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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33/319)

117화

보통 왕궁 시녀장이 움직일 때는 시녀들이 하나나 둘 정도 따라붙게 마련이었다.

샤트린만 해도 시녀의 수가 20명을 훌쩍 넘겼고, 왕비는 그보다 더 많았다. 1왕자가 죽기 전에는 그가 받아들인 시녀가 왕비의 시녀와 비슷할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코코는 혼자였다.

레위시아의 2왕자궁에는 측근 시녀만 셋 존재할 뿐, 시녀장이나 수석 시녀가 없었다. 수습 시녀도 없었다.

왕실 시녀들의 위계는 이런 순서였다. 시녀장이 가장 높은 권력자였고, 수석 시녀가 그 아래, 그 뒤엔 측근 시녀가 있고, 가문이 한미하거나 신뢰를 쌓지 못하면 수습으로 남았다.

코코는 10년 동안 레위시아의 측근 시녀였다. 왕자가 왕위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시절에는 그녀 역시 권력에서 멀어져 있었다.

“2왕자궁의 시녀장으로 임명된 코델리아 힌치다. 도리상 궁내부 대신께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왔으니, 안내해.”

“네?”

궁내부 입구에서 제일 처음 만난 관리에게, 코코가 명령했다.

“궁내부 대신께 안내하라고.”

코코가 왕자궁의 시녀장이 되었으니 일개 하급 관리는 그녀의 말에 감히 토를 달아서는 안 되었다.

“네, 이쪽으로…….”

궁내부 대신의 집무실은 꼭대기 층에 있었다. 높은 계단을 나비처럼 사뿐사뿐 올라간 코코가 집무실 문 앞에서 거만하게 턱짓했다.

“저, 2왕자궁 시녀장께서 오셨습니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오라고 해라.”

궁내부 대신은 코코를 만나 주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궁내부가 들썩거리도록 요란하게 나타난 그녀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 버리자, 노한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무례하오.”

“그쪽이야말로 무례하네요. 못 들으셨나요? 2왕자궁의 시녀장이라고 했잖아요. 제가 궁내부 대신만큼 대단한 권력자는 아니지만, 2왕자궁의 관리자로서 제가 이제부터 레위시아 왕자님을 대신한다는 건 아셔야 할 텐데.”

“보시다시피 바쁘오. 한가하게 시녀장 인사나 받아 줄 시간은 없소.”

“누가 인사하러 왔다고 했나요?”

코코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노련한 권력자라는 걸 아는 이상, 그녀는 절대 굽혀선 안 됐다.

“통보하러 온 겁니다. 이제 2왕자궁엔 시녀장이 있으니까 이전처럼 하급 관리나 관리직 시녀님을 보내서 주제넘게 간섭하지 말라고요.”

“뭐라고?”

“2왕자궁의 인력, 물자와 내탕금, 그리고 모든 행사는 이제 제가 주관합니다. 궁내부는 제가 드리는 보고서만 받으시면 돼요.”

“자네야말로 주제넘는군! 왕자궁도 결국은 궁내부가 관리하는…….”

“그래서 하이에나 따위가 왕족을 위협하려 왕궁에 침입했을 때 침묵하셨나요?”

궁내부 대신이 멈칫했다. 코코는 그 찰나의 당황을 놓치지 않고 물어뜯었다.

“왕자께서 직접 임명한 시녀를 신체검사 운운하면서 치사한 방법으로 내치려고 하더니, 왕족의 목숨 앞에서도 그 대단한 궁내부의 자존심은 굽혀지지 않더군요.”

“힌치 영애!”

“이제 시녀장이에요. 말씀 똑바로 하셔야죠.”

코코의 눈에서 강렬한 분기가 흘러넘쳤다. 그녀는 여기서 자신이 조금만 약해 보여도 그 열 배의 보복이 왕자궁으로 돌아오리란 걸 알았다.

그러니 절대 약해 보여선 안 된다. 나이는 상관없었다. 경력도 필요 없었다. 그녀는 이제 시녀장이었다. 왕자궁의 방패가 되어야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앞으로 왕자궁에 특별히 간섭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할 수 있는 모든 예의와 절차를 밟아서 오세요.”

왕궁 안에서 하는 싸움이라면 자신 있다.

코델리아 힌치는 이 순간을 위해 10년 동안 악마 시녀가 되어 살았으니까.

* * *

트루디는 1왕자가 죽기 전 그의 연인이었던 여자와 친해지기 위해 궁내부에 자주 드나들었고, 자연스럽게 다른 하급 관리들과 안면을 트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쾌활하고 싹싹한 트루디는 어디에서나 환영받았다. 그녀는 궁내부 건물로 들어가자마자 제일 처음 만난 여자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점심 드시러 가는 거예요? 좋겠다! 궁내부는 점심시간이 빨라서.”

“아침 안 먹는 사람이 많아서 그래. 뭐가 부러워? 왕자궁 하녀들은 아무 때나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잖아.”

“그건 우리 왕자궁만 그런 것 같던데요. 하녀들 얘기 들어 보니까 다른 데는 규율이 엄격한 것 같더라고요.”

“나도 궁내부 때려치우고 왕자궁에서 일하고 싶다.”

“코코 시녀장님한테…….”

