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 *
찾아올 줄 알았지.
“네가 그 건방진 평민 계집아이냐?”
율리아는 왕자궁 앞에 서 있는 새하얀 마차를 보며,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여섯 필의 말에 흰 마차라. 화려한 지붕엔 작은 새와 함께 노는 어린 천사가 양각되어 있었다.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안을 가득 채울 만큼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띠 장식을 과시하듯 두르고 있었다. 그러곤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창문만 열고 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왕비궁의 사람이었다.
“누구세요?”
“타렴.”
누군지는 알려 주지도 않고, 다짜고짜 문이 열렸다. 율리아는 이 마차에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거절할 방법은 많았다. 레위시아 왕자님이 왕비 전하께 벌을 받고 있으니 그분을 모시는 시녀로서 그 짐을 나누려 한다거나, 혹은 외부인과의 접촉을 자중하려 한다고 말하면 되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건방진 아이야, 너를 부르는 분은 이 왕궁 안에서 가장 존엄한 분이시다. 그러니 의심 말고 타렴.”
그냥 왕비가 부른다고 말하면 될 것을. 율리아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차에 올랐다.
율리아를 데리러 온 사람은 왕비궁의 시녀장이었다.
그녀는 왕비보다 다섯 살 위로, 왕비가 처음 왕궁에 들어왔을 때 원로들의 추천으로 시녀가 되어 4왕자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시녀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왕비와 가까우며, 가장 긴 시간 동안 왕비의 곁을 지킨 사람.
“몸가짐,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말은 순하게 하되, 대답을 얼버무리지는 않아야 하고. 어린 것이 벌써 어른을 시험할 생각에 머리 굴리느라 바쁜 모양인데, 그게 네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구나.”
“명심하겠습니다.”
율리아가 짧게 대답했다. 단정한 태도에 차분한 말투였다.
“시녀는 자고로 입이 무거워야 한다. 입이 무거운 자는 마음 또한 무겁기 마련이고, 그런 자들의 발걸음엔 언제나 품격이 있지.”
“충고 새겨듣겠습니다.”
율리아는 왕비궁의 시녀장을 굳이 도발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가 마조람의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적당히 모범생 흉내를 내며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왕비궁의 시녀장이 그런 율리아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오늘 너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 함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네가 누굴 만났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전부 비밀로 간직할 수 있겠어?”
“저는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시녀입니다.”
“왕자께는 다 말씀드리겠다는 말이냐?”
“제 안위보다는 그분께 해가 되는 일인지 아닌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왕비궁의 시녀장이 후, 하고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율리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티끌만큼의 호의가 깃들었다.
“시녀의 교본 같은 대답이구나.”
그 후론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마차는 곧장 왕비궁으로 향했고, 율리아는 오르테가 왕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왕비궁의 정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왕비는 온실에서 율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완벽한 차림새와 우아함을 무기로 삼던 그녀가, 헝클어진 머리에 가운만 걸친 모습이었다.
정성스레 가꿔 놓은 온실은 아름다웠으나, 그 안에 있는 왕비는 전쟁터 한가운데 버려진 아이처럼 불안해 보였다.
율리아는 왕비궁 시녀장의 안내로 온실 문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은 채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율리아 아르테입니다.”
왕비궁 시녀장이 율리아를 대신해서 말했다. 딴생각에 빠져 있던 왕비가 흠칫 놀라더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 율리아구나.”
율리아 아르테라는 이름은 이제 오르테가 왕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브레웨 훈장으로부터 시작된 마조람 후작가와의 악연, 그리고 레위시아 왕자의 측근이자 왕궁의 오래된 관습을 상대로 싸우는 평민.
왕비는 그 모든 뜻을 담아 ‘그 율리아’라는 말을 썼다.
“시녀장은 물러가 있어.”
“전하, 독대는…….”
“명령이야.”
왕비가 단호하게 온실 밖을 가리켰다. 시녀장은 더 머뭇거리지 않고 공손하게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율리아는 왕비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온실은 습한 편이었다. 물을 머금고 자라는 예쁜 식물들이 여기저기에서 모양새를 뽐냈다. 왕비는 축축한 옷자락을 질질 끌면서 온실 끝에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네가 알려 준 장소로 사람을 보냈더니 아주 급하게 달아난 흔적만 발견할 수 있었단다. 덕분에 내 궁에 마조람의 첩자가 있고, 그들이 내 병사보다 발이 빠르다는 것만 확인했지.”
율리아가 두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왕비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왕손이 살아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추측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후작 부인이라면 이 왕궁 안에 살아 있는 모든 왕족을 제거한 뒤에, 왕손을 직접 키워 꼭두각시로 삼는 방법도 고려했을 것 같아서요.”
