“놈이 해방군 떨거지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건 알겠고, 그걸 이용해서 오르테가에 분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놈의 다음 공격 대상이 누군지를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