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궁내부 대신을 납치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에게 ‘우리는 너를 언제 어디에서나 제거할 수 있다.’라는 공포를 안겨 주기 위해서였다.
코코가 말했다.
“그래야 같은 협박의 말도 두 배의 효과를 낼 수 있지.”
상대는 궁내부 대신이었다. 왕비를 제외하면 왕궁 안에서 첫손에 꼽히는 권력자. 그런 그를 아무도 모르게 납치할 수 있다면, 그는 앞으로도 쭉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협박은 제가 해요.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제가 해요. 전하는 나서지 마세요.”
“코코!”
“왕족은 깡패가 아니에요. 뒤로는 그보다 더한 짓을 하더라도, 앞에서는 정의로운 척해야 한다고요. 이런 일에 직접 나서는 건 저로 충분해요. 제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전하의 묵인 아래 행해지는 거란 걸 저들이 모르지도 않을 거고.”
레위시아는 코코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준비를 마친 알렉사가 나타났다. 그녀는 평범한 심부름꾼들이 입는 옷에 교묘하게 얼굴을 가리고, 팔뚝엔 길고 질긴 천을 둘둘 감고 있었다.
“어디로 데려오면 됩니까?”
“우린 감출 게 없어. 감춰야 하는 건 저쪽이지.”
코코가 왕자궁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로 데려와.”
“알겠습니다.”
알렉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궁내부 대신은 바쁜 사람이었다. 그는 늘 일이 많다는 말로 귀찮은 방문객을 물리치곤 했는데, 적어도 그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왕비가 슬픔에 빠져 아무것도 못 하게 된 뒤에는 더했다. 왕궁 내정 관리자라는 건 대단히 높은 자리이면서, 또 하염없이 피로한 일이기도 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궁내부 대신은 그제야 일과를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보좌가 건물 바깥까지 따라 나와 허리를 숙였다. 궁내부 대신은 그를 손짓으로 물리치고 마차에 몸을 기댔다.
눈이 뻑뻑했다. 늙은 몸은 피로를 호소하기만 하고, 회복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하루를 무리하면 일주일이 괴로웠다.
“후우…….”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건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마조람 후작의 손을 잡은 이후, 궁내부는 그의 하수인처럼 일해 왔다. 왕궁에 마조람의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왕자궁에 정원 보수를 빌미로 하이에나도 넣어 주었고, 첩자가 발각되었을 때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병력을 충원해 주긴커녕 또 다른 첩자를 들이밀었다.
마조람과 왕비가 레위시아 2왕자를 싫어하니까. 녀석이 왕족이랍시고 날뛰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고 말하니까.
‘하룻강아지 같은 놈인 줄 알았건만.’
그때까지는 레위시아를 경계하는 마조람 후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왕궁 안에 애첩의 아들을 왕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데 레위시아 오르테가는 이상한 왕족이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무기로 젊은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끈질기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더니, 갑자기 샤트린 공주를 지지한다는 한마디 말로 왕위 후계 싸움에 뛰어들어 물길을 틀었다.
권력은 물처럼 흐르기도 하고, 고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때 레위시아가 던진 한마디는 고여 있던 왕궁 권력을 흐르게 하는 결정적 한 방이었다.
이후엔 충격의 연속이었다. 1왕자의 사망도 놀라웠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 더 놀라웠다. 힌치 백작이 등장하던 시기, 마조람 후작의 세력은 전방위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는 무관한 일인가.
레위시아 왕자에게 힌치 백작 말고도 감춰진 지지 세력이 있는 건 아닌가. 누군가 대단한 자가 뒤에서 은밀하게 그를 지원하고, 조종하는 건 아닌가.
‘코델리아 힌치인가?’
하지만 그 여자는 아직 너무 젊었다.
지금 레위시아 왕자가 쓰는 방식은 저 별궁에 감금된 채 살아가는 늙은 구렁이들이나 쓸 것 같은 방식이었다. 그만큼 음흉하고, 치밀했으며, 두려움이 없었다.
누구일까. 누가 왕자를 조종하고 있나.
궁내부 대신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그때, 덜커덩하는 소리가 나더니 마차가 멈추었다. 누군가 바깥에서 말들을 달래느라 ‘쉬.’ 하는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냐?”
그의 마차는 궁내부 소속 병사와 마부가 함께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니까!”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궁내부 대신이 늘어져 있던 몸을 움직여 마차 문을 잠갔다. 창문도 모두 잠갔다. 그러곤 가만히 숨을 죽이며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 지르면 죽일지도 모릅니다.”
여자였다. 웬 여자가 그를 협박하고 있었다.
“넌 누구냐.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압니다. 누군지.”
마차 문이 열렸다. 두툼한 잠금쇠가 장난감처럼 망가지더니 툭 떨어졌다. 궁내부 대신은 목 졸린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소리 지르면 안 된다고.”
여자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마부와 병사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차 안엔 그 혼자였다.
여기서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알렉사는 혼자서 궁내부 대신을 납치하러 가겠다고 했다.
