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왕비께서 수척해진 모습으로 궁내부에 나타나셨대요. 그러곤 궁내부 대신의 집무실로 쳐들어가서 언성을 높이면서 싸우셨다고 해요. 그 일로 궁내부가 어수선해요.”
“뭐라고 싸웠는지는 모르고?”
“알아올까요?”
“됐어. 안 들어도 뻔하지.”
율리아가 트루디에게 금화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환하게 웃으며 넙죽 받았을 트루디가 조금 머뭇거리면서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저…… 시녀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요.”
“괜찮으니까 말해.”
“저한테 돈을 너무 많이 주시는 것 같아서.”
트루디가 쭈뼛거리며 꺼낸 말에, 율리아가 웃음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너 돈 좋아하잖아.”
“좋아하긴 하는데요. 그래도…… 제가 하는 일은 별로 없는데 너무 많이 받는 것 같아서.”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주는 사람 마음이지. 그렇게 말한 율리아가 다시 금화를 내밀자, 트루디가 망설이면서도 두 손으로 그걸 받았다.
전에는 이게 웬 횡재냐는 얼굴로 잘만 낚아채더니, 금화를 가져가는 속도가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했다.
“트루디.”
“네, 네?”
“내가 너한테 금화를 이렇게 많이 주는 건 죄책감 때문이야.”
“죄책감이요?”
“그래, 어느 날 갑자기 네가 해 온 짓들이 모두 들켜서 잔인하게 죽임당할 수도 있잖아. 그럼 그건 내 탓이니까. 돈이라도 듬뿍 줘서 죄책감을 덜려는 거지.”
트루디가 순식간에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쳤다. 위험한 일이란 걸 모르고 덤비진 않았으나, 율리아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주는 퇴직금이라고 생각해.”
율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러곤 이제 됐다며 나가라는 의미의 손짓을 했다.
트루디는 돌아선 율리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율리아가 트루디에게 준 금화만 해도 상당한 양이었다. 빈민가에서 계속 살았으면 평생 벌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율리아는 그녀에게 필요 이상으로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는 몰랐다. 트루디에게 충성심 같은 건 없었다. 왕위니, 권력이니 그런 데는 관심도 없었다. 율리아가 좋다거나, 왕자궁에서 평생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율리아 시녀님.”
“왜?”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율리아가 주는 금화가 빚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금화가 쌓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제가 우연히 진짜 귀한 정보를 얻게 되면요. 그건 얼마나 쳐주실 거예요?”
율리아가 트루디를 돌아보았다.
정보의 경중에 따라 값어치를 달리할 것이다. 귀하면 귀할수록 많은 금화를 쥐여 줄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침대 밑에 있던 궤짝을 끌어낸 뒤, 열쇠로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금화를 보여 주었다.
“히익……!”
트루디가 깜짝 놀라서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궤짝 안엔 아직도 어마어마한 양의 금화가 잠들어 있었다. 그 눈부신 황금빛에 홀려 멍하니 서 있는 트루디에게, 율리아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걸 다 줄 수도 있어.”
지난 삶의 코코가 4왕자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때 그녀가 부리던 정보원의 눈썰미 덕분이었다. 만약 트루디가 그 정도로 귀한 정보를 주워 온다면, 정말 이걸 다 줄 수도 있었다.
트루디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 열심히 할게요.”
트루디에게 돈이란 삶의 진리이자 태양 빛, 꿈과 같은 것이었다. 철학이자 도덕이었으며, 정의이기도 했다.
빈민가 출신, 금화 하나에 사람 목숨을 사고팔기도 하는 밑바닥 낙오자들에게 돈은 저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았다. 온 하늘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데, 제 것은 하나도 없는. 그래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이상향.
“진짜 열심히 할게요.”
그런데 손에 닿았다. 움켜쥘 수 있었다. 트루디는 탐욕스러운 아이였다. 저 금화를 가질 수만 있다면, 신조차 배신할 수 있었다.
“그래, 기대할게.”
율리아는 그 모든 걸 간파했기에 트루디를 받아들였다.
* * *
왕비와 궁내부 대신의 의견 충돌이 거세졌다. 사실 그들로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궁내부 대신은 코코 시녀장에게 협박을 당했고, 왕비는 마조람 후작 부인에게 협박을 당했다.
그것도 같은 이유로.
“궁내부 대신이라는 사람이 고작 그 젊은 시녀장 하나 구워삶지 못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요?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후작 부인이 시키는 대로, 우리 일을 아는 사람을 다 죽여서 입을 막았다고요!”
“다 죽였다고? 하나도 남김없이? 확신하십니까?”
궁내부 대신은 왕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코델리아 힌치가 알고 있다는 건 힌치 백작과 레위시아 왕자도 알고 있다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었고, 그건 누군가 그들에게 비밀을 누설했다는 증거였다.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왕비, 마조람 후작가와 인연을 끊으세요. 그들은 이제 당신의 벗이 아닙니다. 적이에요. 적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식으로 사람을 겁박합니까!”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요! 4왕자는…… 우리 아이는.”
