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 *
율리아가 원로들이 보낸 기사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코코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을 만큼 분노했다.
그녀는 왕자궁 병사들을 모아 놓고 너희는 도대체 누구를 섬기는 자들이냐며, 율리아가 마땅한 이유도 없이 부당하게 억류당하는 걸 눈 뜨고 보고만 있었냐고 다그쳤다.
병사들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난 정말 정석대로 싸울 생각이었어.”
코코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녀는 궁내부 대신을 떠올리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고작 뜬소문 하나에, 나한테 확인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왕자궁을 어떻게든 찍어 누르고 싶어서!”
코코는 그게 제일 화가 났다.
궁내부 대신은 코코를 불러 질책할 수도 있었다. 레위시아 왕자에게 직접 확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골치 아픈 두 사람과 싸우는 대신, 가장 약한 상대인 율리아를 제거하는 쪽을 택했다.
궁내부 총책임자라는 자가, 왕궁 내에선 왕비 다음으로 가장 큰 권력자라는 사람이, 평민 시녀를 상대로 이토록 치사한 수를 썼다.
“시녀님…….”
하녀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단체로 몰려와 고자질하긴 했는데, 코코가 이성을 잃고 화를 내자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하녀들 사이에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트루디가 조심스럽게 코코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시녀장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트루디는 코코에게 이걸 털어놔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 하지만 언젠가 율리아가 코코에게는 뭐든지 말해도 된다고 했던 걸 떠올리면서, 용기를 내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소문이요. 율리아 시녀님이 시켜서 제가 냈어요.”
“무슨 소문.”
“율리아 시녀님이 수석 시녀가 될 거라고, 앞으로 왕자궁에 들어올 시녀님이나 방문하는 귀족들은 모두 평민한테 머리를 조아리게 될 거라고요.”
트루디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동안 율리아가 시킨 일을 자신이 어떻게 수행했는지 낱낱이 털어놓았다.
알렉사는 코코보다 조금 늦게 왕자궁에 돌아왔다. 그녀는 하녀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모여서 수군거리는 걸 발견했고, 자리를 비운 사이 율리아와 코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전해 들었다.
알렉사는 코코처럼 불같이 화를 내진 않았다. 다만 왕가의 원로들이 모여 산다는 곳이 어디인지 거리를 가늠하고, 혼자서 율리아를 빼내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처리해야 할지 계산해 보았다.
“코코는?”
“안 그래도 코코 시녀장님이, 알렉사 시녀님이 돌아오거든 4왕자궁 뒤에 있는 외부 온실 정원으로 오라고…….”
“4왕자궁?”
알렉사가 훌쩍 몸을 돌렸다. 그녀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서 코코가 있다는 외부 온실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4왕자궁에서도 아주 은밀한 장소였다. 4왕자가 아직 나이가 어린 데다 1왕자가 사망한 이후 왕비의 집착적인 보호를 받는 터라, 코코와 알렉사는 율리아가 미리 심어 둔 첩자를 통해 몰래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우거진 정원수 사이에서 코코의 곁에 선 알렉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관찰.”
“무엇을요.”
“저걸 봐.”
코코가 손가락으로 온실 정원 안쪽을 가리켰다.
왕비와 궁내부 대신이 4왕자와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 유모나 시녀, 하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 모습이 왕족의 만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꼭 여느 부유한 가족의 단란한 저녁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궁내부 대신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작게 자른 고기를 4왕자의 접시에 덜어 주었고, 왕비는 그런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를 보였다.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당연하지. 가족이니까.”
“예?”
“저 세 사람이 진짜 가족이라고.”
“예? 그러니까 4왕자가…… 궁내부 대신의 아들이라고요?”
알렉사가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해 놓고 틀어막으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코코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사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코코도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알렉사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입을 틀어막은 채 비명을 삼키고 또 삼켰다.
왕비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왕의 자식이라 속이고 있다니.
심지어 4왕자는 1왕자가 죽은 뒤부터 왕위 후계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알렉사와 코코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온실 정원에 있는 4왕자와 왕비, 그리고 궁내부 대신을 향했다.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언제나 예민하고 피로해 보이던 왕비의 얼굴에 눈에 띄게 따스한 미소가 자리 잡은 걸 보니, 아까 전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가 이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자세히 뜯어보니 4왕자는 국왕보다 궁내부 대신을 더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직 어린 데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아서 그렇지, 좀 더 자라서 선이 굵어지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알렉사가 물었다.
