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율리아는 식사 중이었다. 체벌의 방에서 구출된 이후, 그녀는 이틀 동안 묽은 수프만 먹으면서 계속 잠을 잤고, 사흘째가 되어서야 간신히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았다.
“코코! 그건 협박용이었어요. 수석 시녀라뇨. 제가 그런 식으로 수석 시녀가 돼 버리면 원로들이 아니라 왕궁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할지도 몰라요.”
“알 게 뭐야. 이 왕궁 안에 우리 편이 있긴 하니?”
“저는 괜찮아요.”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우리가 안 괜찮아. 오늘 아침 왕비궁에 심어 둔 정보원에게서 연락이 왔어. 마조람 후작 부인이 오후에 왕비를 알현할 거라고 했대.”
율리아가 입을 다물고 코코를 바라보았다.
마조람 후작 부인이 움직였다. 이는 왕궁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그녀가 알게 되었다는 걸 뜻했다.
코코는 후작 부인이 왕자궁을 이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고, 그쪽에서 어떤 반격을 준비하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고 주장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율리아가 레위시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후작 부인은 왕비를 협박할 거예요. 그쪽은 우리보다 왕비의 약점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왕비는 어쩔 수 없이 후작 부인의 청을 들어주겠죠.”
“각오해야겠군.”
“당분간 기분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날 거예요.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으니까.”
“율리아…….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레위시아가 의자 위로 몸을 미끄러뜨렸다. 율리아는 그와 코코, 알렉사를 번갈아 응시하다가 꿍꿍이 섞인 미소를 짓고 물었다.
“제가 정말 왕자궁의 수석 시녀가 되어도 괜찮겠어요?”
“여기서 너 말고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니?”
“그럼 제가 왕비 전하한테 직접 임명장을 받아올게요.”
“뭐?”
코코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왕비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널 왕자궁의 수석 시녀로 임명해 주지 않을 텐데, 도대체 무슨 수를 쓰려고?”
레위시아도 그녀의 말에 동감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코코 말이 맞아. 율리아, 설마 궁내부 대신처럼 왕비를 납치해서 협박이라고 하려고?”
“아뇨. 왕비에겐 다른 방법을 쓸 거예요.”
협박은 저쪽에서 할 테니, 이쪽은 다른 수를 써야 한다. 마침 그녀의 손엔 쓸 만한 정보가 쥐여져 있었다.
율리아가 미리부터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 * *
“왕비 전하, 마조람 후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시녀장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왕비궁의 시녀장은 목석처럼 차분한 사람이었는데, 유독 마조람 후작 부인 앞에서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잖으냐!”
왕비는 거대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1왕자의 초상화를 침대 머리맡에 두고, 계속 들여다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혼자 있고 싶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느냐!”
왕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침실 밖까지 울려 퍼졌다. 시녀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시녀장이 난처한 얼굴로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저…… 부인, 왕비 전하께선 아직 병중이십니다. 며칠만 더 시간을 드리는 게 어떨까요.”
“이게 며칠로 되는 문제입니까?”
후작 부인이 물었다. 시녀장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문을 여세요. 왕비 전하께선 곧 일어나게 되실 겁니다.”
“안 됩니다, 후작 부인!”
“하면 경비라도 불러서 날 잡아가시든지.”
후작 부인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왕비궁에 그녀의 입김이 닿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고작 문 좀 마음대로 열었다고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녀는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왕비의 침실에 멋대로 들어갔고, 함께 들어오려는 시녀장을 물리친 뒤에 문을 닫았다.
“왕비님.”
“돌아가세요. 혼자 있고 싶다고 했잖아요. 부인은 제가 우습습니까? 나가요, 나가!”
왕비는 울고 있었다. 짓무른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던 1왕자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속절없이 무너져 울고 또 울었다.
“강건하시던 분이 어찌 아직도 이러고 계십니까.”
“나가라고…….”
“왕비께서 이런다고 왕자 전하께서 살아 돌아오시기라도 한답니까?”
왕비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부인, 지금 뭐라고 했어요?”
“하루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세요. 전하는 오르테가의 왕비입니다. 아들을 잃은 어미이기 이전에, 후계자를 잃은 왕비란 말입니다. 왕국을 지키려면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왕가의 수호자로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지금 내 앞에서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고!”