“아서라! 내가 괜한 말을 했네.”

하급 관리가 몸서리와 함께 손사래를 쳤다.

“어디 가니?”

“편지 부탁하러요!”

깔깔 웃던 트루디는 자신을 왕궁 하녀로 추천해 준 궁내부 관리에게 부탁해 고향에 편지를 보내려 한다며 계단을 올랐다.

궁내부 건물엔 사람이 많았다. 워낙 다양한 일을 처리하는 곳이라, 일하는 사람도 방문하는 사람도 많았다.

트루디는 복잡한 복도를 몇 번이나 돌아 구석에 있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

“정기 보고하러 왔어요.”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되었나? 어디 보자. 이리 앉아라.”

젊은 남자 관리가 트루디를 의자에 앉혀 놓고 두툼한 수첩을 꺼냈다. 그러곤 날짜와 이름, 장소에 따라 구분된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왕자님은 요즘 어떻지?”

“공부를 많이 하세요. 경연 전날인가, 밤새우셨다고 들었어요. 전엔 점심시간에 일어나시더니, 이제는 아침 일찍 일어나세요.”

“그런 시시한 것들은 됐어.”

“며칠 전에 코코 시녀님이 시녀장이 되었잖아요. 어제는 왕비궁에서 사람이 다녀갔는데, 무슨 대화를 했는지 그건 못 들었고요. 되게 화가 나신 것 같았어요.”

“알고 있다. 시녀장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정해지는 자리가 아닌데, 나 참. 왕실 법도를 그딴 식으로 무시하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시녀님들 외출이 잦아졌어요. 코코 시녀장님이야 힌치 백작님 만나려고 나가시는 것 같고, 알렉사 시녀님은 요즘 부쩍 기사님들하고 친해진 것 같더라고요. 기사님들이 알렉사 시녀님한테 기사 시험을 보라고 충고하시던데요?”

“뭐? 왕실 기사들이?”

“네, 자격은 이미 충분하다면서…… 왕실 법도에 시녀가 기사 시험을 보면 안 된다는 조항은 없다고.”

“미친!”

궁내부 관리가 요란하게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녀가 기사 시험을 봐서 무엇에 쓰겠냐고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빈정거렸다.

트루디는 괜히 울컥했지만 드러내지 않고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평민 시녀는?”

올 것이 왔다. 트루디가 티 나지 않게 침을 삼켰다.

“율리아 시녀님은 별로 말씀드릴 게 없어요. 그분은 가문도 없는 평민인데, 도대체 어떤 정보를 캐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멍청하긴! 누가 너한테 정보를 캐라고 했느냐? 그냥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그걸 말해 주면 되는 거야. 첩자 짓 몇 번 하더니 네가 무슨 정보 길드 조직원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너는 그냥 쥐새끼야. 그걸 명심해라.”

“네?”

“어설프게 나대지 말고 쥐새끼는 쥐새끼답게 굴란 말이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뭐?”

관리가 멈칫하더니 얼굴을 서서히 일그러뜨렸다. 트루디가 말대꾸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트루디는 그가 무서웠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쥐새끼라뇨. 취소하세요.”

당찬 요구였다. 트루디로서는 최선을 다한 반항이기도 했다. 이 남자는 그녀를 왕궁에 집어넣어 준 사람이었다. 율리아에게는 시험을 봐서 들어왔다고 말했지만, 다 거짓말이었다.

먹여 살려야 할 가족도 없었다. 트루디는 멀리 시골에서 온 소녀가 아니라, 빈민들이 모여 사는 오래된 부둣가 출신이었다.

“이게 왕궁에서 얼마간 지내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관리가 수첩을 접고 일어났다.

“왜, 너도 그 평민 시녀처럼 언젠가는 왕자의 눈에 띄어서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냐? 이제 쥐새끼 노릇은 그만하고 싶어졌어?”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관리님께 충성하고 있어요!”

“그런데 태도가 이게 뭐야. 죽고 싶어?”

“쥐새끼라는 말은 너무했잖아요!”

“이게 어디서 큰소리야?”

철썩. 관리가 트루디의 뺨을 때렸다. 그리 세게 때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멸감을 느끼는 데는 세기 같은 건 아무 상관없었다.

트루디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 그를 노려보았다.

“눈깔 순하게 굴려. 비렁뱅이 주워다가 왕궁 하녀 만들어 줬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너는 나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어. 알아?”

그가 들고 있던 수첩으로 트루디의 머리를 몇 번이나 내리쳤다. 반항하려야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간격으로 퍽퍽퍽. 트루디는 머리를 잔뜩 수그린 채 거친 숨을 골랐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쥐새끼라고 안 부르면 되는 거냐?”

“……금화요.”

“뭐?”

“저는 목숨 걸고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아무 대가도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하하하하!”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면서, 너 같은 쥐새끼들이 원하는 건 다 정해져 있다고 비웃기도 했다.

달그락. 테이블 위에 번쩍거리는 금화 하나가 떨어졌다. 트루디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그 금화를 손에 쥐었다.

“만족했으면 이제 말해 봐. 그 평민 시녀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율리아 시녀님은…….”

트루디의 입에서 몇 가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거칠어진 손이 금화 하나를 붙들고 이리저리 굴리다가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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