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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152/319)

134화

율리아는 카루스와 함께 쾌속선을 타고 드추바 섬으로 갔다. 코코에게 휴가도 받았겠다, 주둔지 구경도 할 겸 오랜만에 바바슬로프의 얼굴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배에서 내린 율리아는 제일 먼저 바바슬로프를 찾았다. 저 멀리 망루 위에 있던 그가 먼저 율리아를 발견하곤 우렁찬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복덩이 왔네!”

카루스는 두 사람이 마음껏 인사를 나누도록 내버려 두고, 주둔지 한쪽 임시 막사에 있는 자신의 기사들에게 갔다. 그러곤 언제나 그를 대신해 은밀한 임무를 처리하는 덩치 큰 기사를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이걸 비밀리에 바이칸 북부 독립군에게 보내. 누가 보냈는지 모르게, 이왕이면 정복 전쟁 때 북부 광산 지대를 황제에게 빼앗긴 자였으면 좋겠군.”

“이건…….”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다. 만약 그들이 이걸 팔아서 전쟁지원금으로 쓰게 된다면, 보석이 다시 황제에게 돌아가도록 유도하면 더 좋고.”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덩치 큰 기사가 피식 웃었다. 카루스의 의도를 읽었기 때문이다.

“블라이스 백작의 꿈자리가 뒤숭숭하겠군요.”

“데네브라의 꿈자리도 마찬가지겠지.”

카루스가 악의 가득한 웃음을 터뜨렸다.

* * *

크리스틴 마조람의 브레웨 아카데미 졸업 자격이 최종 취소되었다. 학력과 기록, 지금까지 크리스틴이 가져갔던 모든 상장과 성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교수들은 크리스틴의 졸업 자격은 취소하되, 그녀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자고 주장해 왔다. 크리스틴이 우수한 학생이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며, 마조람 후작이 지금까지 브레웨 아카데미에 건넨 엄청난 양의 후원금을 무시할 수 없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학장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보육원 출신의 평민이 브레웨 훈장을 받은 건 긴 아카데미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토록 뛰어난 학생을 마조람이 권력으로 옭아매 희생양으로 삼은 걸 알고도 이 일을 대충 넘어간다면, 브레웨 아카데미는 다시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학장은 마조람 후작가의 분노를 감수하고 크리스틴의 졸업 자격과 그 외 모든 기록을 말소시켰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카데미 전체에 공표했다.

“아가씨…….”

크리스틴은 집사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통보서를 받아 든 크리스틴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작 한 장의 종이. 이 보잘것없는 종이 한 장이 그간 그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뒤에서 쉬쉬하던 귀족들도 이제는 그녀를 거리낌 없이 비웃게 될 것이다. 마조람의 공주라 불리던 크리스틴은 이제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온갖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되리라.

“고작 이런 거나 받으려고…….”

크리스틴이 이를 악다물고 중얼거렸다.

약혼식에서 큰 창피를 당한 후, 크리스틴은 후작가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도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까웠던 친구도, 가신 가문의 자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인 후작이 그런 크리스틴을 걱정하며 이것저것 해 주려고 했지만, 최근 가문의 자금줄이 끊어지고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게 되자 얼굴 보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마조람 후작은 거대 파벌의 수괴였다. 그의 하루는 무척이나 촘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에 달하는 귀족이 저택을 드나들었다.

최근엔 그 숫자가 조금 줄어들었지만, 덕분에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늘었다.

그러자 바실리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출중한 아들은 아니었으나, 다음 대를 이어 갈 후계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불만을 다스릴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크리스틴의 마음은 새카맣게 죽어만 갔다.

마조람의 보석이라 불리던 크리스틴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를 찾는 사람도, 원하는 사람도,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자신의 것이라 믿었던 모든 것은 결국 가문의 것이었다. 크리스틴은 마조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이게 다 율리아 때문이야.’

율리아를 떠올릴 때마다 지독한 열등감에 휩싸였다. 죽이고 싶도록 밉다가도, 한편으로는 부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너무 싫은데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율리아는요?”

크리스틴이 물었다.

집사가 한참 침묵하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크리스틴이 율리아 아르테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실리가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틴 역시 그에게 율리아의 소식을 요구했다.

“수석 시녀가 된 이후, 2왕자궁에서 두문불출하며 지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궁내부에 심어 둔 관리에게 좀 더 자세한 소식을 캐오라고 말했으니, 기다리다 보면…….”

