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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148/319)

130화

“왕족으로서 의무는 지지 않으면서 권리만 누리려고 하는 자들! 순진한 백성 덕에 호의호식하며 살다 보니 자기들이 무능하고 쓸모없다는 것도 모르게 된 모양이지!”

코코는 샤트린의 분노를 이해했다. 레위시아도, 알렉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샤트린이 느끼고 있는 지독한 상실감을 이해하고 안타깝게 여겼다.

샤트린은 원로들이 저지른 잘못보다는 왕비에게 일어난 비극에 분노하는 것이었다. 그걸 막지 못했고, 해결할 수도 없는 현실에 좌절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

율리아는 생각했다.

왕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샤트린이 왕비의 부정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버지인 국왕에게 애첩이 있었으니, 어머니인 왕비에게도 남자가 있었다는 걸 이해해 줄까. 4왕자가 자신과는 다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된 뒤에도 그를 똑같이 대할 수 있을까.

그 비밀을 지키고자 왕비에게 살해당한 가엾은 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헤아릴까.

또 생각했다.

나는 이 비밀을 샤트린 공주에게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샤트린이 자신과 레위시아를 죽이려고 한다면, 공주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일을 낱낱이 밝혀 왕가에 수치를 안겨 줄 수 있을까.

‘모르겠어.’

율리아는 결론지을 수 없었다. 코코나 레위시아처럼 샤트린의 마음에 공감할 수는 없었으나, 그녀는 샤트린을 미워하지 않았다.

복수의 대상이 아닌 자에게까지 괴물이 될 필요가 있을까. 샤트린은 적이었으나, 복수의 대상은 아니었다.

한쪽으로는 그런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마지막인 것처럼 살겠다고 결심해 놓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물어뜯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싸움에서 감히 왕족을 상대로 측은함이라니.

‘내가 언제 적을 상대로 이런 감정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알 수 없었다.

율리아 아르테는 계획했던 것보다 이른 시기에 2왕자 레위시아의 수석 시녀가 되었으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까진 갖추지 못했다.

* * *

궁내부 대신이 국왕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왕궁에 일어난 모든 일에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확히는 왕비가 없는 왕궁에서 혼자 마조람을 방어할 수 없었기에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는 왕비의 결정을 존중했다. 일찍이 아내를 잃고 왕비와 두 번째 사랑에 빠져 마음을 다했으나, 끝까지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4왕자가 왕비와 함께 원로들의 별궁으로 들어갔기에, 아들을 위해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탓도 있었다.

국왕은 궁내부 대신의 잘못이 아니라며 그에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왕비가 무너진 지금 궁내부 수장의 자리까지 비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궁내부 대신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왕궁에서 이뤘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시골에 있는 영지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재차 말했다.

왕은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궁내부 대신까지 물러나자, 왕의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이 지워졌다. 가뜩이나 노쇠하여 시들어 가는 왕에게 지나치게 과중된 업무였다.

먹는 약의 양이 늘고, 지쳐 쓰러져 잠드는 날이 많았다. 식사를 양껏 하지 못해 술을 찾는 날이 늘었다.

왕에게는 후계자가 절실했다.

“국왕 전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부로 샤트린 공주 전하와 레위시아 왕자 전하는 매일 아침 본궁 집무실로 오셔서, 왕국의 일을 배우고 왕족으로서 의무를 이행하셔야 합니다.”

국왕의 결정에 반대하는 귀족은 없었다. 그들도 왕이 후계자를 결정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왕의 마음이 기우는 방향은 어디인가. 귀족들의 눈과 귀가 본궁에 집중되었다.

“걱정하지 마.”

본궁으로 가는 첫날, 레위시아는 이른 아침에 율리아와 마주 앉아 식사했다.

“전에는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녀도 이 나라에 미련이라는 게 생기지 않았는데.”

“전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신기하지. 이제 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까지 무게를 가지고 내 발목을 붙드는 기분이야. 참 이상하고 감동적이란 말이지. 나도 어쩔 수 없는 왕족이라 그런가? 어떻게 생각해?”

“제가 전하께 부담스러운 존재인가요?”

“그걸 왜 그렇게 해석해? 네가 내게 책임감을 가르쳤다는 말이잖아.”

“저는 또 전하께서 저를 짐처럼 여긴다는 줄 알고…….”

“율리아.”

“코코한테 고자질하려고 했더니.”

“하!”

레위시아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포크로 율리아를 가리키며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

“그러고 보니 넌 처음부터 그랬지. 이상한 데서 코코를 닮았단 말이야. 내가 아무리 짓궂게 굴어도 당황한 적이 없어. 솔직하게 말해 봐. 율리아 아르테, 너 날 없애려고 왕궁에 들어온 거지?”

