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뭍에서 해방군이 마조람 후작의 세력을 공격할 때, 바다에서는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드추바 섬 앞에서 해적들을 벌레 쫓듯 쫓아냈다.
이것만은 국왕과 샤트린 공주, 마조람 후작이 원했던 결과였다. 무혈 제독 카루스 란케아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해적을 몰아냈고, 함대를 나누어 드추바 섬을 중심으로 한 옛 항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왕국에 배타적이었던 토착민들이 주둔지 건설에 동원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카루스는 오르테가의 국왕에게 이 일을 황제에게 보고할 것이라 말했다. 그러면 황제는 크게 기꺼워하면서 오르테가에 대한 의심을 덜어 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맹은 굳건해지고, 국왕은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친제국파는 레위시아와 손잡은 카루스 란케아에게 매달리고, 반제국파는 해방군을 앞세운 블라이스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게 모두 한 명의 시녀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서로를 속고 속이느라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도 모른 채 시간이 흘렀다.
여름도 하반기에 접어들었다. 밤이 되면 전보다 조금 시원해진 바람이 불기도 했다. 그러나 오르테가는 여름이 긴 곳이었기에, 아직은 가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저기, 시녀님.”
“왜.”
“귀빈궁에서 사람이 왔는데요…….”
트루디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율리아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창문으로 시선을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인가?”
“네! 그…… 꼭 오셨으면 한다고, 시녀님을 위해 준비한 게 있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알았어.”
담백하게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려던 율리아가 트루디를 힐긋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얼마 받았니.”
“네, 네?”
“날 설득하는 조건으로 얼마를 받았냐는 말이야. 지난번에 공주궁에서 온 사람이 금화를 쥐여 줬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았을 거고. 귀빈궁 손님은 네가 하는 말 한마디에 금화를 아낄 사람도 아니고.”
“금화 3개요.”
트루디가 방긋 웃었다. 율리아는 그 죄책감 없는 얼굴이 좋았다. 금화 3개도 하녀들에겐 큰돈이었지만, 그녀는 트루디가 조금 더 탐욕스럽게 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음엔 열 개 요구해.”
“네?”
“사람 봐 가면서 요구하란 말이야.”
트루디가 격렬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귀빈궁 손님은 우리 율리아 시녀님과 관계된 일에 금화를 아끼지 않는다는 정보가 새겨졌다.
율리아는 단정하고 평범한 드레스를 입었다. 블라이스 백작을 만나러 가는데 한껏 치장할 이유는 없었다.
시간이 되자 귀빈궁 사람이 율리아를 데리러 왔다. 코코와 알렉사가 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율리아는 오히려 왕궁 안에서 만나는 것이기에 안전할 거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그녀는 그렇게 귀빈궁 응접실 의자에 앉게 되었다.
블라이스 백작은 아주 바빠 보였다. 율리아를 초대해 놓고도 응접실 밖에서 부하들과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음식이 나온 뒤에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몸에서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율리아는 그가 피 냄새를 감추기 위해 진한 향수를 뿌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시선이 블라이스의 걸음걸이와 자세, 호흡을 면밀하게 훑었다.
“다치셨나 봐요.”
“피 냄새가 나?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블라이스가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자신이 다쳤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가벼운 부상으로 보였기에, 율리아는 그에게 관심을 끊고 사무적으로 물었다.
“이번엔 왜 또 불렀는지 말씀하세요.”
“이제 식사 정도는 소소하게 같이 해도 되잖아. 아직도 나에 대한 오해가 안 풀렸어?”
“오해가 쌓이는 중이라고 해 두죠.”
블라이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늘 그의 말에 딱딱한 대답만 하던 율리아가 처음으로 농담 비슷한 걸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잡힌 율리아는 아직도 너무나 멀었다. 눈앞에 있는데, 저 멀리 있어서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픈 데를 찔러 보고, 원하는 것도 쥐여 주고, 은근히 유혹하기까지 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율리아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식사를 시작했다. 테이블 위엔 블라이스의 고향인 북부 왕국의 음식이 두어 가지 놓여 있었다. 향이 너무 강해 빵을 반드시 곁들여 먹어야 하는 고기 요리였다.
율리아는 완벽하게 순서를 지켜 식사했다. 접시 위에 얇은 빵을 깔고, 고기를 소량 올렸다. 그러곤 그 위에 삶은 채소를 또 한 겹 쌓아 작게 잘라 먹었다.
블라이스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이걸 좀 볼래.”
그가 율리아의 눈앞에 4개의 반지를 내려놓았다.
화려하고 묵직해 보이는 반지였다. 치장을 위한 건 아니고, 도장이거나 증명을 위한 반지로 보였다.
