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율리아는 아버지와 자신처럼 배에서 살던 자들이 어디에 쌈짓돈을 보관하는지 알았다. 젖지 않도록 기름 먹인 가죽을 덧대어 만든 작은 주머니가 조끼 안쪽이나 넓은 허리띠, 혹은 바지 밑단에 있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살라고 말했다. 절대 굶지 말라고. 그래서 나쁜 짓인 걸 알면서도 도둑질을 가르쳤다.
율리아는 두렵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주머니를 뒤지는 것보다 굶어 죽는 게 더 무서웠으니까.
그때, 상념에 빠져 있던 율리아의 귓가에 카루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바깥 구경이 하고 싶어 뚜껑 없는 마차까지 골라 타 놓고, 율리아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생각?”
“어렸을 때 일이요. 제가 아주 못된 꼬마 도둑이었다고 말씀드렸었나요?”
“아니, 궁금해졌어.”
그가 웃으며 율리아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좁은 마차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으려니, 두 사람의 어깨와 팔이 닿았다. 율리아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그의 시선을 피하려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았다.
“죽은 해적의 주머니를 털었어요.”
율리아는 처형당한 해적들의 주머니에서 온갖 것들을 발견했다.
“위조된 수표나 계약서, 사면증서도 있었어요. 금화가 나오면 행운이었고, 편지나 그림 같은 개인적인 물건이 나오면 재수가 없는 거였죠. 그건 돈이 안 되니까.”
율리아는 해적들이 신보다 금을 믿는 자들이라고 배웠다. 칼보다 바다를 두려워하고, 영혼이 없어 죽은 뒤에도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
“주로 뭐가 나왔는데?”
“그리움이 가득한 편지요.”
율리아가 작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재밌는 사실이에요. 그 무시무시한 해적들이 죽을 때까지 가장 소중하게 보관하는 물건이 금화가 아니란 게. 그렇잖아요?”
“그런 놈들도 결국엔 과거의 추억과 사람의 정에 기대 살아가는 존재라는 건가.”
“보고 싶다거나 몸 건강하라거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그런 내용이었어요.”
율리아는 그때 깨달았다.
“후회되더라고요. 저는 아버지한테 편지 한 장 써 준 적이 없거든요. 책을 사 달라고 그렇게 졸랐는데, 정작 짧게 쪽지 한 장 써 준 적이 없어요.”
“해적이었어?”
“아마도요. 그래서 도둑질을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돈이 필요하지 않게 된 뒤에도 해적의 처형식이 있는 날에는 꼭 바닷가에 나갔어요. 혹시 언젠가…… 내가 아는 얼굴이 그 자리에 있을까 봐.”
카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율리아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느리게 맞춰졌다.
“죽었을 거예요.”
율리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살아 있을 리가 없어.”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얼마쯤 달리자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새파란 하늘과 검푸른 바다가 맞닿아 흰 선을 그렸다.
“거의 다 왔습니다! 부두 끝까지 갈까요?”
“저 앞에서 내리지.”
“예, 알겠습니다!”
마부는 카루스가 가리키는 곳까지 마차를 몰았다. 그곳은 오래된 부둣가였다. 율리아에게는 꽤 익숙한 곳이기도 했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카루스가 율리아의 차림새를 눈으로 훑더니 짓궂은 웃음기를 머금고 물었다.
“손잡아 줄까.”
“안 잡아 주셔도 돼요.”
“여기부터 모래사장인데?”
“열두 살부터 치안대도 따돌리고 달리던 실력이에요. 카루스 님 눈에는 제가 되게 굼떠 보이나 봐요?”
“위태로워 보이지.”
“지나친 걱정이네요.”
율리아가 마차에서 내리며 가볍게 웃었다. 카루스는 어디 한번 보겠다면서 팔짱을 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율리아는 모래사장 위를 사뿐사뿐 걸었다. 구두가 가볍고 굽이 낮아 다행이었다. 가을이라 치마가 조금 묵직해져, 바람이 불어도 뒤집히지 않았다.
“드추바 섬에는 가 본 적 있어?”
카루스가 옆으로 다가와 걸었다. 율리아는 그가 자신에게 팔을 내미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끝만 살짝 걸쳐지게 잡았다.
“가 본 적 없어요. 이야기만 많이 들었죠.”
“네 과거에선 내가 내년 봄이 되어서야 오르테가에 왔다고 했으니, 드추바 섬의 토착민을 해적으로부터 지켜 준 건 전임 사령관이었나?”