왕비가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후작 부인의 말을 들어야죠! 첩의 아들이 아니라! 당장 2왕자궁에 배정된 예산을 전액 취소하고, 그 녀석을 이 왕궁에서 내쫓아요! 마조람이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에요!”
“마조람은 이 일을 소문내지 않을 거요! 그들은 그냥 당신의 약한 점을 이용할 뿐이라니까? 소문을 내려면 코델리아 힌치가 내겠지! 마조람은 이미 우리와 한배를 탄 사이니까!”
“당신은 몰라.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왕비가 무너졌다. 궁내부 대신이 비틀거리는 그녀를 재빨리 품에 안았다. 왕비는 그의 품에 안긴 채 하염없이 울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 국왕이 아무리 미워도 당신이 날 사랑하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권력만 탐하면 되었을 것을, 사랑까지 탐내서 일이 이렇게 되었다. 왕비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율리아는 그들이 충분히 구석에 몰릴 때까지 기다렸다.
두려움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이 머리를 지배하기를. 그리하여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모르게 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왕자궁은 고요했다. 코코가 외출이 금지된 레위시아를 대신해서 반제국파를 만나고 다니는 동안, 알렉사는 왕자궁의 호위 기사와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율리아는 이제 그녀보다 더 빨리 일어나는 레위시아에게 마지막으로 제왕학을 가르쳤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모두가 이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갑작스레 4왕자궁에 대대적인 물갈이가 진행되어 이유도 없이 해고당한 고용인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왕비가 무리수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때가 되었군.’
율리아의 입가에 스치듯 짧은 미소가 머물렀다.
그날 밤 왕비궁의 시녀장은 왕비에게 도착한 편지와 초대장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죽은 1왕자의 명복을 빈다는 내용이었고, 일부는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연회를 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시녀장은 그 편지를 모두 한쪽으로 치웠다. 왕비는 지금 이런 걸 일일이 읽어 줄 만큼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런데 그중 하나,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낯선 편지가 있었다.
“율리아 아르테?”
2왕자궁의 평민 시녀가 왕비에게 편지라니. 시녀장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어이없을 정도로 맹랑한 아이였다. 편지를 꺼내는 그녀의 손이 빨라졌다.
[왕비 전하, 마조람 후작 부인에겐 감추고 싶은 사람을 가둬 두는 은밀한 집이 있어요.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곳에 왕비 전하께서 원하는 답이 있을 거예요.]
시녀장은 고민 없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후작 부인이 방문했을 당시 왕비가 울부짖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이 편지를 반드시 왕비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전하!”
“혼자 있고 싶어. 나가.”
“이걸 읽어 주세요, 율리아 아르테의 전갈입니다.”
왕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편지를 낚아챘다. 그러곤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보고 또 한 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무슨…….”
이건 함정일 수도 있었다. 왕비를 미워하는 레위시아 2왕자의 덫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확인해야 했다. 더는 달아날 곳도 없을 만큼 구석에 몰려 있었으니까.
“시녀장이 직접 확인하고 와.”
자정에 가까운 시각, 왕비궁에서 수십에 이르는 병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들을 이끄는 건 왕실 기사 네 명과 왕비궁의 시녀장이었다.
율리아가 알려 준 주소는 오르테가 남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바다와 거리가 멀어 사람이 그리 많이 살지 않고, 그만큼 폐쇄적이어서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 조용한 마을에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집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병사들은 마을 외곽에 있는 오래된 2층 집의 문을 부숴 버린 뒤,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장님, 누군가 출산을 준비한 흔적이 있습니다!”
“뭐라고요?”
시녀장이 망토를 끌어 내리며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병사들이 말한 대로였다. 각종 아기용품과 임산부의 흔적,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찻잔의 온기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급하게 달아난 것으로 보입니다. 병사들을 풀어 주변을 수색하겠습니다.”
“이 마을에 산파가 있을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내 앞으로 끌고 오세요!”
“예, 시녀장님.”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어디로 달아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산파는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 오들오들 떠는 산파에게, 시녀장이 물었다.
“아기를 가진 여자가 누구더냐.”
“젊은…… 귀족 여자였습니다. 이름이나 그런 건 말하지 않았어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 준 게 다예요.”
“이 여자인가?”
시녀장이 품에서 1왕자의 연인이 그려진 초상화를 꺼냈다. 그러자 산파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이 여자예요. 이제 몸도 무거울 텐데,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자유로워 보이더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겁에 질려 있었고, 늘 감시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집 안에 갇힌 채,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날짜는 얼마나 남았지?”
“겨울이 오면 태어날 겁니다.”
시녀장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일이 가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