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코코가 외출한 뒤에는 맥스웰이 찾아왔다. 이래저래 바쁜 날이었다. 그때 율리아는 자신의 방에서 선물을 풀어 보고 있었다. 트루디가 맥스웰의 방문을 알렸고, 율리아는 그를 안으로 들인 뒤에 주위를 물렸다.
맥스웰이 모자를 벗으며 히죽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이러기예요?”
“아니, 꼭 해야 하는 말인 것 같아서요. 카루스 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주둔지에 계시느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지만요.”
맥스웰이 넉살 좋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율리아에게 들어온 선물을 구경했다.
“평민이라고 무시할 때는 언제고, 이 선물들은 다 뭡니까?”
“이래놓고 연회에서 마주치면 또 무시할걸요.”
“아니, 도대체 창자가 얼마나 심하게 꼬였길래.”
율리아가 선물을 대충 한쪽으로 치워 놓고 맥스웰에게 차를 대접했다. 그러곤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차분히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뭘요. 시녀님이 시키는 일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해 드리라고 카루스 님이 명령하셨는데요.”
“왕비궁 사람들이 다녀간 뒤에는 어떻게 됐어요?”
“산파 역할을 했던 여자랑 몇몇은 돈을 쥐여 주고 국외로 보냈습니다. 집도 깨끗하게 치웠고요. 그랬더니 다음 날인가, 후작 부인이 보낸 자들이 와서 확인하더라고요.”
“그 집에 진짜 그 여자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맥스웰이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 집은 마조람 후작 부인이 은밀하게 사용하는 안가가 맞았다. 율리아의 기억은 틀림없었다. 다만 그녀는 왕손을 가진 여자가 어디에 감금돼 있는지는 몰랐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맥스웰을 보내 확인케 했으나 그곳은 아니었다.
“출산을 준비한 흔적과 산파라……. 다시 생각해도 대단한 순발력이었습니다.”
“그걸 하루 만에 꾸며 준 맥스웰이 더 대단해요.”
율리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후작 부인이 왕손을 숨겨 놓고 있다는 걸 확신했기에, 거짓을 고할 때도 망설임이 없었다.
맥스웰을 시켜서 산실을 꾸며 놓고 산파에게 거짓말을 시켰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었다.
“후작 부인이 진짜로 왕손을 숨겨 둔 곳은 어디일까요. 부하들을 시켜서 오르테가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녀님, 확실한 거죠?”
“네, 확실해요.”
“그러면 제가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추적해 보겠습니다.”
“부탁드려요.”
맥스웰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마친 율리아가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지만, 그는 바쁘다며 거절했다. 아무래도 마조람 후작 부인이 오르테가가 아닌 곳에 그 여자를 감금해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드추바 주둔지로 가시는 건가요?”
“아뇨. 배 타는 건 질색이라서요. 카루스 님이야 뭐, 제가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잘 계실 겁니다. 왜요? 전할 말씀이라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율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맥스웰은 그녀에게 수석 시녀가 된 걸 축하한다는 말을 또 한 번 한 뒤에야 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그때, 웬 보석함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율리아의 책상 위였다. 보석함은 반쯤 열린 채, 안에 있는 브로치가 다 드러나도록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었다.
“저게 뭐…….”
“아, 그러고 보니까 이거요.”
율리아가 상자 안에서 브로치를 꺼냈다. 그러곤 맥스웰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블라이스 백작이 축하한다면서 보낸 선물이에요. 그냥 받기엔 좀 께름칙해 보여서,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어요.”
“기분 나빠.”
“맥스웰, 이게 뭔지 알아요?”
“네, 기분 나쁜 거요.”
그가 소름 끼친다는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게 뭔데 그래요. 말해 주세요.”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이요.”
“네?”
“그런 뜻을 가진 보석입니다, 그거.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라고…… 바이칸에서 엄청 유명해요. 도대체 그런 걸 왜 우리 시녀님한테 보내고 지랄이랍니까, 그 변태 새끼는!”
맥스웰이 결국 버럭 화를 냈다.
* * *
카루스 란케아는 사랑을 믿지 않는 남자였다. 사랑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하는 모든 일을 신뢰하지 않았다. 충성심, 이타심, 우정이나 의리. 하다못해 가족애조차.
그가 그렇게 된 데는 사실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카루스는 오랫동안 황제에게 충성했지만, 황제는 그를 믿어 주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자들은 그가 이룬 모든 것을 저들의 것이라 착각하며 소유권을 주장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바이칸의 권력자들은 가엾은 자를 배려한답시고 더 가엾은 자들을 착취했으며, 철없던 시절 영원히 함께 싸우자 맹세했던 벗은 적의 편에 서서 그에게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카루스 란케아는 지독하게 엄격했던 부모 밑에서 자랐고, 18살이 되던 해 정복자였던 황제의 눈에 들어 그의 수족이 되었다. 그리고 내내 전쟁터를 전전하며 살았다.
