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율리아는 이날이 트루디가 궁내부 관리에게 정기 보고하는 날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궁내부에 다녀온 트루디가 점심도 거른 채 율리아의 방을 청소하러 들어왔을 때였다. 이 시간엔 주로 1층에서 시간을 보내는 율리아가 자신의 방에 돌아와 있었다.
“어? 시녀님, 왜 이 시간에 방에 계세요?”
“내가 내 방에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줘야 하니.”
“아뇨. 그게 아니라.”
트루디가 애써 웃으며 달려왔다. 그러곤 청소할 건데 먼지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하고 싹싹하게 말했다.
율리아가 말없이 트루디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고 차갑게 등을 돌렸다.
“이제 나갈 거야. 청소 고마워.”
“저기, 시녀님.”
그런데 트루디가 율리아를 잡았다.
청소하러 들어왔다는 애가 걸레도 없이 맨손이었다. 트루디는 나가려는 율리아를 붙잡아 놓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율리아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천천히 두 눈을 깜박이더니 트루디에게 의자를 권하고, 자신도 다른 쪽에 앉았다.
“저, 방금 궁내부에 다녀왔거든요. 평소처럼 별거 아닌 얘기만 했어요. 코코 시녀님이 시녀장이 되었다는 거랑 알렉사 시녀님이 기사 시험을 볼지도 모른다고…….”
“괜찮아.”
“그다음엔 율리아 시녀님 소식을 물어보셔서, 어젯밤에 시키신 대로 했어요.”
트루디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코코 시녀님께서 율리아 시녀님을 왕자궁 수석 시녀로 삼겠다고 말씀하시는 걸 엿들었다고. 평민 시녀가 수석 시녀가 된 사례가 왕실 역사에 없으니 원로들이 관련 법도를 만들 생각조차 못 했다고. 그러니까 먼저 발표하는 쪽이 이기는 싸움이라고.”
“반응이 어땠니?”
“욕을 했어요.”
율리아가 가볍게 웃었다. 트루디는 자신이 그녀를 욕한 것처럼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샤트린 공주께서 귀족의 길을 제안하셨던 것 때문에 율리아 시녀님이 주제도 모르고 기고만장해 있는 것 같다고, 두고 볼 일이 아니라면서…… 당장 여기저기 알릴 기세였어요.”
“잘했어, 트루디.”
수석 시녀라니. 코코는 아직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일단은 코코가 시녀장이 되는 것부터 원로들의 눈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그것부터 싸워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설득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왕실 법도 따위가 코코의 앞길을 막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한 계단 위로 오르는 걸 막겠다고 하면, 열 계단 위로 오르겠다고 협박하면 된다.
“저기요, 시녀님…….”
트루디가 뭔가 더 말하려고 하던 때였다. 율리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금고를 열어 금화를 한 움큼 꺼냈다. 언뜻 봐도 20개는 되어 보였다. 율리아는 그게 몇 개인지 세어 보지도 않고 트루디에게 건넸다.
“수고했어.”
걱정으로 어두웠던 트루디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율리아는 그녀의 저 탐욕스러운 얼굴이 좋았다. 돈 앞에 솔직한 사람은 부리기가 쉽다. 상대보다 더 많은 돈을 쥐여 주기만 하면 된다.
트루디는 영리한 편이었다. 그녀는 궁내부 관리보다 율리아가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이 모든 일이 들킨다 해도 궁내부 관리보다는 왕자궁의 시녀들이 더 안전한 그늘을 제공할 거라 믿었다.
“그럼 이제 저는 뭐부터 하면 될까요?”
금화를 챙긴 트루디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율리아는 그녀를 보며 진하게 웃음 지었다.
“미친 평민 시녀가 수석 시녀가 되어 버리면, 앞으로 왕자궁에 들어올 귀족들은 평민에게 머리를 숙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소문을 내야지.”
“소문이요?”
“자신 있지?”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트루디는 자신 있었다. 소문이 누구의 입에서 나온 건지도 모르게 부풀리는 것. 빈민들이 모여 사는 부둣가에서 악착같이 살았던 그녀에겐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돈이 부족하면 말하라는 율리아에게, 트루디는 아니라며 빠르게 손사래를 치고 일어났다. 그러곤 청소는 이따가 저녁 식사 시간에 해 놓겠다는 말을 남기고 왕자궁을 벗어났다.
트루디가 제일 먼저 간 곳은 심부름꾼들이 왕궁에 들어온 식료품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상인들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내부인보다 외부인이 많고, 일꾼들이 자주 바뀌기도 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안면을 익힌 한 청년과 눈인사를 건네곤 구석으로 가서 담배를 나눠 피웠다.
“왕궁 하녀가 담배나 피우고.”
“술 끊은 게 어디야. 왕궁 생활이 장난인 줄 알아? 온종일 정신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고.”
“그 정도야? 왕자궁은 좀 편하다면서?”