“믿을 만한 정보입니까?”
“난 믿어.”
레위시아를 제외하면 코코가 이 왕궁 안에서 가장 믿는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였다. 알렉사가 눈매를 찌푸리며 발끝을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다.
“율리아입니까?”
“그래.”
“율리아는 그걸 어떻게 알았다고 합니까?”
코코는 율리아에게 어떤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주. 그리고 그 대가. 무려 무혈 제독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율리아는 우리가 모르는 미래의 정보를 종종 알 수 있다고 들었어. 그런…… 저주를 받았다고. 처음엔 나도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지금까지 그 애가 내 앞에서 보였던 행동을 되새겨 보니까 사실인 것 같아. 그래서…….”
“저주?”
“그래, 그래서 몰래 조사를 시켜 놓긴 했는데.”
아니,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코코는 그때 율리아에게 물어보았다. 이 정보도 네가 받은 저주의 대가로 얻은 것이냐고. 율리아는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독한 계집애. 자기가 어딘가에 감금되거나 끌려가거든 써먹으라고 이 미친 얘기를 나한테 던져 놓고 갔어. 그것도 지가 판 거나 다름없는 함정에.”
“율리아답네요.”
궁내부 대신이 인자하게 웃으며 4왕자를 품에 안았다. 사랑만 받고 자랐기 때문일까. 왕족답지 않게 천진난만한 아이였다. 왕비는 그런 아들을 지켜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알렉사가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국왕이 애첩을 포기하지 못하니까 왕비가 대체할 남자를 찾은 건지, 아니면 국왕과는 별개로 이어진 관계인지.”
“왕비의 불륜 같은 건 내 알 바 아니지만, 궁내부 대신이 왕비 덕에 얻은 권력으로 내 사람을 괴롭힌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 일을 또 누가 알고 있습니까?”
“그것까진 몰라. 국왕이 모른다는 건 확실한데, 마조람 후작이 모를 것 같지는 않거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왕비는 마조람 후작과 후작 부인이 고르고 골라서 앉힌 여자였다. 왕의 아내이지만 마조람 후작 부부와 더 가까웠던 사람.
코코는 그들이 4왕자의 출생에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알렉사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언제부터일까요.”
“아주 오래된 관계로 보여.”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약점을 파악했으면 물어뜯어야지.”
코코가 뒤돌아섰다. 확인할 건 다 했으니, 이제 계획을 짤 차례였다.
알렉사가 코코의 뒤를 따라 걸으며 두 사람의 발자국을 지웠다.
그날 밤 왕자궁에서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댔다. 율리아가 원로들에게 끌려간 뒤로 눈에 띄게 말수가 적어진 레위시아 왕자와 코코, 알렉사였다.
“궁내부 대신을 납치할 거예요.”
코코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 놓았다. 그녀가 파격적인 해결책을 제안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런 방식인 줄은 몰랐던 레위시아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코코, 궁내부 대신을 납치하면 아무리 너라도 감옥행을 피하기 어려울 텐데.”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을 거예요. 궁내부 대신은 누구에게도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 거니까.”
“뭐?”
“누가 납치했는지, 어떤 협박을 당했는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우리 편이 될 테니까요.”
“알렉사, 알아듣게 설명 좀 해 줄래?”
레위시아가 이번에는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긴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묶으며, 이렇게 말했다.
“궁내부 대신이 4왕자의 친부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납치한 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 정보를 국왕과 원로원에 흘릴 거라고 협박할 생각입니다.”
“뭐어?!”
레위시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코코와 알렉사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뭔가 소리를 지르려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큰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 입을 찰싹 때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4왕자는 그의 동생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친동생인 줄 알고 살았던 아이였다. 사이좋은 형제는 아니었지만, 아직 너무 어려서 미워하지도 않았던 아이.
레위시아의 머릿속에 4왕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는 그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왕비를 닮았는지 아닌지, 혹은 국왕이 아닌 다른 남자를 닮았는지.
레위시아가 물었다.
“사실이야?”
코코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