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전하, 미친 척을 하세요. 저들은 감히 전하의 허물을 들춰 드러내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를 배척하지도, 끌어안지도 못한 채 길을 잃고 헤맬 것입니다. 국왕 전하도, 원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친 왕비는 왕가의 수치이자 약점이니, 감추어 보호하려고 할 거예요.”
왕비는 율리아의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냈다. 미친 여자가 되라니. 너 따위가 감히 내게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며, 율리아에게 찻잔을 집어 던지고 악을 썼다.
“나는 오르테가의 왕비다! 천한 계집이 머리 좀 굴릴 줄 안다고 떠받들어져 지내다 보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죽고 싶은 게냐!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려!”
“마조람 후작 부인을 배신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에요.”
“율리아 아르테!”
“가엾고, 불쌍한 왕비님. 평생 남편에게 제대로 된 아내 대접 한 번 받아 보지 못하고, 집착하듯 매달렸던 첫 아이마저 잃고 말았어요. 미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요?”
“네 정녕 죽고 싶은 게냐?”
“제가 죽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이미 아시잖아요. 그동안 충분히 죽였는데도 막지 못한 비밀이었어요. 4왕자의 비밀을 감추려 왕비 전하의 손에 죽어간 시비들의 원한이 들리지 않으세요?”
“하, 그래서 네가 그것들을 대신해서 내게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율리아 아르테는 웃었다. 불같이 화를 내며 너를 죽이겠노라 선언하는 왕비를 앞에 두고,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왕궁 안에서 마조람 후작 부인이 휘두르는 권력의 절반은 왕비 전하에게서 나와요. 그걸 빼앗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요.”
“뭐? 고작…… 그 이유라고?”
“제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어요.”
“내가…… 미친 왕비가 되면, 우리 아이들은…… 샤트린은.”
“왕비 전하께서 마조람을 상대로 두 분을 지킬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싸우는 건 제가 할 테니, 칩거하세요. 숨죽여 숨으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척하세요.”
“아아…….”
“바보가 되세요.”
왕비는 율리아가 마조람 후작가를 상대로 이 싸움에서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패배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율리아 아르테.”
“네, 왕비 전하.”
“네가 만약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4왕자를 어떻게 할 셈이냐.”
“레위시아 전하께 맡기겠습니다.”
율리아는 거짓으로라도 4왕자를 보호하겠다거나, 비밀을 지켜 주고 왕족으로 살게 하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녀로서 해야 할 마땅한 말을 했다.
레위시아에게 결정을 맡기겠다는 말이었다.
‘여우 같은 것.’
왕비의 입가에 또 한 번 위태로운 웃음기가 머물렀다. 덫에 걸리고, 그물에 잡히고, 재갈까지 물린 죄인의 기분이었다.
자신의 목숨 하나만 걸린 일이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샤트린의 긍지와 4왕자의 목숨까지 담보가 되었다.
“레위시아.”
왕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리를 피하려던 레위시아가 멈칫하더니 몸을 돌려 왕비를 바라보았다.
“부르셨습니까?”
“그동안 네게…… 못 할 짓을 했어. 미안하다.”
사과하는 왕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진심이 아니라는 건 레위시아도, 왕비도 알고 있었다.
애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갖 치졸한 수를 써서 핍박했다. 왕궁 안에서 누구도 그를 보살피지 못하게 압박하기도 했다. 유모를 계속 바꾸고, 교육에도 차등을 두었다. 누군가 레위시아에게 관심을 보이면 권력으로 막았다.
레위시아를 무시하지 않으면 왕비의 미움을 산다. 오르테가 왕궁에선 그게 진리였다.
그때 그는 너무 어렸는데. 기댈 데 없이 외로운 어린아이였는데.
레위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왕비의 사과를 받아 주지도 않았다. 궁지에 몰려 억지로 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이번에도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왕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시였다.
“하…… 하하.”
왕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안절부절못하며 왕비를 지키던 시녀들이 재빨리 달려와 몸으로 그녀를 감추었다.
율리아는 샤트린과 대화하고 있었다.
“날 그렇게 매정하게 차 버리더니 결국 레위시아의 수석 시녀가 되었구나. 도대체 내 어머니는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샤트린 공주님.”
“난 네가 언제든 내 궁으로 오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제 그 가능성마저 사라져 버렸네. 수석 시녀쯤 되면 절대 두 명의 왕족을 섬길 수는 없으니까.”
“공주님은 제가 없어도 이미 훌륭한 왕족이세요.”
“네가 있었으면 더 훌륭한 왕이 되었겠지.”
샤트린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율리아는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왕비와 대화를 마친 레위시아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읽히지 않았다.
레위시아는 두 사람 사이에 부드럽게 파고 들어와, 율리아의 손을 잡고 자신의 팔에 얹었다.
