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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137/319)

121화

만약 이 일이 공개되면 궁내부 대신은 사형이다. 그의 가족들은 멀리 추방당하거나 은밀하게 살해될 것이다. 왕비는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영원히 존재를 부정당하리라.

마조람 후작 세력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왕비가 가진 권력은 후작에게 왕궁 안에서 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으나, 이 일이 공개되는 순간 이득이었던 것들이 약점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일 터였다.

이건 아주 강력한 패다.

레위시아의 머릿속에 이 정보를 무기로 얻을 수 있는 이점들이 떠올랐다.

궁내부 대신을 협박해서 마조람 후작을 배신하게 하고, 왕비를 협박해서 왕궁 내의 권력을 손에 쥘 수도 있다. 4왕자를 인질 삼아, 뭐든 시키면 다 할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이 쉬워지리라.

하지만 선뜻 그렇게 하자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4왕자 때문이었다. 친형제는 아닐지라도, 만약 이 일이 공개되면 그 죄 없는 아이가 어떤 형벌을 받게 될지 몰랐다.

코코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레위시아에게 말했다.

“4왕자는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코코.”

“이 정보를 알려 준 사람은 율리아예요. 어쩌면 그 애는 이런 일이 생기리라는 걸 예측했는지도 몰라요. 결정을 내리는 건 전하께서 하세요.”

“궁내부 대신을 협박하는 일에만 쓰고 묻어 두자고?”

레위시아는 차마 그러자고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만 쓰고 버리기에는 너무 강력한 무기였기 때문에.

코코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여기 전하가 괴물이 되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괴물이 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란 걸 알려 준 사람이 바로 네 아버지야, 코코.”

“아버지의 말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에요.”

“4왕자는 어려. 하지만 그 애는 자라서 반드시 내 적이 될 테지. 다 자란 4왕자를 죽이는 것보다, 녀석이 아직 어릴 때 왕족이란 지위를 박탈하고 평범하게 살도록 하는 게 더 인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의 말이 옳다. 코코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결정하는 건 국왕이나 원로들의 몫이지, 레위시아가 아니었다.

“일단 율리아부터 꺼내고 생각해요.”

코코가 중얼거렸다.

“우린 지금 그 애가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 * *

굶는 건 익숙했다. 율리아는 아홉 번이나 살았으면서도 어린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빵 한 조각에 목숨을 걸던 시절. 그녀는 언제나 굶주려 있었다.

아이들은 빈속을 달래려고 물을 마시다가 시큼한 위액을 토하기도 하고, 귀족이 보육원을 방문하는 날에만 등장하는 고기 스튜를 먹으려고 온갖 영악한 짓을 일삼았다.

제발 한 번만 더 와 달라고 매달리는 건 예사였다. 원장에게 들키면 회초리를 맞았지만, 배고픈 것보다 맞는 게 나을 때도 있었다.

율리아는 보육원에서 원장이 주는 새 모이 같은 식사에 매달리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서 뭐라도 하는 게 낫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했다. 보호자가 없는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영악해졌다. 죄책감도, 도덕심도 없었다.

율리아 아르테는 순수한 악당이었다.

운이 좋은 날에는 사형당한 해적의 주머니에서 값비싼 것들을 꺼낼 수 있었다. 그때는 해적의 처형식이 잦았고, 버려진 시체에 손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해적들은 신기하게도 조끼 안감을 찢어 꿰매거나 천을 덧대 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 소중한 걸 보관하곤 했다. 율리아는 그런 것들을 귀신같이 찾아내어 전당포에 팔았다.

아마 그 보육원에서 율리아처럼 배불리 먹고 살았던 아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일어나세요.”

늙은 시녀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체벌 방에 갇힌 지도 벌써 이틀째인데, 율리아는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상태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녀가 애써 꼿꼿하게 몸을 세우자, 늙은 시녀가 다시 말했다.

“꿇어앉으세요.”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일이 이어졌다. 늙은 시녀가 들어와 율리아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고, 다시 꿇어앉으라고 했다. 같은 질문을 던졌고, 회초리를 맞았다.

처음엔 아프지 않았던 매도 이제는 조금씩 아프게 느껴졌다. 꿇어앉아 있느라 굳은 무릎도, 메마른 목에서도 불쾌한 통증이 자라났다.

가장 힘든 건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틀, 이제 조금만 있으면 사흘째가 되는데 율리아는 그동안 잠깐의 휴식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시녀입니다.”

율리아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단정한 자세로 꿇어앉아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대답을 이어나갔다.