“네가 그 집의 위치까지 알고 있다는 건, 너도 한때는 후작 부인과 한패였다는 말인데……. 율리아 아르테. 너는 도대체 누구에게 충성하는 거지?”
“꼭 누구에게 충성해야 하는 건가요?”
“뭐?”
왕비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왕궁 시녀가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는다는 건 그녀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율리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마조람의 적에게 충성합니다.”
“복수인가.”
“레위시아 전하께서 마조람을 원수처럼 여기시기에 충성합니다. 레위시아 전하께서 이 땅에 마조람의 씨가 마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셨기에, 그분께 충성해요.”
“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는 후작 부인에게 네가 하는 말을 전부 들려줄 수도 있어.”
“괜찮아요.”
율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왕비가 지금 율리아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후작 부인에게 고자질한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었다.
왕비가 다시 물었다.
“내게 아들의 연인과 왕손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너 대신 마조람을 상대로 싸워 주리라 기대한 거라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구나.”
“전하, 마조람 후작이 이제 누구를 지지할 거라고 믿으세요?”
“그야…….”
당연히 샤트린이라고 말하려던 왕비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손을 잡은 척하고 있을 뿐, 샤트린 공주는 결코 마조람 후작의 입맛대로 길들일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공주는 그러기엔 이미 너무 자랐고, 자의식이 강했다.
그들은 서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4왕자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출생 그 자체가 약점인 4왕자를 왕위에 올리는 위험한 짓을 그 능구렁이 같은 작자가 할 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율리아가 불쑥 물었다.
“왕비 전하의 적은 누구인가요?”
대답할 수 없었다. 왕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언뜻 눈앞에 있는 사람을 모두 찢어 죽이기라도 할 기세였으나, 그런 왕비의 눈동자는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율리아가 담담히 말했다.
“제가 어떤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가난한 보육원에서 지내던 한 소녀가 마조람 후작 부인의 눈에 띄어 학비를 지원받게 된 이야기였다.
후작 부인이 고아들을 지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영리한 아이는 잘 키워서 일꾼으로 쓴다. 아주 영리한 아이는 크게 키워서 인재로 쓴다. 너무 영리한 아이는 세뇌하거나 혈연으로 엮어 평생 노예로 만든다.
“그보다 더 영리한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율리아 아르테는 크리스틴 마조람의 명예를 위한 도구로 쓰였다.
“저는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어요.”
도구가 주인보다 똑똑하면 안 된다. 후작 부인은 냉정한 사람이었다. 크리스틴과 바실리는 율리아를 부리기에 모자란 자식이었다.
율리아가 성인이 되기 전에는 그래도 순진한 편이었기 때문에 돈과 힘, 아들의 사랑을 이용해서 그녀를 써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율리아는 마조람 후작가의 모든 방식에 의문을 품고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다.
“널 죽이려고 했구나.”
왕비가 중얼거렸다. 율리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실리와 크리스틴을 역으로 이용해 마조람 후작가를 집어삼킬 것 같아서, 죽여 없애기로 했어요.”
율리아 아르테는 바실리 마조람을 유혹한 파렴치한 평민 계집이어서 죽은 게 아니라, 후작 가문의 후계자들을 위협할 정도로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였기에 죽었다.
“그게 후작 부인의 방식이죠.”
“하면 말해 보아라. 율리아 아르테. 나는 이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거든. 네가 그 정도로 대단한 아이라면, 내게도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겠지?”
“그럼 왕비 전하께선 제게 무엇을 해 주시겠어요?”
왕궁 안에 대가 없는 친절이란 건 없다. 왕비 역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오만하게 들어 올린 왕비가 율리아에게 의자를 권했다.
“원하는 걸 말해 봐.”
“고맙습니다.”
율리아가 왕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왕비의 눈에 비친 율리아는 수수하지만 아름다운 아이였다. 단아한 매력도 있었다. 여러 사람의 시선을 모으진 못해도, 그녀에게 한 번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바실리는 너를 사랑했겠지. 어쩌면 레위시아도 그럴 테고. 한데 네가 원하는 건 달콤한 사랑이 아니라 피가 뚝뚝 흐르는 원수의 목이로구나.”
율리아가 말했다.
“전하, 저를 2왕자궁의 수석 시녀로 임명해 주세요.”
왕비가 날카롭게 웃었다. 율리아의 요구가 건방지면서도 당당하고, 또 한편으론 타당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해 주세요. 이왕이면 저를 감금하고 때렸던 원로들도 보는 앞에서요.”
“하!”
“궁내부와 왕비궁이 전폭적으로 2왕자궁을 지지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율리아, 약속 같은 것엔 아무런 힘이 없단다.”
“알아요. 저도 그래서 비슷한 방법을 알려 드리려고 해요.”
아무런 힘이 없지만, 그래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사람.
“전하, 아들을 잃어 미친 왕비가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