“내 시녀한테 추파 좀 그만 던지시지.”
“추파라니. 기분 나빠지려고 하네.”
“추파가 아니면 이게 뭐야. 집적거리는 거냐?”
“레위시아. 네가 우아하지 못한 녀석이라는 건 잘 알겠는데, 나까지 너 같은 시정잡배일 거라 여기지 마.”
“와, 지금 나한테 말로 시비 거는 거야? 너 우리 코코 맛 좀 볼래?”
레위시아가 코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코코가 의아함을 느끼고 이쪽을 돌아보자, 샤트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러곤 율리아와 레위시아를 차례로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왕이 되면 두 사람은 살아남지 못할 거야.”
“…….”
“후회하고 싶지 않거든.”
샤트린의 말은 진심이었다. 물이 차오르듯, 두 왕족 사이에 밀도 높은 긴장감이 차올랐다. 율리아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샤트린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수석 시녀가 된 걸 축하해, 율리아.”
“고맙습니다.”
샤트린이 인사는 됐다며 손사래를 치더니 자신의 시녀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한때 1왕자가 그랬듯 자신의 세력을 무리로 거느리고 다녔다.
율리아는 그들 하나하나를 눈에 담듯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 * *
이틀이 지났다. 율리아 아르테가 레위시아 2왕자의 수석 시녀가 되었다는 소문이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평민을 그 높은 자리에 앉힌 것도 놀라운데, 왕비가 레위시아 2왕자를 자식으로 인정하며 추켜세웠다는 게 더 놀라웠다. 그날 주최자가 왕비의 거죽을 뒤집어쓴 유령이 아니었냐는 말까지 나왔다. 왕비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분노한 원로들이 왕비궁에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왕비는 다시 자신의 궁에 틀어박힌 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마조람 후작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왕비궁으로 달려왔다.
“왕비 전하께선 어디 계십니까!”
“아, 안 됩니다. 후작 부인…… 다음에, 다음에 오세요.”
“왜 이러십니까? 제가 못 올 곳엘 왔어요? 왕비 전하께 말씀드리세요. 꼭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부인. 지금은 제발.”
“비키세요!”
마조람 후작 부인은 만류하는 시녀장을 밀치고 왕비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우뚝 선 채 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왕비가 머리카락을 산발하고 있었다. 며칠 새 갑자기 늙어 버린 사람처럼,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선 1왕자의 어릴 적 모습을 그려 놓은 초상화 앞에 앉아 자그마한 아기 장난감을 늘어놓고 자장가를 불렀다.
“왕자, 어미를 지켜 줄 거죠? 이 어미가 뭐든지 다 해 줄 거예요. 그러니까 꼭 왕이 되세요. 이 외로운 왕궁 안에서 어미가 믿고 기댈 사람은 오직 왕자뿐이에요.”
“왕비!”
후작 부인이 커다랗게 고함을 쳤다. 깜짝 놀란 왕비가 고개를 돌려 부인을 바라보았다.
“왕비, 정신 차리세요! 지금 뭐 하고 계신 겁니까!”
후작 부인은 왕비가 정신을 놓았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득달같이 달려 들어가, 왕비의 손목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지금 뭐 하고 계시냐고 묻잖아요. 왕비 전하! 당신은 이 나라의…….”
한데 왕비의 손목에 두툼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시녀장이 작게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후작 부인에게서 왕비의 손목을 빼냈다. 그러곤 왕비를 품에 안고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로 애원했다.
“왕비 전하께서 어젯밤에 손목을 다치셨습니다. 지금 전하는 후작 부인과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제발 돌아가 주세요. 제발요!”
붕대에서 붉은 핏물이 배어 나왔다. 왕비는 아프다면서 손목을 감싸 쥐더니, 이내 몸부림치며 주위 물건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왕비의 울음 섞인 비명이 왕비궁을 가득 채웠다.
“뭣들 하느냐! 날카로운 건 다 치우라고 했잖아. 어서 의사를 모셔 와라!”
왕비의 측근 시녀들이 눈물을 흘리며 방으로 들어와 초상화와 장난감을 치웠다. 시녀장은 왕비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온몸으로 그녀를 안고 달랬다.
마조람 후작 부인은 발작하는 왕비를 등지고 왕자궁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왕비는 미친 척을 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로 정신을 놓아 버린 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1왕자가 죽은 뒤 왕비의 행동을 떠올려 보니 아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면 왕비는 왜 2왕자에게 그런 선물을 주었단 말인가. 그 평민 계집이 수석 시녀라니. 코델리아 힌치까지는 그럴 만하다고 여겼건만, 율리아 아르테라니.
그 순간 후작 부인의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이 모든 일의 배후가 율리아 아르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