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같잖은 것들! 답장은 하나도 보내지 마. 내가 이 선물을 받았다는 걸 바깥에 알리지도 마. 누가 물어보거든, 내 방에 갖다 놓기는 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말해.”
“네, 아가씨.”
코코의 전속 하녀들이 빠른 속도로 선물을 정리했다. 그러곤 그녀의 손에 뇌물을 보낸 사람의 이름과 선물 목록이 적힌 노트를 쥐여 주고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코코가 노트를 서랍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마조람 후작이나 샤트린 공주에게는 이보다 열 배, 스무 배는 귀한 것들이 들어가고 있을 거야. 질 수 없잖아? 왕자궁을 뇌물로 꽉꽉 채울 때까지 뜯어먹어야지.”
그러고 보니 율리아는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고 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코코가 물었다.
“할 말이라는 건 뭐야? 이번엔 나한테 예언이라도 하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율리아가 애매하게 웃었다. 코코는 붉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율리아가 코코를 흉내 내며 노래하듯 말했다.
“있잖아요. 만약 제가 어디로 끌려가거나 감금당하거든…….”
코코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율리아는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그냥 생긋 웃었다.
“무기가 될 만한 비밀을 알려 주려고요.”
이전 삶의 당신이 나한테 알려 준 비밀 중 하나를, 이제는 내가 당신에게 알려 줄 것이다.
* * *
코코가 시녀장이 된 이후, 2왕자궁은 몇 가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레위시아 왕자의 변화였다.
왕궁 안에서조차 자유로운 방랑자처럼 살던 그가, 이제는 어딜 가나 호위 기사를 여럿 대동하고 다녔다. 마치 자신은 왕좌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피했던 중앙 귀족들도 더는 회피하지 않았다.
힌치 백작이라는 거물을 뒷배로 둔 레위시아가 샤트린의 대항마로 떠오른 순간, 귀족들은 치열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레위시아 왕자는 샤트린 공주의 상대라고 하기엔 아직 힘이 약했다. 하지만 그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힌치 백작과 그의 딸, 그리고 조금씩 그에게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반제국파까지.
그 분위기는 왕궁 안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레위시아 왕자의 곁을 지키는 세 명의 시녀 때문이었다.
코코는 시녀장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왕자궁을 증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왕족의 궁치고는 규모가 작았던 왕자궁을 죽은 1왕자나 샤트린 공주의 궁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원이 늘어났고,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다. 왕자궁의 새 시녀장이 보수를 넉넉하게 준다는 소문이 돌자, 기술자들이 자원해서 증축 공사에 투입되었다.
알렉사는 오랫동안 미루었던 기사 시험을 치렀다.
배불리 먹었으니 산책이나 하고 오겠다는 투로 ‘오늘은 저도 궁의 명성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나 정도는 하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더니, 정말로 그 어렵다는 왕실 기사 시험을 소꿉놀이하듯 해치우고 돌아왔다.
알렉사와 가깝게 지내는 왕실 기사들 사이에서는 그녀가 왕실 기사단장보다 더 센 게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었다.
율리아는 언젠가 맥스웰과 함께 왕궁 여기저기에 심어 두었던 첩자들의 명단을 코코에게 넘겼다. 그들은 왕자궁의 시녀장이 보낸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보곤 말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던 어느 오후였다. 왕자궁에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네가 율리아 아르테인가?”
기사들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그들의 손엔 무기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휘두르는 것은 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이었다. 바로 왕가의 원로들을 통해 나오는 것이었다.
율리아는 그들을 마주한 순간 직감했다.
원로원이 움직였구나. 궁내부 대신이 왕비를 움직이길 바랐는데, 원로원을 선택했구나.
그녀는 아홉 번이나 살았지만, 왕궁 안에서 시녀가 되어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왕족과 궁내부, 왕가의 원로들과 왕궁 사람들의 생리에 대해 자세히는 몰랐다.
율리아가 아는 건 전부 코코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했다.
하녀들이 불안해하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레위시아와 코코, 알렉사가 모두 자리를 비워 왕자궁엔 율리아 혼자뿐이었다.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다면 전력으로 부딪치면 된다. 율리아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물었다.
“누구시죠?”
“대답해라. 네가 율리아 아르테인가?”
그들은 연한 회색 제복에 어깨엔 우아하게 장식된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게 왕가의 원로를 모시는 자들을 상징하는 거라는 걸 알았다.
누구일까. 국왕의 부모는 모두 죽었으니, 선대의 형제이거나 그 이전의 왕족이 낳은 자식이거나, 그런 자들일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왕가의 원로라고 해 봤자, 왕실이나 중앙 권력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란 것이었다.