그에게 사랑이란,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갈구하는 자들이 꾸며 낸 환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면에서 카루스는 율리아와 무척 닮은 사람이었다.
“블라이스 백작이 율리아 시녀님께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꽃과 과일을 보내다가 영 반응이 신통치 않았는지, 최근엔 무척 값비싼 것들을 선물한다고.”
맥스웰이 책망하듯 말하고 있었다.
드추바 주둔지에는 안 간다고, 배 타는 건 질색이라며 절대 안 간다고 할 때는 언제고, 맥스웰은 왕궁을 나서자마자 쾌속선을 타고 섬으로 왔다.
“그래서 어쩌라고.”
카루스는 망루 위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의 눈이 한창 건설 중인 주둔지를 샅샅이 훑었다.
남부 함대의 드추바 주둔지는 오르테가 동부에 있는 기지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배타적이고 비협조적이던 토착민들도 카루스의 남부 함대가 무시무시한 해적을 토끼몰이하듯 물리치는 모습을 보곤 납작 엎드려서 주둔지 건설에 힘을 보탰다.
카루스가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한 지도 꽤 많은 날이 지났다. 아직 답변은 받지 못했으나, 그는 황제가 이 일을 무척 기꺼워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 얘기 듣고 계십니까?”
맥스웰이 다시 물었다. 카루스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손가락으로 주둔지 한 곳을 가리켰다.
“사령관저가 너무 커. 누가 설계한 거지?”
“누구겠습니까. 사령관은 자고로 큰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우기는 놈이겠죠.”
“바바슬로프, 너냐?”
카루스가 뒤쪽에서 망원경을 가지고 바다를 살피던 바바슬로프에게 물었다. 그러자 맥스웰이 바바슬로프가 대답하기도 전에 끼어들어 말했다.
“제 전 재산을 걸고 저놈이 그랬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카루스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사치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으나, 사령관저가 커서 나쁠 것 없다고도 생각했다.
저 큰 사령관저를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지하를 파서 아무도 모르게 감옥을 만들어 놓고 미운 놈들을 하나씩 잡아다가 가둬두면 좋으려나. 여긴 섬이니까 달아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카루스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맥스웰이 그의 곁을 맴돌며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가 뭔지는 아십니까? 예? 그게요. 데네브라 황비의 서른 번째 생일에 황제가 선물한 귀물이란 말입니다.”
바바슬로프가 궁금했던지 은근슬쩍 물었다.
“비싼 거야?”
“말이라고 하냐, 그걸?”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인마!”
“블라이스 백작이 황비에게 몸과 마음과 영혼을 모두 바치겠다면서 충성을 맹세한 날에 그 여자가 크게 기뻐하면서 그걸 그놈한테 선물로 줬는데! 그놈이 글쎄! 그걸…… 우리 율리아 시녀님한테 줬다잖아!”
“비싼 거라며, 팔아서 쓰면 되지.”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이야. 그 보석.”
“뭔 개소리야.”
“그런 의미의 보석이라고! 돌이킬 수 없는……!”
“……!”
바바슬로프가 맥스웰을 따라서 상욕을 내뱉었다.
맥스웰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요즘 블라이스 백작을 감시하면서 틈틈이 율리아를 돕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일은 보고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주둔지까지 날아온 참이었다.
“놈이 시녀님을 보는 눈빛이 영 께름칙하단 말입니다.”
“어떻게 께름칙한데?”
“처음엔 뱀이 여우를 보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는 뱀이 뱀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맥스웰이 잠시 말을 골랐다. 어떤 동물로 비유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그런 거였는데, 입술을 우물거리며 고민하던 그가 갑자기 손가락을 딱 튕겼다.
“뱀이 독수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독수리?”
“지렁이가 새를 보는 거죠. 온몸이 땅에 붙어 있으면서 기어 다니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새끼가, 날개를 쫙 펼치고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새를 본 거예요.”
맥스웰은 자신의 비유가 찰떡이라고 생각했는지 가슴을 부풀리며 바바슬로프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지금까지는 그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카루스도 그 말에는 조금 귀를 기울였다.
“새는 뱀을 먹지.”
“독수리가 먹죠.”
“천적을 바라보는 먹잇감의 눈빛이라는 거냐?”
카루스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맥스웰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블라이스 백작은 천적인 율리아에게 다이아몬드를 바치고 있는 거였다. 달아나야 정상인데.
“이상하잖아, 이 자식아. 변태냐?”
바바슬로프가 맥스웰의 등을 철썩철썩 때리면서 말하고는, 갑자기 멈칫거렸다.
“……그 새끼 변태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