“궁내부 대신의 빈자리를 이번에도 우리 사람으로 채울 수는 있는 건가요?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계시죠?”

“후작님도 백방으로 노력 중입니다만 국왕 전하께서 왕비 전하의 일로 상심이 크다고 합니다.”

“상인연합은 몰라도 궁내부 대신은 꼭 우리 편이어야 해요. 집사가 아버지한테 잘 말해 보세요.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가신 가문의 충성심이나 단속하고 있을 시기가 아니에요.”

“예, 아가씨.”

그래도 집사는 크리스틴이 바실리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바실리는 율리아에게 집착하는 동안 눈먼 사람처럼 시야가 좁아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적어도 크리스틴은 왕궁 안에서 마조람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으니까.

밖으로 나가려던 집사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에 우아하게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크리스틴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음은 새카맣게 죽어 가고 머릿속엔 폭풍이 휘몰아칠망정, 크리스틴은 우아하고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가문의 고용인 앞에서 무너진 모습을 보일 순 없다는 그녀 나름의 자존심이었다.

약혼식이 치러지던 왕궁 연회장에서 미친 사람처럼 발작했던 날, 그날부터였다.

크리스틴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앳된 미소도 사라졌다. 그녀에게는 가면이 필요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벗겨지지 않는 철의 가면.

그리고 이 집에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후작 부인이었다.

집사는 크리스틴에게서 후작 부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바실리와는 달리, 그녀를 향한 일말의 기대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마조람의 진짜 후계자는 어쩌면 여기 내 눈앞에 있는 소녀가 아닐까. 집사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아가씨, 주제넘은 충고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괜찮으니까 말해요.”

“가문에는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집사의 말이 크리스틴의 귀를 찌르듯 뚫고 들어왔다.

“저와 같은 가신들에겐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조람이 앞으로도 이 나라 최고의 가문으로 버텨 줄 거라는 믿음이요.”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서남부 외곽 금지된 부두에서 바실리 도련님과 비슷한 자를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뭐라고요?”

크리스틴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치뜨고 집사에게 물었다.

“오빠를 봤다고요? 누가요? 어디서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방금 보고받은 거라서…….”

“당장 안내하세요.”

크리스틴이 하녀에게 모자를 가져오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곤 서둘러 방 밖으로 나서며 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요? 말씀드렸나요?”

“후작님은 방계의 가신들과 영지 순찰 중이시고, 후작 부인께서는 가문의 원로들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진짜 오빠를 봤다고 했나요? 확실해요?”

크리스틴은 하녀가 가져온 모자를 쓰고, 마차를 대기시키라고 말했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집사가 잠시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을 때 조용히 말했다.

“저희가 도련님을 찾고 있다는 소문이야 한참 전부터 있었던지라, 어중이떠중이들이 금화를 노리고 애먼 시체를 가져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번에도 비슷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죠.”

“사람을 보내려고는 했습니다. 워낙 가짜 제보가 많아서…… 일일이 말씀드리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다녀오죠.”

“모시겠습니다.”

떨리는 눈동자와 파리한 얼굴, 집사의 눈에 비친 크리스틴은 바실리를 몹시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관찰하는 집사의 시선이 집요해졌다.

* * *

율리아는 카루스의 부하들에게 환대받는 손님이었다. 그녀는 바바슬로프와 함께 돌아다니며 낯익은 기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여태 율리아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뚝뚝한 기사들이 그녀를 향해 어떻게든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바바슬로프가 악몽에 시달릴 것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율리아는 주둔지를 한 바퀴 돌아본 뒤에 카루스의 임시 막사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완공될 때까지는 기지에 가 계셔도 되는 거 아니에요? 임시 막사는 불편할 텐데.”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내가 매일 노려보고 있으니까 일꾼들 공사 속도가 느리다면서, 바바슬로프가 너랑 같이 섬 밖으로 나가 있으라더군.”

“쫓겨나는 거예요?”

율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카루스가 건넨 찻잔을 손에 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블라이스 백작이 네 주위에 얼쩡거리는 게 불쾌하대.”

“바바슬로프가요?”

“맥스웰도.”

“카루스 님은요?”

율리아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카루스는 똑같은 찻잔을 손에 쥐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어봐 놓고, 율리아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긴 속눈썹이 하루를 마감하는 나비처럼 나붓하게 내려앉았다.

카루스는 그를 피해 방향을 튼 그녀의 시선을 굳이 잡아채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율리아는 그를 외면하고 있는데, 그게 기꺼워 가슴이 뛰었다.

율리아가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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