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네 주위에 있는 남자들이 거슬려서 밤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블라이스 백작이나 레위시아 오르테가 같은 애송이들이 너를 탐내는 게 못마땅해서 참을 수가 없다고?
아니면, 지금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고 물어야 할까.
객관적으로는 아주 짧고, 두 사람에게만 긴 시간이 지났다. 율리아는 여전히 비스듬히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루스가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손끝이 찌릿했다.
“블라이스 백작이 불편하다면 치워 줄게.”
율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드디어 카루스를 온전히 담아냈다.
그저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 순간에도 지독한 만족감이 번졌다. 카루스는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
“놈이 널 귀찮게 한다면 없애 주겠다는 말이야.”
“죽이기라도 하시려고요?”
“어려운 일은 아니지.”
율리아의 눈이 사르르 접혔다. 그녀는 그의 말을 반쯤은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카루스는 그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그를 향해 쏟아지는 의미 없는 미소에 빠져 그냥 함께 웃었다.
그래, 저 눈이었다.
눈보라 치는 산맥에서 그의 발목을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았던 건, 기습이 있을 거란 예고가 아니라 어쩌면 율리아의 저 고혹적인 눈빛이었을지도 모른다.
첫눈에 반한다거나 사랑에 운명을 건다는 낭만적인 말은 믿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저 눈빛. 그 순간을 기억한다. 율리아 아르테의 눈은 카루스에겐 빠져나갈 수 없는 벼랑 위의 감옥과도 같았다.
탈출은 불가능하다. 한 번 갇힌 자는 그 감옥에서 다시는 나올 수 없다. 그는 그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적막하던 임시 막사에 열기가 맴돌았다. 카루스에게만 영향을 주는 열기였다. 아직은 그의 가슴에만 지펴진 불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저주에 걸렸다면 좋았을 텐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난 아마 너를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오직 그것만 생각했겠지.”
“저를…… 위해서요?”
“그렇다고 이번 삶을 던져서 다음 삶으로 끌고 가겠다는 말은 아냐. 이번에 최선을 다하고, 다음에는 더 잘할 거라는 소리지.”
“왜요?”
율리아가 물었다.
그녀는 어릴 적 막대 사탕을 쥐여 주던 아버지에게 그랬듯, 간격을 주지 않고 물었다. 거리를 재지도 않았다. 말해 주지 않으면 떼를 쓰기라도 할 것처럼 그를 곧게 바라보며 물었다.
카루스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도 곧장 대답해 주지 않았다. 최대한 길게 뜸을 들이며 율리아를 애타게 만들고, 짓궂은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나는 계속 너를 만나고 싶으니까.”
고통뿐인 삶이 계속되더라도 너를 만날 수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거든.”
율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로 그를 비난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이 뭘 아느냐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고 탓하지도 못했다.
카루스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아홉 번째를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그 어떤 남자도 그녀의 닫힌 마음에 닿지 못했다. 율리아 아르테의 마음은 텅 비어 꽉 잠긴 감옥이었다. 그 안엔 첫 번째의 율리아가 저주받은 채 갇혀 있었다.
카루스가 그 감옥의 문을 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낡은 자물쇠를 뜯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러곤 그녀에겐 한마디 말도 없이 그 감옥을 자신의 기억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율리아가 가진 마음의 감옥엔 바닥이 없었다. 카루스가 아무리 따스한 말로 채우려 해도 밑바닥이 없어 쌓이지 않았다. 그는 그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녀의 감옥에 들어왔다.
카루스의 말, 행동, 눈빛, 손, 웃음. 그런 것들이 쏟아졌다. 자꾸자꾸 나타나 어지러웠다. 바닥이 없어 뻥 뚫린 아래로 그에 대한 기억이 쏟아져, 율리아의 시선을 빼앗았다.
아까웠다.
저걸 쓸어 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됐다. 바닥이 없는 자신의 감옥이 끔찍했다. 카루스를 말리고 싶은데,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어떤 순간을 쏟아부었다.
처음 만났던 순간, 손을 잡았던 순간. 그는 그녀를 위해 절묘한 때에 왕궁에 나타나 주고, 함께 모래 위를 걸었다.
“하지 마세요.”
율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녀는 카루스의 진심을 알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그와 마음을 나눌 자격이 없었다.
이번에는 카루스가 물었다.
“왜?”
율리아가 서둘러 대답했다.
