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2화 (147/319)

25. 어떤 순간

오르테가 왕궁에 낯선 바람이 불었다. 불길하고 선득한 바람이었다. 가을의 시작과 함께 찾아든 몇 개의 비극이 왕궁 전체를 이끌고 겨울의 문턱으로 방향을 틀었다.

왕비의 병증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왕비궁 시녀들이 사력을 다해 막았지만, 왕궁 어디에나 있는 눈과 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누구냐, 너희는 다 누구냔 말이야. 내 아들은 어디에 있어? 제발…… 아이를, 내 아이를 데려와!”

왕비가 사람을 못 알아보더니 과거에 살기 시작했다. 그녀는 1왕자가 아직 살아 있다고 믿었다. 왕비궁에선 매일 유리창이 깨졌고, 시녀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무관심했던 국왕도 왕비의 병증이 깊어지자 큰 시름에 빠졌다. 사랑하지는 않았어도, 그들은 부부였고 동료였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상대도 서로가 유일했다.

왕은 매일 다른 의사를 보내 왕비를 진찰하게 했으나, 그들 모두 그녀의 마음에 병이 깊어 감히 헤아릴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시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왕비궁 밖으로 뛰쳐나간 왕비가 4왕자를 찾아갔다.

“왕자! 어미가 왔단다.”

“어머니!”

4왕자는 해맑게 웃었다. 왕비의 품에 안겨서 오늘 뭘 배웠는지, 뭘 먹었는지 조잘조잘 떠들었다.

한데 왕비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녀는 4왕자를 안고 1왕자의 이름을 불렀다.

“어머니……?”

어린 4왕자도 왕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울먹거리며 유모를 찾았다. 유모는 왕비가 4왕자를 1왕자라고 착각하며 헛소리를 내뱉는다 여기고, 국왕께 이 사실을 알렸다.

왕은 크게 괴로워했다.

“왕비!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서 당신 궁으로 돌아가세요.”

국왕이 의사를 불렀다. 하지만 왕비는 4왕자를 놓아주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거예요! 당신들은 누구죠? 왜 내 아이를 데려가는 거예요? 제발, 아아아아악!”

“이럴 수가……. 안 되겠다. 이건 아니야.”

왕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왕비는 궁내 권력의 조율자였다. 왕비가 없으면 왕궁을 다스릴 사람이 없었다.

오르테가는 가뜩이나 왕권이 약한 국가였다. 왕비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된다면 어찌 될 것인가.

머릿속이 아찔했다. 국왕이 엄격한 얼굴로 왕비궁의 시녀장과 4왕자궁의 시녀들에게 말했다.

“왕비궁을 폐쇄하고 왕비를 4왕자와 함께 원로들에게 보내라.”

“예? 하면…….”

“왕비의 치료와 4왕자의 교육을 원로들께 맡기는 수밖에 없겠구나. 왕비의 상태를 내보일 수도 없고, 왕비에게서 4왕자를 떼어 놓을 수도 없으니.”

방법이 없었다.

“입단속에 신경 써라. 왕비의 병환을 백성들이 알아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전하.”

왕비궁의 시녀장이 울먹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날 왕비궁이 조용히 폐쇄되었다. 왕궁은 우울한 분위기 속에 잠겨 들었다. 왕비의 병을 의심하던 마조람 후작 부인도 이쯤 되자 어쩔 수가 없었다.

모두가 왕비를 동정했다. 얼마나 슬펐으면,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 마음을 감히 미루어 짐작할 수도 없었다. 1왕자의 죽음으로 시작된 비극이 왕비까지 앗아 가고 말았다.

왕비가 4왕자를 지키기 위해 미친 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비밀에 부쳐졌다.

물안개가 꼈다. 율리아는 축축하게 느껴지는 치맛자락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 보았다. 밤이 되자 얇은 옷만으로는 약간의 추위마저 느껴졌다.

율리아는 왕궁 안에서 저 혼자 고요한 섬처럼 떠 있었다.

수석 시녀가 된 그녀에게 수많은 편지가 쏟아졌다. 대부분은 축하 인사였고, 일부는 비난의 화살이었다. 평민인 너 따위가 수석 시녀가 되다니 왕실의 수치라며 폄훼하는 익명의 편지도 몇 개나 있었다.

율리아는 그 편지를 모두 읽었다.