레위시아는 자신의 호위 기사를 함께 보내려 했지만, 동행이 있으면 은밀하게 움직이기 어렵다는 말로 거절했다.
실은 짐이 될 게 뻔해서 그런 것이었다. 아무 힘도 없는 궁내부 대신은 알렉사에게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상대였다.
다만 이곳이 왕궁이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거나 필요 이상으로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알렉사는 궁내부 대신이 퇴근할 때 그의 마차로 다가가 마부와 병사를 처리했다. 움직이는 마차에 달려들어 동시에 두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건 그녀가 알렉사 콴이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그녀는 기절한 그들을 마차 안에 집어넣고는,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궁내부 대신을 마지막으로 기절시켰다.
기절한 남자 셋을 옮기는 것도 별것 아니었다. 알렉사가 걱정하는 건 왕자궁에 도착하기 전에 누군가 수상함을 느끼고 마차를 멈춰 세우는 거였다.
알렉사는 궁내부 대신과 마부, 병사의 손발을 미리 준비했던 질긴 천으로 묶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그러곤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마차를 몰았다. 일개 심부름꾼이 몰기에는 고급스러운 마차였지만, 짙게 내려앉은 어둠이 의심을 막았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여차하면 중간에 마주치는 사람까지 전부 기절시킬 셈이었던 알렉사는 왕자궁 근처에 멈춰선 뒤에야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궁내부 대신은 금세 깨어났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발작하듯 몸을 펄떡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창문은 두툼한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방 안엔 그가 앉은 의자 하나뿐이었다.
“누구냐.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냔 말이다!”
궁내부 대신이 크게 고함을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코델리아 힌치?”
“시녀장이에요.”
코코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궁내부 대신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위치에 가만히 섰다. 그러곤 눈동자만 굴려 그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신 것 같네요. 뭐 하나 부러졌어도 좋았을 텐데.”
“미쳤구나. 어린 것이 눈에 뵈는 게 없어. 이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하는…….”
“눈에 뵈는 게 없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지. 내 사람을 건드렸으니까.”
“뭐? 무슨, 그 평민 시녀를 말하는 거냐? 고작 평민 계집애 하나 때문에 이 짓거리를 했다고? 제정신이 아니군. 힌치 백작이 미친 딸을 키웠어.”
“그래. 고작 그 평민 하나 때문에 당신은 오늘부터 절망과 공포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 거야.”
코코가 한 걸음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드레스가 자르르 물결치며 바닥에 끌렸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코코의 얼굴이 궁내부 대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아주 작고 낮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그거 아세요? 왕비 전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고 있었대요. 쉿! 이건 비밀인데요. 어쩌면 그 시기가…… 4왕자께서 태어나기도 전이라지 뭐예요?”
웃는 눈에 비틀린 입술, 하얀 얼굴엔 명백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코코는 왕궁 어디에나 있는 수다스러운 고용인을 흉내 내며, 궁내부 대신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엾은 왕비 전하……. 왕께서 애첩만 사랑하시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그래서 그런 걸까요? 궁내부 대신이 젊었을 때는 굉장히 잘생겼었다면서요.”
“닥쳐, 닥치시오! 코델리아 힌치, 내가 이 모욕을 참을 수 있을 것 같은가!”
“4왕자는 누구의 아들일까요?”
“그 입 닥치지 않으면……!”
궁내부 대신이 격렬하게 발작했다. 물론 코코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닥치지 않으면 어쩌시게요. 날 죽이기라고 하시려고? 그럼 내가 이 비밀을 뭐라고 소문낼까요. 왕비 전하께서 궁내부 대신과 정을 통해 낳은 아이가 4왕자이고, 그 두 사람이 공모해서 왕의 아들도 아닌 아이를 왕족으로 키우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분은 국왕 전하의 자식이야!”
“아니면 이건 어때요.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해 시름에 잠겨 있던 왕비 전하를 궁내부 대신이 유혹하여 아들을 낳게 하고, 제 자식인 4왕자를 왕위에 올리려고 한다? 아, 이건 반역인가?”
“더는 나와 왕비 전하를 모욕하지 마라. 안 그러면…….”
“안 그러면?”
숨을 헐떡이던 궁내부 대신이 가까스로 침을 삼켰다. 그는 이 이상 흥분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숨을 삼켜 심장을 짓누르고, 평온을 가장했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도 주워들은 모양인데, 증거도 없이 그딴 모략으로 나를 협박할 수 있을 것 같나? 왕궁이 아주 우스운가 보군. 지나가던 개도 믿지 않을 이야기야.”
“그래요?”
“막말로, 내가 아니라고 잡아떼기만 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 해! 왕족을 모독한 죄는 아주 크다는 걸 알아야지!”
“생각해 보세요.”
코코가 다시 한 걸음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잘 빚은 도자기 인형 같았다. 붉은 입술에 오싹한 미소를 걸친 채, 악마처럼 말했다.
“이 일을 아는 게 나 하나뿐일 것 같아요? 그 오랜 세월 동안 그토록 잦은 만남을 가졌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