“무의미한 일이니까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 율리아는 스스로 상처받았다. 화살처럼 상대를 꿰뚫듯 쏘아지던 그녀의 눈동자에 격렬한 파동이 일었다.
거짓말이었다.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와의 기억은 이미 너무 소중하다. 놓치고 싶지 않아, 자꾸만 손을 뻗게 된다. 채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끌어안으려고 발버둥 친다.
카루스가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그러곤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곳에 손가락을 멈추고,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이 율리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목이 콱 막히도록 무거웠다. 뜨겁고 격렬하기까지 했다.
“날 너무 괴롭히지 마.”
“제가 언제 그랬어요.”
“널 아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게 될 것 같으니까.”
율리아의 뺨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던 카루스의 손가락이 조금씩 내려가 그녀의 입술을 덧그리듯 매만졌다. 뾰족하게 솟은 입술 산에 손끝이 스치자, 그의 입에 침이 고였다. 툭 튀어나온 목젖이 느리게 움직였다.
율리아는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낮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넌 너무 겁이 없어.”
“당연하잖아요. 저는 다시 살 수 있으니까요. 실패하면 다시 시도하면 되고, 틀린 건 바로잡으면 돼요.”
율리아가 카루스의 손을 잡아챘다. 고개를 돌렸던 그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고통도 마찬가지예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카루스 님한테는 그게 안 돼요. 너무 무서워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마음이 조급해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율리아는 어느새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바짝 다가가 있었다.
카루스의 새카만 눈동자가 코앞에 있었다. 그에게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율리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일렁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이렇게 말했다.
“잊히고 싶지 않아요.”
“기억할 거라고 말했잖아.”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카루스 님을 또 만나서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할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이게 제 마지막 삶이라 여기고 살겠다고.”
율리아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불행해진다 해도…….”
날 것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내가 갖고 싶어질 것 같아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얼어붙은 수면에 강렬한 파동이 전해졌다. 파동은 바위를 부수고, 흐름은 세계를 무너뜨린다.
율리아의 감옥에 바닥이 없어 기억으로 채울 수 없다면, 그 감옥을 부수면 된다. 그는 그동안 끈질기게 그녀의 감옥에 드나들었다.
카루스가 커다란 손으로 율리아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의 입술이 뺨에 내려앉았다. 애끓는 신음과 함께 입술로 그녀의 뺨을 깨물고, 이내 젖은 입술을 찾았다.
자물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망가진 감옥 안에 자신의 마음을 붓고 또 부었다.
그녀가 직접 감옥을 부수고 나올 때까지.
* * *
크리스틴은 집사를 따라 서남쪽 부두의 낡은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몰랐으나, 그곳은 해적이나 노예 상인 등의 범죄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여관이었다. 긴 망토를 뒤집어쓴 크리스틴이 여관 2층으로 올라가 창가에 섰다.
“저들 중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집사가 창밖을 가리켰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부두에 한 무리의 선원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손발에는 묵직한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선원이 아니라 노예들이었다.
망토를 끌어 내린 크리스틴이 창가에 바짝 달라붙어 노예들의 얼굴을 살폈다.
진짜 바실리가 거기 있었다.
‘오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리긴 했지만, 그는 바실리였다. 그녀의 오빠였다.
바실리는 본래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샌님이었다. 한데 저 앞에서 끌려가는 남자의 몸은 검게 그을려 근육과 흉터로 가득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과 수염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고, 흐릿한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다른 노예들과는 달리, 그의 입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무리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려 하면 노예장이 득달같이 달려와 채찍을 꺼내 들었다.
크리스틴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심장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방향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뛰었다.
‘도망쳐.’
크리스틴이 속으로 말했다.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치안대가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면 금방일 것이다. 가서 내가 마조람 후작가의 바실리라고, 저 깡패들이 자신을 노예로 부려먹었노라고 고발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바실리는 돌아와 마조람의 후계자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후계자로?’
크리스틴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바실리가 돌아오면 그녀는 절대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가주는 정의롭고 영리한 자가 오르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크리스틴도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주는 죄악을 짊어지는 사람이야.’
바실리가 노예장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누가 구해 주지 않는 한은 절대 달아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크리스틴은 자문했다.
‘오빠를 구할 거야?’
대답할 수 없었다.
‘오빠를 버릴 거야?’
대답할 수 없었다.
더럽고 끈적끈적한 감정이 발밑에서 종아리를 타고 올라와 온몸을 뒤덮었다. 피부를 타고 스며들어 심장에 쌓이고, 영혼을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