코코가 ‘그딴 건 그냥 보낸 사람만 확인하고 다 버려.’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율리아는 자신을 향한 비난의 말을 수집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편지를 일일이 펼쳐 보았다.

그러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세상엔 재밌는 사람이 많아요.”

“뭐?”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이렇게 정성스레 편지까지 보내 가면서 남을 헐뜯는 걸까요.”

“인간이 다 그렇지.”

코코가 성큼성큼 걸어와 율리아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챘다. 그러곤 작게 불붙은 벽난로 안에 던져 넣었다.

“가을 되니까 불 피워서 좋네. 가뜩이나 태울 것도 많은데.”

“코코, 원로들의 불만이 많아요. 제 임명식 말이에요. 왕비가 제정신이 아닐 때 저지른 짓이기 때문에 없었던 일로 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나 봐요.”

율리아는 이게 꼭 남의 일인 것처럼 말했다.

그녀는 사실 수석 시녀가 되거나 말거나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냥 2왕자궁을 주시하는 귀족들의 시선이 조금 더 많아지고, 전보다 사람을 부리기 편해졌다는 이점이 있을 뿐이라 여겼다.

그래서 원로들이 임명식을 무효로 돌린다고 해도 딱히 화가 나진 않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불같이 화를 내며 원로들을 욕할 줄 알았던 코코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샤트린 공주는 평범한 딸이야. 원로들은 그걸 간과하고 있어.”

“네?”

“누가 내 어머니의 허물을 들추려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자식이 어디 있어. 날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내 어머니를 건드리는 건 전혀 다른 얘기잖아. 열 배, 스무 배로 화가 날걸.”

샤트린은 가뜩이나 오르테가 왕궁에서 유명한 성질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코코는 왕비를 싫어했지만, 샤트린 같은 딸이 있으면 든든할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왕비 전하는 잘하겠죠?”

“당연하지. 4왕자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천하의 명의가 온다고 해도 왕비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을걸.”

율리아에게 온 편지를 빼앗아 하나하나 확인하던 코코가 쯧 혀를 차더니 그걸 한꺼번에 들고 벽난로에 쏟아부었다. 그 바람에 재가 날리며 불씨가 줄어들었지만, 이내 편지 더미를 태우며 다시 활활 타올랐다.

코코의 말대로였다.

원로들의 눈에 비친 왕비는 쉽게 치료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못 알아보면서 4왕자를 1왕자라 부르고, 지금이 몇 년인지 자신이 몇 살인지도 몰랐다.

원로들은 국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왕비를 원로들의 은밀한 별궁에 모셔 놓고 치료하면서 4왕자의 교육도 대신 맡아 주기로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몇몇 원로들이 왕비의 임명식에 딴죽을 걸었다.

왕비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치른 임명식이었기에, 율리아 아르테는 2왕자궁의 수석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치졸하고 끈질긴 자들이었다. 율리아는 원로들의 항의를 무시했다. 코코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왕비가 미쳤다는 걸 공식화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불만은 아무 힘이 없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샤트린 공주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어머니가 미쳤다니, 누가 그딴 소리를 해? 원로들이냐?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누가 그랬냐고 묻잖아!”

“전하, 제발 진정하세요.”

“내 어머니다. 이 나라의 왕비 전하시다! 잠시 슬픔에 빠져 길을 잃고 계실 뿐이야. 그런 분을 뭐라고? 미친 왕비라고? 고작 평민 시녀 하나 쳐내지 못해서 그걸 공론화하려고 해? 늙은이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샤트린의 분노가 거셌다. 그녀는 왕비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딸이었고, 그보다 더 어머니를 사랑했다. 아버지 국왕에게는 애첩이 있었기에, 샤트린의 마음은 언제나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기울어 있었다.

“별궁을 통째로 불태워 버리기 전에 그 입 다무는 것이 좋을 거라고 전해. 감히 내 어머니를 뭐라고? 아픈 사람을 안타까워하고 제대로 보살피지는 못할망정, 왕가의 어른이라는 자들이 앞뒤 없이 무슨 해괴한 심술이냔 말이야!”

“전하, 그만 화를 푸세요.”

“내가 왕이 되면 가장 먼저 저놈의 원로들부터 왕궁에서 내쫓겠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쫓아낸 뒤에, 맨몸으로 살게 하겠다고!”

원로들은 샤트린의 불같은 분노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그녀가 다음 대의 왕이 될 경우를 생각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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