“아뇨. 그는 그들을 지켜 주지 않았어요. 오르테가 해군이 막으려고 해 봤지만, 군함이 부족해 해적을 막을 수 없었어요. 드추바 섬은 늘 해적들의 영토가 되었죠.”
“그렇군.”
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찾으려고는 해 봤어?”
“아뇨.”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언젠가 해적의 주머니를 털다가 엄지손톱만 한 보석을 발견한 적이 있어요. 파랗기도 하고, 초록색인 것 같기도 하고, 바다…… 혹은 하늘을 닮은 색의 반투명한 보석이었어요.”
“비싼 거였나?”
“몰라요. 아닌 것 같아요. 어른들은 그걸 빼앗으려고 혈안이었는데, 도둑질한 걸 들키지 않으려고 꿀꺽 삼켰더니 입에서 녹았거든요.”
카루스가 입술을 움찔 떨었다. 얼마 전 맥스웰이 조사해 왔던 그녀의 과거가 떠올랐다. 율리아가 그때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설탕 과자처럼 녹았어요. 얼음보다 더 빨리. 혀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입에 바람을 머금은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들긴 했는데, 맛을 느낄 새도 없었죠.”
카루스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아요. 믿기 어려운 얘기죠. 그때도 아무도 안 믿어 줘서 치안대 감옥에 한 달이나 갇혀 있었어요.”
“믿어.”
율리아는 그가 멈춘 자리에서 사선으로 조금 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짙은 초록색 눈동자는 선악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처음 저주에 걸렸다는 걸 알았을 때는요. 내가 드디어 천벌을 받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도둑질이나 하고 살았던 못된 꼬마. 아버지는 해적이고, 죽은 사람의 주머니나 털고.”
율리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루스도 그녀를 따라 걸음을 뗐다.
“블라이스 백작이 제게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주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카루스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율리아는 이번에도 카루스보다 반걸음 앞선 위치에서 그를 돌아보았다.
“마음을 고백하기라도 했어?”
그렇게 물어 놓고, 카루스는 금세 후회했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 블라이스 백작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율리아에게 접근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봐야 했다. 그런데 자꾸만 놈이 그녀를 동경하면서 집착한다는 맥스웰의 말이 떠올라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율리아가 카루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넌 이걸 가질 자격이 있어.’”
“뭐?”
“‘돌이킬 수 없는 사랑.’”
카루스가 주머니 속에 있던 왼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손아귀엔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가 쥐여져 있었다.
입에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달궈진 가슴에 열기가 쌓였다. 맥스웰이 말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율리아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화를 참기 어려웠다.
“놈이 그걸 대놓고 말했다고?”
“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착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율리아가 아주 살짝 잡고 있던 카루스의 팔을 부드럽게 당겼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그가 자연스레 걸음을 떼었다.
“절 시험하려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맥스웰에게 건네준 거예요. 카루스 님께 조언을 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거든요.”
카루스가 주머니 속에서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꺼냈다.
“이 보석은 데네브라의 자존심이야.”
율리아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황제의 탐욕이기도 하고.”
카루스의 말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율리아는 바이칸 제국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데네브라 황비와 크세노 황제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래서 카루스가 한 말의 진의를 파헤치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고민할 것 없어.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황제는 북부 정벌의 전리품 중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목걸이로 만들어 황비 데네브라의 목에 걸어 주었다.
황제는 황비를 아꼈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황제에게 어울릴 만큼 오만한 여자였다.
하지만 데네브라는 황제를 사랑하지 않았다.
“데네브라는 그 목걸이를 황제가 채운 족쇄라고 여겼어. 황제의 권좌는 사랑하면서, 그를 증오했거든. 그래서 블라이스 백작이 사랑과 충성을 모두 바치겠다고 하자, 녀석에게 덜컥 채워 버린 거야.”
“블라이스 백작도 제게 그런 의미로 그걸 준 걸까요?”
“그건 모르겠군.”
카루스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데네브라가 지긋지긋했다. 그를 사랑한다면서 괴롭히고, 죽이려고까지 하는 여자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블라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카루스는 마음의 결핍을 면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핍만으론 블라이스의 비틀린 성격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 과거에 결핍이 없었어도 놈은 똑같은 죄악을 저질렀을 것이다.
“이 보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
카루스가 브로치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떻게 하시게요?”
“돌려줘야지.”
불행을 상징하는 보석이니까, 그 불행의 주인에게 돌려주면 된다. 카루스의 말을 듣던 율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누구에게 돌려주시려고요?”
황제와 데네브라, 블라이스 백작 중 누구에게 돌려줄 것인가.
카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늘 일정한 무게감을 가지고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깜짝 놀랄 만큼 심술궂은 웃음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