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44/319)

127화

* * *

왕비궁의 문이 열렸다.

가을의 시작과 함께 왕비가 오랜 칩거를 깨고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의 행사는 왕비가 직접 주관한 왕가의 임명식이었다.

“누가 임명된다는 거야? 들은 거 있어?”

“왕비궁이나 공주궁이겠지. 한데 빈자리가 있었나?”

귀족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비궁에서 치러지는 임명식은 왕실 안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관리들에게 왕비가 해 주는 명예로운 행사였다. 그러니 제법 높은 자리의 관리가 아닌 다음에야 슬픔에 빠져 있던 왕비가 몸을 일으킬 리 없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왕비궁의 시녀장이 연회장 입구에 서서 찾아오는 귀족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시녀장, 오랜만입니다.”

귀족들은 왕비의 시녀장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시녀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우아한 태도로 귀족들과 일일이 인사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방문에 감사를 표했다.

연회장을 가득 메운 건 왕비와 가깝거나, 샤트린 공주와 가깝거나, 마조람 후작의 세력으로 분류되는 친제국파 귀족 중 일부였다. 비교적 작은 행사인 만큼 마조람 후작이나 궁내부 대신, 힌치 백작 같은 거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귀족들이 대부분 입장한 다음에는 샤트린 공주과 공주궁의 시녀들이 나타났다.

샤트린은 왕비의 시녀장을 다정하게 포옹한 뒤, 귓속말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곤 연회장 안으로 들어와 오만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족들은 샤트린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녀는 다음 대의 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많은 왕족이었으니까.

하지만 샤트린은 아무나하고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1왕자는 아부하는 자들을 무척 좋아해서 접근하기가 쉬웠는데, 샤트린은 아무 힘도 없으면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기만 하는 박쥐 떼를 쉽게 받아 주지 않았다.

샤트린 다음에는 왕가의 원로들이 등장했다.

“세상에, 원로들이에요!”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별궁에서 잘 움직이지 않는 원로들까지 온 걸 보니, 이번 행사가 생각보다 의미가 큰 자리였던 모양이다.

“시녀장, 오랜만에 보는군.”

“건강해 보이셔서 참 안심입니다.”

“자네가 워낙 잘 챙기지 않는가.”

근처에 있던 귀족들은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귀를 쫑긋거렸다. 하지만 그 원로들조차 왕비가 무슨 일로 연회장의 문을 열었는지는 몰랐다.

“왕비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왕비는 그때 나타났다.

몇 달 새 수척해진 왕비가 묵직한 드레스를 몸에 걸치고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연회장에 등장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원로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샤트린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아직 몸이 좋지 않아 부득이하게 의자에 앉아 행사를 진행하겠다며, 미리 준비된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왕비가 아주 차분하고 우아하게 말했다.

“오늘 이 자리는 레위시아 오르테가 2왕자의 수석 시녀를 임명하는 자리입니다.”

연회장이 잠시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왕비를 바라보았다. 레위시아 2왕자라니. 원수와도 같은 자의 시녀를 임명하려 왕비가 움직이다니?

“긴 시간 왕가의 무관심 속에서도 훌륭하게 자라 준 레위시아 왕자의 주변에 이토록 훌륭한 벗이 있어, 어미로서 뿌듯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갈수록 의문이 더해졌다. 누군가는 저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왕비가 한 말을 똑같이 말해 보기도 했다.

뭔가 이상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잘못되었다. 귀족들도, 원로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왕비가 저 자신을 레위시아 2왕자의 어미라고 부른 것부터, 왕가가 그에게 무관심했음을 시인한 것까지.

“오랫동안 왕실을 지배해 왔던 관습에 도전장을 내민 젊은이들의 재기에 경의를 표하고자, 이 사람은 오늘 이 자리가 특별히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왕비 전하…….”

“레위시아 오르테가와 그의 시녀장 코델리아 힌치, 그리고 율리아 아르테와 알렉사 콴.”

네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왕비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끝까지 차분하고 우아한 태도를 유지하며 손짓했다.

레위시아 2왕자가 왕비의 부름을 받아 등장하고 있었다.

샤트린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혔지만, 한편으로는 감탄하는 얼굴이었다.

레위시아는 세 명의 시녀를 대동하고 있었다. 그는 왕비에게 다가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왕비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코델리아 힌치도 마찬가지였다. 왕비에게 다가가 한 차례 인사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왕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녀장 코코를 향한 불만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얼마 전에 기사 시험에 합격한 알렉사에게는 왕비가 특별히 그녀의 가슴에 기사 훈장을 달아 주었다.

