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39/319)

123화

그럴 리가 없었다. 어쩌면 한두 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들은 그 일을 평생 비밀로 했을까요? 고귀한 분들의 불륜. 그 재밌는 이야기를 혼자만 알고 살았을까요? 사람의 입이란 게 얼마나 가벼운지, 궁내부 대신이라면 잘 알 텐데.”

사람의 입에는 무게가 없다. 코코는 그 점을 지적하며 생긋 웃었다.

“나도 그래요. 입이 가볍죠.”

그러니까 당신은 내 말을 들어야만 한다.

“증거가 없어도 상관없어요. 이건 의심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기는 싸움이니까.”

“뭐라고?”

“잘 생각해 보라니까요. 아직 어린 4왕자도 시간이 지날수록 하루하루 나이를 먹을 거고, 그러면 그분의 얼굴이 점점 누구를 닮게 될지…… 생각해 봤어요? 국왕 전하일까요? 아니면…… 내 눈앞에 계신 분일 수도.”

코코의 말이 길어질수록 궁내부 대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을 감추려 있는 힘껏 주먹을 말아쥐고 있었다. 코코를 꿰뚫듯 강렬하게 노려보던 눈동자도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하는 일개 시녀가 아니에요. 이 일을 공론화해서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사람이죠.”

그녀는 그걸 몸소 증명할 수도 있었다.

궁내부 대신이 연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지친 얼굴이 갑자기 10년은 더 늙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하는 게…… 뭔지, 말을 하시오.”

“율리아 아르테를 데려오세요.”

당신의 그 알량한 권위 안에서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면 당장 내 앞에 율리아를 돌려놓으라고, 코코가 말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왕자궁이었다. 궁내부 대신은 허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갇혀 있던 곳은 왕자궁 안에 있는 평범한 방이었고, 그를 납치한 건 알렉사 시녀였다.

협박이라니. 지나치게 겁이 없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거스를 수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믿을 수 없는 아랫것들은 전부 조용히 처리했다고,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궁내부 대신은 피 끓는 가슴을 억누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마부와 병사에게 거금을 쥐여 주고 이 일을 비밀에 부쳤다. 다행히 그들은 마차를 습격한 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납치와 협박을 저지른 건 왕자궁의 코코 시녀장인데, 그 피해자인 궁내부 대신이 그들을 대신해서 이 일의 흔적을 지웠다.

어쩔 수 없었다. 4왕자는 그의 아들이었고, 그는 왕비와 그 아이를 지켜야만 했다.

* * *

율리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체벌방에 갇힌 지 4일째에 이르자, 몸이 더는 못 버티고 그녀를 강제로 수면에 빠뜨렸다.

나흘을 꽉 채우는 동안 율리아가 먹은 거라곤 알렉사가 보낸 꿀물이 전부였다. 그녀는 체벌방 바닥에 쓰러진 채 기절하듯 잠들었다. 이날은 늙은 시녀조차 그녀를 찾지 않았다.

꿈속에서 헤매었던 것 같은데, 그곳이 몇 번째의 삶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워낙 여기저기 뒤섞여 있다 보니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반가워하기만 했다.

나한테 재수 없는 계집애라고 욕하던 게 일곱 번째의 코코였던가. 아니면 여덟 번째? 다섯 번째의 알렉사와 나는 언제쯤 만났더라. 여름이었나? 겨울인가? 레위시아 왕자님을 가까이에서 봤던 건 몇 번째였지?

나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던 하이에나.

나를 살리고, 나를 죽게 한 카루스 란케아.

내게 손을 내밀고, 나를 배신했던 해방군.

바실리, 크리스틴. 그리고 마조람.

그 모든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이게 바로 사람이 미쳐 가는 과정인 걸까. 이러다 어느 날 이 사람들을 전부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아무도 못 알아보게 되면 어떻게 하지.

이상하다. 다 잊어버리고 살고 싶었는데. 분명히 몇 번이나 울며 빌었는데. 다 잊게 해 달라고, 아니면 차라리 영원히 죽게 해 달라고 애원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잊으면 안 된다고, 하나라도 더 기억하고 싶어서 그 짧고 따스한 기억에 매달리게 된 게.

“율리아.”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율리아는 잠결에도 그 안에 담긴 지극한 애정과 다정한 염려를 읽어 냈다.

누가 날 걱정하고 있구나. 그러면 그녀가 해야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괜찮아요.”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 보고,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메마른 입술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쓰다듬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율리아는 그렇게 속삭였다.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왔는지는 몰랐다. 그녀는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으니까.

“미안해.”

그가 다시 말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내가 샤트린처럼 강한 왕족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레위시아였다.

이른 아침이었다. 궁내부 대신은 왕가의 원로들을 찾아 체벌방에 갇힌 평민 시녀를 풀어 달라는 말을 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자궁에 전갈이 왔다.

율리아 아르테의 교육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고루한 사고가 잘 드러나는 전갈이었다. 죄 없는 시녀를 강제로 끌고 가서 감금해 놓곤, ‘교육’이라는 말로 정당화하는 게 정말 역겨웠다.

레위시아도 그사이에 율리아를 꺼내기 위해 아무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코코가 납치와 협박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기 전에, 그는 직접 왕가의 원로들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그들은 레위시아를 만나 주지 않았다. 시녀 하나 교육하는 일에 왕족이 직접 나서서 되겠냐는 질책만 날아들 뿐이었다.

레위시아는 샤트린을 찾아갔다.

샤트린은 원로들에게조차 사랑받는 공주였으니까. 샤트린을 찾아가서 율리아가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원로들을 설득하도록 도와 달라고 말했다.

자존심까지 다 버리고 샤트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율리아에 대한 보복은 두 사람의 경쟁과는 무관한 일이니, 그 아이를 높게 평가했던 너라면 아량을 베풀 수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하지만 샤트린은 레위시아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녀는 율리아가 네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지만, 또한 율리아가 네게 얼마나 큰 무기인지 알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왕궁에 그의 편은 없었다.

나흘째가 되던 날, 원로들에게서 율리아의 교육이 끝났다는 전갈이 오지 않았다면 레위시아는 국왕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미안해.”

레위시아가 또 한 번 사과했다.

율리아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게 괜찮다는 말이라는 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레위시아가 쓰러져 잠든 율리아를 안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며칠 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율리아는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레위시아는 입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말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율리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댔다.

“너를 지킬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형제를 이용하고, 남의 불행을 발판 삼게 되더라도.

“돌아가자.”

레위시아가 율리아를 번쩍 안아 들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엉덩이 무거운 원로들은 그에게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유일하게 입구까지 나와 인사를 건네는 늙은 시녀를 무시한 채, 레위시아는 뚜벅뚜벅 걸어서 별궁을 벗어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