왕비가 찢어질 듯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불을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은 뒤, 마조람 후작 부인을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게 당신 입에서 나올 말이야? 어떻게 당신이, 당신이 그럴 수가 있어! 내 아들을 지켰어야지! 마조람이 지켰어야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헌신했는데!”
“전하!”
“네가 뭘 알아! 아들이 죽었어! 내 눈앞에서! 아프다고 울고, 살려 달라고 소리치다가 죽었다고! 그 애는 내 첫 아이였는데! 이 나라의 왕이 될 아이였는데!”
“전하, 진정하세요. 정신을 차리시라고요!”
“정신? 정신은 당신이나 차려. 내 아들 하나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무슨……. 왕가의 수호자? 하! 수호자 같은 소리! 권력에 미친 인간 같으니!”
후작 부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러나 왕비는 슬픔과 분노에 취해 앞뒤 없이 고함을 치고 비난을 늘어놓았다.
“마조람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르리라고 생각해? 왕가의 수호자? 웃기지 마. 너희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끄시지!”
“왕비, 말을 삼가세요. 우리는 손가락 하나 잘라내면 그만이지만, 왕위라는 건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은 흐름이에요. 2왕자궁으로 분위기가 흐르게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딴 첩의 자식이 무슨!”
“왕비! 도대체 언제까지 날 실망케 할 생각이에요!”
“시끄러워! 당신은 내 아들의 여자도 죽였잖아. 1왕자의 아이를 가진 그 여자! 그 여자도 몰래 죽여 놓고 모른 척하는 거잖아! 그게 당신 방식인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왕비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후작 부인에게 원망을 말을 쏟았다.
“레위시아? 뭐가 걱정이야? 그 첩의 자식도 그렇게 치워 버리면 되겠지!”
후작 부인은 침실 한가운데 서서 왕비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움직여 소파에 앉았다. 그러곤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내 아들 살려 내, 살려 내라고! 너희가 제대로 지켰다면 그 애가 왜 죽었겠어!”
왕비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후작 부인의 얼굴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무너져 발악하는 왕비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우아함 속에 경멸을 가득 담아 말했다.
“왕비 전하, 제가 꼭 4왕자의 출생까지 입에 올려야 말을 들으실 건가요?”
“뭐, 뭐…… 뭐라고?”
왕비가 덜컥 숨을 멈췄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후작 부인을 보면서, 들썩이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잘 감춰 드렸지 않습니까. 왕비 전하께서 시녀니, 하녀니 병사들까지 그렇게 죽여 없앨 때마다…… 제가 잘 덮어 드렸잖아요.”
“그건……! 나는…….”
“레위시아 2왕자를 쳐내세요. 그게 왕비께서 할 일이니까.”
그걸 위해 당신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다. 후작 부인이 속삭였다.
가문의 이름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혼자서 왕비가 될 수는 없었다. 왕비는 마조람의 힘으로 왕족이 된 여자였다.
“마조람의 힘을 빌려 고귀한 자리에 오르셨으면 의무를 이행하세요. 왕비 전하, 이게 다 당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도 아셔야 할 거예요.”
“지금 날…… 협박하는 거예요?”
“이제 정신 차리실 때가 됐다는 말이었어요.”
후작 부인이 다가와 왕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나도 아들을 잃었어요. 하지만 견뎌 냈죠. 나라고 그 아이가 소중하지 않았겠어요? 후계자가 될 아이였는데. 하지만 전하, 우리는 권력자들이에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밀알처럼 많아요.”
그러니까 약한 모습은 보여선 안 된다. 당신도 나처럼 어미이기 이전에 권력자이니까.
“저를 너무 실망케 하지 마세요.”
2왕자궁에 전방위적인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궁내부를 제외한 모든 기관이 왕자궁의 증축과 개편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침묵하는 건 국왕뿐이었다.
왕비는 아예 드러내 놓고 왕자궁의 증축 공사를 못 하게 막았다. 궁내부의 지원과 허가를 전부 취소해 버린 것이다.
궁 안에서 왕비의 명령은 절대적이라, 기술자들은 왕자궁으로 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레위시아는 왕비로부터 외출을 삼가고 한동안 왕자궁에서 반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실상의 감금이었다.
귀족들의 알현 신청은 모두 취소되었고, 레위시아를 향해 호감을 내보이던 반제국파는 방향을 틀어 힌치 백작을 찾았다.
율리아는 그 모든 일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