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그러니까 말이다! 그 변태 새끼가 우리 시녀님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다고! 그 뭐냐, 천적을 동경하듯 바라본다니까? 너 제물이 마왕한테 아부하는 거 봤어? 진짜 이상한 놈이야. 시녀님한테 온갖 좋은 건 다 갖다 바치려고 한다고!”
“온갖 좋은 거라니. 고작 다이아몬드?”
바바슬로프가 크게 코웃음 쳤다. 그가 보기에 율리아는 보석 따위로 마음이 움직일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복덩이가 다이아몬드를 받아 줬다면 그건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일 거야. 넌 인마, 가까이에서 그렇게 겪고도 모르나?”
“알지. 그래서 더 이상해.”
“뭐가 이상해.”
“시녀님이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나한테 줬거든.”
“엉?”
망루 위에 몹시 찝찝한 침묵이 맴돌았다.
“나한테 줬다고.”
맥스웰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웬 브로치 하나를 내밀었다. 어찌나 만지기 싫었던지, 구깃구깃한 손수건으로 꽁꽁 싸 놓기까지 했다.
바바슬로프와 카루스가 동시에 얼굴을 구기며 시선을 모았다.
“율리아가 그걸 왜 네놈한테 줬는데?”
카루스가 묻자, 맥스웰이 앓는 소리를 내며 하소연했다.
“저도 그게 궁금해서 몇 번이나 물어봤거든요. 근데 시녀님이 처음에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웃으면서 선물이니까 부담 갖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이 대륙에서 손에 꼽히도록 값비싼 보석을 휙 던져 주고는 부담 갖지 말라니. 이게 말입니까, 당나귀입니까.”
피처럼 붉은 다이아몬드가 태양 빛을 머금고 불길하게 빛났다.
바바슬로프가 가까이에서 그걸 들여다보더니 눈을 씻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아…… 기억나네. 데네브라 황비가 매일 목에 걸고 다니던 거잖아. 그때는 목걸이였는데? 블라이스 자식한테 주려고 브로치로 만들었나?”
그리고 그게 율리아의 손을 거쳐 맥스웰에게 왔다.
바바슬로프가 끔찍하다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비싼 보석이라고 해도 변태가 묻으면 재수 없어진다면서.
맥스웰도 이번만큼은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며 카루스에게 애원했다.
“이거 어떻게 합니까, 예?”
카루스가 한숨을 내쉬며 난간에 걸터앉았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불행한 보석이었다.
십여 년 전, 황제가 북부 정벌을 시작했을 때였다. 전쟁에는 돈이 든다. 황제는 가장 먼저 북부에서 가장 큰 광산을 빼앗았다. 그 광산을 상징하던 게 바로 이 보석이었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황제가 약탈한 전리품이었고, 데네브라 황비의 손을 거쳐 블라이스 백작에게, 그리고 율리아에 의해 카루스에게까지 오게 되었다.
“율리아가 준다고 덥석 받아 온 네놈 잘못이지, 왜 나한테 와서 귀찮게 구는 거냐.”
“덥석 받다뇨! 제가 미친놈입니까? 시녀님이 주는 건 돌멩이도 좋은데, 이거는 아니라고 펄쩍 뛰었죠!”
카루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이런 건 받을 수 없다고, 그냥 블라이스 그 자식한테 돌려주라고 조언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시녀님이 그건 너무 얻을 게 없는 방식이라면서…….”
얻을 게 없는 방식이라니. 율리아다운 말이었다. 그녀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입술을 우물거리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카루스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피어났다.
“웃을 일입니까, 이게? 예?”
“시끄럽다.”
“그 자식이 진짜 우리 시녀님을 사, 사…… 좋아하는 거면 어떡합니까? 예? 마음 같아서는 몰래 확 죽여 없애고 싶은데, 그러면 일이 꼬여서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하고!”
맥스웰이 결국 버럭 짜증을 냈다. 카루스가 답을 알려 줄 거라 믿고 드추바 섬까지 왔는데, 그는 적당히 웃어넘길 뿐 해결책을 건네주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는 다이아몬드가 무거웠다. 이 보석의 소유자는 피를 불러온다던가, 불행해진다던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속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리 내놔.”
카루스가 손을 내밀었다.
맥스웰은 크게 반색하며 브로치를 그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휴, 역시 배포가 크신 우리 사령관님. 데네브라의 보석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가시고. 대단하다니까. 그래서 그 여자가 카루스 님을 못 잊어 집착하는 걸까요?”
“닥쳐.”
카루스가 살벌하게 웃으며 맥스웰을 노려보았다.