“율리아 아르테.”

샤트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율리아의 차례였다. 그녀는 그동안 고집해 왔던 수수한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르테가의 맑은 바다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천 위에 풍성하게 쏟아진 은빛 레이스, 출렁이는 긴 머리카락엔 진주로 장식된 머리핀이 빛나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허리엔 한 뼘 넓이의 산호색 띠가 매여져 있었다. 화사한 산호색에 은색 문양이 수놓인, 눈에 띄게 고운 띠였다.

그리고 그건 율리아 아르테가 2왕자궁의 수석 시녀임을 상징하는 장식이기도 했다.

“율리아 아르테는 평민의 신분으로 브레웨 훈장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명예를 드높였고, 그 능력을 높이 산 레위시아 2왕자의 측근 시녀가 된 바 있습니다.”

왕비의 목소리가 음악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율리아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율리아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왕비의 손을 잡았다.

귀족들은 경악한 얼굴이었다. 누군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

“오르테가의 왕비로서, 나는 이보다 더 적합한 자를 찾지는 못하리라 판단 내렸습니다.”

“전하!”

“이에, 율리아 아르테를 레위시아 오르테가의 수석 시녀로 임명합니다.”

침묵은 곧 웅성거림이 되었고, 웅성거림은 이내 수많은 의문과 불만으로 자리 잡았다.

원로들이 말도 안 된다며 언성을 높였다. 그들은 주름이 떨리도록 노한 얼굴로 왕비에게 다가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따져 물었다.

“왕비! 평민이 수석 시녀라니요. 다시 생각해 보세요. 수석 시녀는 왕족의 대변인입니다. 왕자의 수석 보좌란 말입니다! 그 높은 자리에 평민이라니, 위계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왕비는 요지부동이었다.

“오르테가 왕실 법도에 평민이 수석 시녀가 되면 안 된다는 조항이 어디 있습니까. 관습이 법인 양 착각하지 마세요. 원로들을 존경하지만, 왕비의 권위에 간섭하는 것까지 참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왕비!”

“율리아 아르테는 이제 2왕자의 수석 시녀입니다. 왕비의 자격으로 내린 임명장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원로들께서도 저 아이를 대함에 있어, 다른 궁의 시녀들과 차등을 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왕비는 왕비였다. 원로들은 더 항의하지 못했다. 궁내부 대신의 부탁을 들어줬을 때는 왕비도 그와 같은 뜻이리라 의심치 않았는데,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별궁에 갇혀 사는 그들은 그저 율리아가 잘 짜 놓은 거미줄의 한 가닥 씨실에 불과했으니까.

왕비가 율리아에게 말했다.

“율리아.”

“네, 왕비 전하.”

“레위시아 왕자를 보필하는 데 있어, 한 치의 게으름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너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고, 보다시피 그들은 네게 호의적이지 않으니.”

“명심하겠습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던 옛말이 떠오르는구나. 부디 오르테가 왕궁에 좋은 선례로 남아라.”

왕비가 율리아의 손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탐색하듯 느리게 맞물렸다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율리아는 고개를 숙였고, 왕비는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애첩을 닮아 아름답게 성장한 레위시아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왕비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왕비는 한숨과도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기가 막히고, 지독하게 한스러웠다. 이 자리가 끔찍하게 싫었으나 드러낼 수 없었다.

“레위시아.”

“네, 왕비 전하.”

“대단한 시녀를 들였구나.”

왕비는 율리아를 ‘좋은’ 시녀라거나, ‘훌륭한’ 시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게 긍정적인 의미인지, 부정적인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레위시아는 만족했다. 그가 왕비를 향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라.”

레위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비가 천천히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왕의 애첩을 꼭 닮은 얼굴. 어쩜 저렇게도 왕은 하나도 닮지 않고 그 어미만 닮아 태어났는지.

저 얼굴을 한 여자를 평생 미워했다. 그게 왕비의 자리에 앉는 대가였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왕의 관심을 바랐다. 욕심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원로들이 역정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귀족들은 1왕자가 죽은 이후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던 왕비를 의심하며, 그녀의 결정에 의문을 표했다. 어쩌면, 혹은, 만에 하나.

왕비는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왕비가 1왕자의 죽음으로 총기를 잃고 헤매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그동안 왕비가 보인 행동 때문이었다.

실없이 웃음이 흘렀다. 율리아는 자신을 마조람 후작 부인이 죽여야 했을 만큼 영리한 소녀였다고 말했다.

‘과연.’

저 맹랑한 시녀는 지금 왕비에게 쏟아지는 귀족들의 반응까지 유추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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