“네. 어떻게 아셨는지.”

“인정하지 마. 더 기분 나빠.”

“기분이 왜 나빠요?”

“장난친 사람이 무안해지잖아.”

레위시아가 억지를 부리면서 식사를 마쳤다. 율리아는 그의 긴장을 풀어 주려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율리아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굳어 있던 레위시아의 얼굴도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전하는 잘하실 거예요.”

“부왕께서 나한테 뭘 시킬지도 모르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믿으니까요.”

믿는다고, 날? 레위시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식사를 마친 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레위시아의 등 뒤로 갔다. 그녀는 어느새 길쭉한 빗을 손에 들고 있었다.

뒤에서 들리는 율리아의 목소리가 음악처럼 내려앉았다.

“윗사람과 함께 책상에 앉아 일할 때는 머리를 단정히 해야 하는 법이에요, 전하.”

그렇게 말하면서, 율리아가 레위시아의 긴 머리카락을 단단히 묶어 주었다.

율리아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 모을 때마다 레위시아의 속눈썹이 움찔움찔 떨렸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고 앉아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고집스럽게 정면만 바라보았다.

유리에 비친 율리아와 자신의 모습이라도 봐 버리면 해서는 안 되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녀오세요.”

율리아가 할 일을 마치고 물러섰다.

레위시아는 묘하게 아쉬운 기분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의자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건방져.”

율리아가 웃었다.

“아무렴요. 저 이제 수석인데요.”

믿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좋아한다는 말이 함께 흘러나올까 두려워서 하지 못했다. 그 산호색 허리띠도 너무 예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사랑한다는 말이 섞여 나올까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

반드시 왕의 자리에 올라 너를 지키겠노라 맹세하고 싶은데.

떠나 버릴 걸 알기에 할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사소하다. 레위시아가 가진 마음의 수조는 그 사소한 순간이 모여 이미 율리아로 가득 차 있었다. 천천히 조금씩, 때로는 아주 빠르게 그녀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가득 찬 수조는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한꺼번에 넘치고 만다.

그때는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율리아의 손길이 닿은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풀어놓고 향기를 느끼고 싶은데 아까워서 그러지도 못했다. 이 애달픈 마음을 인정하는 것조차 부아가 났다.

그의 수조가 위태로웠다. 왕자궁을 벗어나는 레위시아의 뒷모습 위로 짙은 물안개가 내려앉았다.

오후가 되자 여기저기서 선물이 도착했다. 알지 못하는 자들이 다수였고, 간혹 익숙한 이름이 들리기도 했다.

“힌치 백작님께서 용돈을 주셨는데요.”

율리아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다들 커다란 상자에 커다란 선물을 넣어서 생색을 내려고 애쓰는데, 힌치 백작은 작은 종이봉투에 수표 한 장만 달랑 보냈다.

“액수가 너무 커요.”

“원래 용돈을 10년에 한 번 주시는 분이야.”

코코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힌치 백작은 요즘 율리아에게 관심이 아주 많았다. 코코가 해 준 얘기만으로도 놀라운데, 혼자서 무슨 수를 썼는지 왕비를 움직여 수석 시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아빠가 네 얘기만 나오면 불만을 멈추지 않아. 도대체 왜 너 같은 애가 왕궁에 들어간 거냐며, 상인연합으로 데려오라고 난리야. 나한테 사람 쓸 줄을 모른다면서 역정을 낸다고.”

“힌치 가문으로 오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내가 아들이었으면 강제로 너랑 결혼시켰을 것 같다.”

코코가 그렇게 말하면서 끔찍하다는 얼굴을 했다. 율리아도 그녀를 보면서 똑같은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렉사는?”

“기사단에 갔어요. 정식 기사는 수행해야 하는 기본 임무가 있대요.”

“귀찮게 됐네.”

“기사단장을 이기면 임무에서 배제해 주지 않을까요, 라고 중얼거리면서 나갔는데…… 별일 없겠죠.”

“난 가끔 걔가 카루스 란케아보다 강한 게 아닐까 생각해.”

코코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건 율리아도 오래 고민해야 할 만큼 어려운 문제였다. 검술이나 전투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로서는 카루스와 알렉사가 싸우는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질 않았다.

코코가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더니, 하녀들에게 마차를 대기시키라고 말했다.

“증축 공사 때문에 만날 사람이 많아. 왕궁 밖에 다녀올 테니 넌 좀 쉬고 있어.”

“저는 왜 쉬어야 하는데요?”

“그냥 좀 쉬어. 왜 그렇게 말이 많니? 시녀장 명령이야.”

하여간 말을 해도 참. 율리아가 피식 웃으며 코코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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