* * *
여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가을이 선연했다. 올해는 계절의 변화가 빠른 모양이다. 남부는 겨울이 짧은 만큼 하반기의 날씨 변화에 민감했다.
율리아는 카루스에게서 만나자는 전갈을 받고 왕궁 밖으로 나왔다.
며칠 동안 축축한 안개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도 우중충해 보였는데, 이날은 무척 날씨가 좋았다.
그래서 그런가, 뚜껑 없는 마차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오르테가는 바닷바람 때문에 뚜껑 없는 나들이용 마차가 다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왕궁 안에서 귀족들이 타고 다니는 정도였는데, 그 나들이용 마차들이 거리를 오가며 부유한 행인들이 날씨를 즐길 수 있게 도왔다.
자신을 데리러 나온 카루스에게, 율리아가 물었다.
“카루스 님, 우리도 뚜껑 없는 마차 탈까요?”
“그럴까.”
율리아가 왕궁 마차를 돌려보낸 뒤 뚜껑 없는 마차를 불러 탔다.
햇살은 따끈따끈한데 가을바람이 시원했다. 모자가 날아갈까 싶어 끈을 바짝 조여 맨 율리아가 마차 난간에 몸을 기대고 거리를 돌아보았다.
왕궁 안에 있을 때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계절의 변화가 어떤지,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 안에서 권력자들에게 어떤 비극이 일어나도, 가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해바라기처럼 밝았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마부의 목소리도 활기찼다. 카루스가 여기서 제일 가까운 부둣가로 가 달라고 말했다.
“가을 바다가 좋지요! 남부 토박이들은 여름보다 가을 바다에서 노는 걸 더 좋아하잖아요? 아가씨도 남부 토박이세요?”
“아니요.”
율리아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차가 출발했다. 카루스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남부 토박이 아니었어?”
“저도 잘 몰라요. 어디 출신인지.”
그녀는 남부 토박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북부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오르테가의 국민이면서 오르테가가 고향은 아니었다.
어린 그녀를 보육원에 맡긴 사람은 아버지였다. 어렴풋한 과거지만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던 기억은 있었다. 어머니는 누군지 몰랐으나,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살았던 건 기억이 났다.
그는 무역선의 선원이었거나, 어쩌면 대형 어선을 타고 먼바다를 다니는 어부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율리아는 그가 해적이었을 거라고 믿었다.
폭풍우 치는 바다를 떠돌아다니면서도 뭍에 내린 적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어쩌다 한번 배를 땅에 대는 날에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싸구려 사탕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한동안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보육원에 맡겨지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알록달록하고 커다란 막대 사탕을 쥐여 주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율리아는 이번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굶지 마라. 무슨 수를 써서든 굶지 말고 잘 살아. 이건 너를 버리는 게 아니라, 너를 살리는 거라는 걸 알아 줘.”
“왜?”
“도둑질하는 법을 가르쳐서 미안해. 책을 많이 못 사 줘서 미안해. 엄마 없이 키워서, 그것도 미안해. 너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해. 이렇게 나쁜 놈이라서…… 그냥 다 미안해.”
“왜 그래?”
“내가 죽일 놈이야. 난 죽어 마땅해. 그런데 넌 아냐. 넌 살아.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잘 살아. 너는 나와 함께 있기엔 너무 예쁘고…… 너무 괜찮은 녀석이야.”
“왜 이러냐니까? 어디 아파?”
“다 잊어버려. 알았지? 배에서 살았다는 것도 다 잊어버려. 나랑 있었던 일은 그냥 다 모르는 거야. 내 말 알아들었지?”
그러니까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 어린 율리아는 그 이유를 계속 캐물었다. 평소엔 아무리 귀찮게 해도 잘만 대답해 주던 아버지가 그날은 어쩐 일인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고 거친 손이 계속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이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그러면 미안한 짓을 하질 말든가.
보육원에 맡겨진 뒤에도 한동안은 매일 그를 기다렸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데리러 와 줄 거라고 믿었다. 손바닥만 한 막대 사탕을 들고서 다시는 널 버리지 않겠다고 새끼손가락 걸고 맹세할 거라고.
하루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계절이, 한 해가 지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 하나 없었다.
매일 원장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귀찮게 굴지 말고 귀족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로 나가서 구걸이나 하라는 질타였다.
율리아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날 데리러 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가야겠다. 그를 잊어버리기 전에 찾아가서, 왜 날 버렸느냐고 따져야겠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아이들이 구걸해서 얻어 오는 건 대부분 싸구려 음식이었다. 어쩌다 귀족이 금화를 던져 줄 때가 있었지만, 그건 모두 원장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율리아는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게 바로 해적들의 처형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