왕가의 원로로서 존경받는 대신, 자유를 헌납하고 왕실에 일생을 바친 자들. 그게 대단히 고귀한 희생인 양 착각하면서 낡은 법도를 강요하는 자들.
“대답하지 않으면 불복종으로 간주하겠다.”
기사가 말했다. 나이 지긋한 자였다. 율리아는 그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입술만 살짝 움직여 대답했다.
“그래, 내가 율리아 아르테다.”
기사의 흰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그는 율리아의 거만하리만치 당당한 태도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율리아는 허리를 숙이거나 치마를 잡거나, 하다못해 고갯짓조차 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측근 시녀인 율리아 아르테다. 너희는 누구이기에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거지?”
기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언짢음을 드러냈다.
그들이 왜 왕자궁에 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왕가의 원로들이 율리아를 데려오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완력을 써서라도 끌고 오라고. 그게 바로 그들이 평민을 다뤄 온 방식이니까.
율리아는 그들에게 굴복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몸부림을 쳐서 반항할 생각도 없었다.
“내 발로 걸어갈 테니까 앞장서. 그쪽도 원로원의 기사씩이나 되는 분들이 평민 시녀 하나를 끌고 가려 폭력을 행사했다는 소문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면.”
율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녀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엔 겁먹은 얼굴을 하고도 눈동자만은 활활 불태우고 있는 하녀들이 있었다.
원로들은 율리아를 불러 놓고는 만나 주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들도 고작 평민 시녀 하나를 불러 놓고 둘러앉아 혼내는 그림이 우습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고귀하고 대단하신 분들이 하는 짓이 이토록 유치해서 더 우스웠지만.
“갈아입으세요.”
율리아 앞에 나타난 건 어느 늙은 시녀였다. 관리직 시녀이거나, 왕가의 원로를 모시는 시녀일 것이다.
그녀는 율리아에게 뻣뻣하고 펑퍼짐한 옷을 건넸다. 발끝까지 오는 누런 천에, 목과 턱의 경계까지 올라오는 답답한 디자인이었다.
율리아는 반항하지 않고 늙은 시녀가 건네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꿇어앉으세요.”
그곳은 창문 하나 없이 그저 넓기만 한 방이었다. 가구라곤 작은 책상과 간소한 의자가 전부였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체벌의 방이었다. 고귀한 원로들이 시녀를 시켜 아랫것들을 훈계하는 곳.
율리아는 그 앞에 꿇어앉았다.
늙은 시녀가 물었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시녀입니다.”
율리아 아르테라고 대답하면 안 되는 질문이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 레위시아의 시녀라는 점을 강조했다.
정답일 것이다. 늙은 시녀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회초리를 휘두르지 않고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얇은 대나무로 만든 회초리가 율리아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대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레위시아 왕자 전하를 보필하며, 그분의 명예를 지키고 드높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시녀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늙은 시녀가 그렇게 말하더니 회초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율리아의 몸을 가볍게 때렸다.
“율리아 시녀는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그분이 왕실의 법도를 어기게 했어요.”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옷이 펑퍼짐해 충격을 줄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 체벌은 고통보다는 모멸감을 주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물론 율리아는 이 정도 수치에 상처받을 만큼 마음이 무르지 않았다.
“율리아 시녀, 그대의 꿈은 무엇입니까?”
“레위시아 왕자 전하께서 오르테가 역사에 남을 현군이 되는 것입니다.”
“시녀가 감히 왕의 자리를 논하다니요.”
늙은 시녀가 다시 회초리를 휘둘렀다.
율리아는 이 체벌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코코도 왕실의 원로들이 평민 시녀를 불러다 늙은 시녀를 시켜 회초리를 휘두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율리아 시녀, 그대는 레위시아 왕자 전하를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하세요.”
“사랑하지 않습니다. 제 충성심을 모욕하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 말대꾸하면 안 됩니다.”
또 회초리가 날아들었다. 이쯤 되자 어떤 대답을 해도 회초리를 맞도록 유도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대는 친제국파입니까, 반제국파입니까?”
“저는 파벌에 몸담고 있지 않습니다.”
“둘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
“어느 쪽도 아닙니다.”
“반성하십시오. 그대의 고집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나무 회초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율리아의 등을 때렸다.
늙은 시녀의 목소리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보면 다정하게 들리는데, 그 안에서 느껴지는 건 지극히 옹졸해진 노인의 영혼이었다.
율리아는 직감했다.
‘나가기 쉽지 않겠어.’
이건 고립을 위한 감금이었다. 왕자궁에 보여 주려는 것이다. 고작 평민 시녀 하나. 원로들에겐 직접 만나 볼 가치조차 없는 아이.
“다시 묻겠습니다.”
늙은 시녀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질문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