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바실리만 없으면 그녀가 후계자였다. 마조람 후작에게는 자식이 둘뿐이었으니까. 방계의 자식을 데려온다 해도 직계가 우선이다.
크리스틴은 가주가 된 자신을 상상했다.
아버지의 넓은 서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자신, 그녀가 만나 주기만을 기다리며 복도를 가득 메운 가신들. 수십 명이 둘러앉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테이블과 매일 쌓이는 초대장과 선물.
가주 앞에서만 머리를 조아리는 가문의 원로들까지.
그때였다. 바닥만 보며 걷던 바실리가 갑자기 고개를 바짝 들어 올리더니 크리스틴이 있는 여관 창가를 바라보았다.
“……!”
어떤 우연인 줄은 몰랐다. 어쩌면 이건 그에게 찾아온 운명적인 기회였다. 바실리는 크리스틴을 알아보았고, 이내 노예장의 명령을 거부한 채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크리스틴도 그를 보고 있었다.
‘크리스틴, 살려 줘.’
바실리가 재갈을 거세게 씹었다. 그러곤 격하게 반항하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흐리멍덩하던 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살려 줘, 살려 줘! 크리스틴, 제발!’
바실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말이 아니라 신음과 괴성이 뒤섞여 나왔지만, 그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재갈에 쓸린 입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노예장이 버럭 성질을 내며 그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바실리가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그와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던 다른 노예들까지 중심을 잃고 나뒹굴었다.
“으으으, 으으으으!”
바실리의 눈에서 핏줄이 터졌다. 그는 크리스틴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크리스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차갑게 굳어 떨리던 손가락에 순간 더운 피가 돌았다. 더럽고, 끔찍한 피였다. 한데 이상했다. 뜨끈한 것이 온몸을 돌아 심장에 모이자, 죄책감 대신 다른 것이 자리를 잡았다. 탐욕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가문을 위해서는.
바실리는 이미 망가졌고, 돌아오지 않는 편이 모두를 위한 길이다. 후계자가 둘이면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가문에 파벌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건 나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희생이다.
자기합리화를 마친 크리스틴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끔찍한 자기혐오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아가씨, 다 살펴보셨습니까?”
집사가 물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크리스틴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오빠가 아니에요.”
“예?”
“바실리 마조람은 저기에 없어요.”
단호한 목소리였다. 눈동자 가득 고여 있던 눈물도 흐르지 않고 그대로 말라 버렸다.
“그렇습니까.”
집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오빠를 봤다던 사람에게 확실하게 못 박아 두세요.”
“예, 다시는 사기 치지 못하도록 따끔하게 벌하겠습니다.”
집사가 손을 내밀었다. 크리스틴은 다시 망토를 뒤집어쓰고 창가를 벗어나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건 분노한 노예장이 쓰러진 바실리를 마구 짓밟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