율리아는 그게 마조람 후작의 가신 중 일부 가문의 인장이라는 걸 눈치챘다.
하나를 제외한 3개의 반지에 검은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율리아가 식사를 멈추고 반지를 가만히 노려보자, 블라이스가 물수건으로 반지를 하나씩 깨끗하게 닦았다.
“골라.”
“이게 뭐죠.”
“알면서 묻는 건 그만둬. 마조람 후작의 가신들이잖아. 그동안 나 아주 바빴다고. 너도 들었지? 해방군이 후작의 부하들을 습격했다는 소식.”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요.”
“잘 봐. 놈들의 반지야. 가문의 인장이지.”
블라이스가 깨끗해진 4개의 반지를 율리아 앞으로 밀었다. 손가락으로 하나씩, 이 반지는 누구의 것이고 언제 죽었으며 어떤 형벌을 내렸는지, 그런 것들을 일일이 설명했다.
“가져.”
그는 진심이었다. 율리아는 블라이스가 이 반지들을 정말로 자신에게 선물하려고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당신의 전리품을 왜 나한테 주죠?”
“좋아하는 여자에게 제일 좋은 사냥감을 갖다 주고 싶은 건 모든 사냥꾼의 낭만이니까.”
“낭만이 아니라 본능이겠죠.”
도대체 어떻게 하면 자신이 한 말 중에서 ‘좋아하는 여자’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부분을 지적하는 거냐며, 블라이스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이 아닌 걸 아니까요. 저는 그런 식의 농담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네가 좋아, 율리아.”
“데네브라 황비께서 서운해하시겠네요.”
율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녀가 데네브라 황비를 입에 올리자, 블라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가 천천히 풀어졌다.
“레위시아 왕자는 고백했어? 그 왕자는 너무 소심해서 이것저것 고려하느라 영원히 고백 못 할 것 같던데.”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율리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블라이스의 방식은 익숙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였다. 과거 귀족들의 사생활을 파헤치며 정보를 사고팔았던 그녀는 이런 식의 화법이 지긋지긋했다.
“그럼 우리 카루스 님은 어때.”
“백작님.”
“그 남자는 말이야. 데네브라 님이 하룻밤 연애의 대가로 작위와 영지, 3천 명의 노예와 군마를 준다고 해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어. 바이칸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무희들을 연회장에 꽃잎처럼 뿌려 놓고 술을 먹여도 늘 똑같은 얼굴이었지.”
블라이스는 그때 카루스가 인간이 아니거나, 남자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율리아는 이번에도 똑같은 반응이었다.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그럼 내가 상관할 일을 만들어 줘.”
율리아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꼭 맛있게 식사하는 사람을 자꾸 귀찮게 해서 더 안 먹겠다고 말하는 듯한 몸짓이라, 블라이스가 양손을 들고 몸을 뒤로 물렸다.
“알았으니까 반지나 골라. 다 가져도 되고.”
율리아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블라이스를 경계하고 있지만, 그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막는 건 카루스의 역할이었고, 율리아는 그를 누구보다 신뢰했다. 아마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블라이스를 조종해서 그가 조금 더 가치 있는 사냥감을 가져오도록 해 보는 건 어떨까.
율리아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독으로 가득 채운 늪을 연상케 하는 눈빛이었다.
카루스는 그녀의 과거에 대해 잘 모른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렇게 신사적인 태도로 그녀를 위해 주는 것이다.
레위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왕자의 눈에 비친 율리아는 가엾은 평민 시녀이며, 그와 우정을 나누는 조력자일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율리아 아르테는 저주받았다. 어쩌면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였을지도 모른다.
“저는 남의 전리품을 가지고 으스대는 비겁자가 아니에요.”
율리아가 4개의 반지를 차례대로 집어 들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악기를 다루듯 우아하게 움직였다.
블라이스의 얼굴에 약간의 기쁨과 또 그만큼의 실망이 차올랐다. 그는 율리아가 말로는 싫다고 하면서 반지를 가져갈 거라고 믿었다.
그녀의 소원은 복수였고, 그건 실현 가능성이 작았다. 그러니 블라이스가 해방군을 움직여 마조람을 상처 입히면 속으로라도 기뻐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율리아는 그 4개의 반지를 블라이스의 술잔에 버렸다.
붉은 포도주가 반쯤 담긴 유리잔이었다. 율리아는 블라이스를 놀리는 것처럼 반지를 하나씩 차례대로 술잔에 빠뜨리고, 냅킨으로 손을 닦았다.
마치 너 따위가 가져온 걸 손에 쥐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