늙은 시녀가 관성적으로 휘두르던 회초리가 조금 흔들렸다. 이제는 그녀도 회초리를 휘두르는 게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맞는 사람은 꼿꼿한데, 때리는 사람이 지쳐서 팔을 떨어뜨리는 일이 반복됐다.

율리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늙은 시녀가 두 번째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이렇게 말했다.

“레위시아 왕자 전하를 보필하며, 그분의 명예를 지키고 드높이는 것입니다.”

“뭐…….”

“그것이 저의 본분입니다.”

늙은 시녀가 할 말까지 가로챈 율리아가 당당하게 고개를 든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잠도 못 자게 하고, 심지어 일어섰다가 꿇어앉는 걸 계속 반복했는데도 율리아의 눈빛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독한 것…….”

늙은 시녀가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쳤다. 진저리가 나도록 맹랑한 것을 보는 기분. 지긋지긋하다는 투였다.

율리아는 담담한 얼굴로 그 부정적인 감정을 무시했다.

이번 체벌은 짧게 끝났다. 늙은 시녀가 지쳤기 때문이었다. 잠깐 쉬고 다시 나타나거나, 어쩌면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보낼지도 모르지만.

늙은 시녀가 방에서 나간 뒤, 율리아는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천천히 폈다. 이렇게 잠깐씩이라도 펴 주지 않으면 영원히 다리가 구부러진 채 살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체벌방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던 그녀의 귀에 묵직한 군화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병사인가. 이곳은 원로들의 별궁 중에서도 꽤 외진 곳에 있는 방 같았는데. 어쩌면 그녀를 데려왔던 기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문이 열렸다. 율리아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려는데, 기사가 서둘러 말했다.

“그냥 쉬어.”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속삭이듯 작게 말하는 걸 보니 몰래 들어온 것 같았다. 율리아는 자세를 풀고 기사를 바라보았다.

누군지는 몰랐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가 바깥 기척을 예민하게 살피면서 옷을 뒤지더니, 품에서 작은 물통을 꺼냈다.

“꿀물이다. 조금씩 마셔.”

독인가.

율리아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물통을 노려보기만 하고 받아 들 생각을 하지 않자, 기사가 왜 그러냐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왜…… 너 설마 내가 무슨.”

기사도 저가 지금 하는 행동이 수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물통 뚜껑을 열어 꿀물을 손바닥에 조금 덜어내더니 얼른 마셨다.

“봤지? 독 같은 건 없어. 나는 알렉사가 보내서 온 사람이야.”

“알렉사?”

율리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알렉사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기사가 그녀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물통을 내밀었다.

“요즘 매일 같이 훈련하거든. 아니구나. 내가 훈련을 받는다고 말해야 하나. 난 실력이 별로인 편이라서. 아무튼, 한동안 내가 별궁 담당이라고 했더니 네가 무사한지 봐 달라고 부탁한 거야.”

날카롭게 긴장돼 있던 율리아의 얼굴이 사르르 녹았다.

그녀는 입가에 아지랑이 같은 미소를 띠고 기사가 내민 물통을 받았다. 그러곤 그 안에 들어 있는 달콤한 꿀물을 조금씩 나누어 마셨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기운이 났다. 율리아는 물통을 완전히 비운 뒤에야 그걸 기사에게 돌려주었다.

“고맙습니다.”

“됐어. 별궁 원로들이 별난 사람들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해도 너무하는군. 알렉사한테 가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저는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 주세요.”

“뭐?”

“늙은 시녀가 매일 들락거리며 훈계를 하고 있지만, 그 외에는 멀쩡해 보였다고요. 혼자 있어 심심해 보였다고 말해 주세요.”

기사는 율리아에게 뭐라 말하려다가 그냥 말을 삼켰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그녀의 모습은 농담으로라도 멀쩡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나, 왜 그렇게 전해 달라고 하는지는 이해가 갔다.

“교대하고 나면 사흘 정도는 다시 못 와. 전해 줄 말 없어?”

기사가 물었다. 착한 사람이었다. 알렉사와 매일 훈련을 함께한다고 했으니까, 아마 그녀에게 배운 게 많아 보답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율리아는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코코에게 건넨 정보는 궁내부 대신을 입맛대로 조종할 수도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비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조람 후작 부인이 조종하고 있었다. 그들이 4왕자의 출생에 대해 모르리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걸 빌미로 후작 부인이 왕비를 협박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알렉사한테…….”

율리아가 입을 열었다. 기사가 몸을 앞으로 내밀어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저는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할 말은 그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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