“시녀장이 생겼잖아. 평민 수석 시녀도 생길 거고.”
“그래? 고생 많겠네.”
청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왕궁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지만, 트루디가 그렇다고 하니까 괜히 하녀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나도 곧 그만둘 거야. 조만간 왕자궁에 다른 시녀들도 들어올 텐데, 그 신경질을 어떻게 견뎌?”
“좋은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잖아.”
“귀족 아가씨들이 평민한테 굽실거려야 하는데, 참 마음이 좋기도 하겠다. 그 피해는 결국 우리 하녀들한테 오게 되어 있다고. 난 그러곤 못 살아.”
트루디가 담배를 다 피우고 일어났다. 그녀는 청년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왕자궁에서 훔쳐 온 간식을 내밀었다. 청년이 히죽 웃으며 트루디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다음엔 다시 궁내부였다. 이번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다가 아까 만났던 하급 관리에게 다시 접근했다.
“트루디!”
“아까 왕자궁 간식 먹고 싶다고 하셨죠? 제가 좀 챙겨 왔어요.”
“세상에…… 이렇게 다정할 수가. 기다려! 내가 너 용돈 좀 줘야겠다.”
“돈 받으면 뇌물인 것 같아서 싫어요. 그냥 나중에 저 왕궁 그만두고 나면 밖에서 만나서 맛있는 거나 사 주세요.”
하급 관리가 서운해하며 물었다.
“왕궁을 그만둬? 왜?”
트루디는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거라며 얼버무렸다. 그러곤 식료품 창고에서 청년에게 했던 이야기를 조금 각색해서 들려주었다.
“왕자궁은 좋은데, 앞으로는 이렇게 편하게 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왜냐면…….”
마지막은 샤트린의 궁에서 일하는 하녀였다.
트루디는 왕자궁으로 돌아가 율리아의 방을 청소하고, 대충 끼니를 때운 후에 공주궁에서 일하는 사람 중 한 하녀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돌아갈 집이 없어 왕궁 숙소에서 지내는 하녀였다.
어둠에 둘러싸인 퇴근길, 트루디가 나무 뒤에서 튀어나왔다.
“야.”
공주궁 하녀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트루디?”
“너지? 궁내부 관리가 최근에 공주궁에 집어넣은 쥐새끼.”
쥐는 쥐를 알아본다. 트루디는 자신의 정체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공주궁 하녀는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트루디가 다가와 금화를 3개나 내밀자 머뭇거리면서도 그걸 받아 손에 쥐었다.
“별거 아냐. 네가 위험해질 일도 없을 거고. 그냥 수다나 좀 떨어 주면 돼. 알았지?”
“수다라니, 무슨 얘기?”
“어떤 평민 시녀 얘기.”
이건 들킨다 해도 죄가 되지 않을 얘기였다. 그냥 수다를 좀 떨 뿐인 일이라, 누가 캐러 다니지도 않을 것이다.
트루디의 말에 설득당한 공주궁 하녀가 금화를 앞치마 주머니에 감추며 웃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코델리아 힌치가 스스로 왕자궁의 시녀장에 오른 것도 모자라, 평민 따위가 수석 시녀가 되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수석 시녀는 시녀장처럼 왕자궁 전체를 아우르는 권력자는 아니었으나, 레위시아 왕자의 정식 보좌로서 왕족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권력에 가까운 자리였다.
왕궁은 충격에 빠졌다. 궁내부 대신은 아래 관리를 통해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공주궁 시녀들은 하녀들의 수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는 왕실의 법도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율리아 아르테라는 이름이 오르테가 왕궁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수석 시녀라니. 평민이 그런 자리에도 오를 수 있는 거야?”
안 된다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부러움, 질투, 그리고 율리아로 인해 불거진 신분제에 대한 불만까지.
궁내부 대신은 왕자궁의 도 넘은 일탈을 더는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본래라면 왕비를 방문해 왕실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성토할 일이었으나, 그녀는 1왕자를 잃은 슬픔에 빠져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궁내부 대신은 왕가의 원로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이 일의 심각성을 알려 왕자궁의 파격적인 행보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날 밤, 코코의 방에 율리아가 찾아왔다.
“코코, 할 말이 있어요.”
코코는 방 안에 가득 찬 선물 상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전속 하녀들이 하나씩 포장을 뜯으며 누가 뭘 보냈는지 노트에 적었다.
“이게 다 뭐예요?”
율리아가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코코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얼굴로 흥 콧방귀를 뀌었다.
“앞에서는 그렇게 욕을 하더니, 내가 시녀장이 되었다니까 선물 보내는 꼬락서니 하고는. 이건 일종의 보증이야. 왕자궁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나마 이름이 많이 알려진 나한테 뇌물을 쓰는 거지.”
“다 돌려보내려고요?”
“미쳤어? 다 받아야지. 아니, 더 받아야지.”
코코는 더 받아 낼 생각이었다. 이 정도 뇌물로는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