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율리아는 카루스와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왕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데려다주마.”
“네? 괜찮아요. 당장 내일 출정하신다면서요. 사령관을 이렇게 늦게까지 붙잡고 있을 수는 없어요.”
“작전이랄 것도 없는 일이야.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카루스 님, 남부 해적은 그리 만만한 적이 아니에요. 드추바 인근엔 해류도 복잡하고…….”
“난 바다 위에서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어.”
카루스가 훌쩍 마차에 오르더니 안에서 손을 내밀었다. 율리아는 어쩔 수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녀를 배웅하던 바바슬로프가 ‘내가 데려다주려고 했는데.’라고 말하자, 맥스웰이 그 곁에서 ‘나도.’라고 중얼거렸다.
“무사히 다녀오세요.”
율리아가 두 사람에게 당부하는 것과 동시에 마차가 출발했다. 그녀는 창문에 머리를 내밀고 조금씩 멀어지는 바바슬로프와 맥스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전쟁터라도 나가는 줄 알겠군.”
아련하게 손까지 흔들어 주는 율리아를 보며, 카루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율리아는 멋쩍은 얼굴로 제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전쟁터랑 다를 게 뭐가 있어요.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건데.”
“그 말, 내 부하들한테 가서 해 봐. 자존심 상한다고 코로 불을 토할 수도 있어.”
“아까부터 왜 자꾸 코로 뭘 토해요?”
“입으로 하면 더럽잖아.”
율리아도 그제야 웃음을 되찾았다. 그녀는 카루스의 말도 안 되는 농담이 자신의 불안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카루스 님이 이렇게 배려심 많은 사람이라는 걸 바바슬로프도 알아야 할 텐데.”
“뭐 하러. 그놈은 내 기사단의 돌연변이야. 전쟁터를 그렇게 돌아다녀도 변하지 않는 놈은 처음 봤어. 오죽하면 늙은 기사들이 내 옆에 붙여 놓고…….”
거기까지 말하던 카루스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 기분이었나.”
“뭐가요?”
“산맥 갈림길에서 널 만났을 때, 다른 기사들도 많았는데 왜 하필 바바슬로프를 붙였는지 생각해 봤어?”
“절 감시하려고.”
“늙은 기사들이 내 옆에 굳이 바바슬로프를 붙여 둔 것과 비슷한 이유라고 해 두자.”
율리아가 말없이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카루스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마차 안은 어두웠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손가락으로 그릴 수도 있었다.
카루스가 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요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유혹이었다. 율리아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이 한 마디만 겹쳐지도록 살짝 얹어놓고, 스치듯이 쓸었다.
“잡으려면 잡고, 아님 무시해.”
카루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율리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멀어지면 그만큼 따라오고,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살짝 힘주어 잡았다.
그를 바라보던 율리아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러다 제가 카루스 님을 좋아하게 되면 어쩌시려고요.”
농담인데, 그가 웃지 않았다.
“……네?”
카루스의 얼굴에 여유가 사라졌다. 마차를 가득 채우던 부드러운 공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숨 막히는 긴장감만 남았다.
율리아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했다. 그의 눈이 하염없이 검었다.
* * *
왕자궁으로 돌아온 율리아는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맥스웰이 가져온 정보를 모두와 공유했다.
알렉사는 ‘미친놈이 미친 짓을 잘해서 우리에게 이득이 되니까 몰래 응원하죠.’라고 말했고, 레위시아는 응원이 무슨 소용이냐며 몰래 도와주자고 말했다.
코코는 아버지인 힌치 백작을 만나기 위해 상인연합으로 갔다. 해방군이 가져올 어음을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해방군도 활동 자금이 있어야 일을 벌일 테니, 만에 하나 꼼꼼한 힌치 백작이 어음의 출처를 물고 늘어지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다행히 힌치 백작은 코코의 이야기를 듣곤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다는 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라며 기뻐했다.
이후 그는 해방군이 몰래 들인 어음을 적당한 양의 금화로 바꾸면서 동시에 상당한 양의 수수료를 챙겼다. 여우 같은 일 처리였다.
그렇게 또 며칠의 시간이 흘러, 제국군 남부 함대가 드추바 섬 앞에서 해적과 첫 전투를 벌이는 날이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바다에 쏠려 있었다. 평민이건 귀족이건 똑같았다.
한데 평화롭게만 보이던 뭍에서 의외의 사건이 터졌다. 같은 날이었다. 모든 이의 관심이 바다에 집중된 사이, 해방군이 폭동을 일으켰다.
“싹 다 불태워라!”
기름을 먹인 불화살이 하늘을 날았다. 해방군이 목표로 삼은 곳은 마조람 후작의 방계 일족이 운영하는 밀수업자 길드였다. 오르테가는 해상 무역이 발달한 나라여서, 그만큼 밀수품도 많았다.
거대한 창고에 수십 발의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미리 심어 둔 기름통에 불이 붙으면서, 불은 삽시간에 창고 안쪽까지 번졌다.
“우리는 오르테가의 심장이다! 친제국파의 검은돈을 불태우고 왕국을 구하자! 나를 따라라!”
누군가 엄청난 크기의 성량으로 외쳤다. 많은 사람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해방군은 그의 수신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블라이스였다.
“전부 태워 버려! 남부에서 황제의 개들을 쫓아내자!”
“와아아아!”
“저놈들 뭐야? 해방군인가? 이봐! 치안대를 불러, 어서!”
“으아아악!”
해방군의 의욕을 고취하는 블라이스의 선동적인 외침과 치안대를 찾는 밀수업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불붙은 옷을 벗어 던지며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자들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저놈들 해방군이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 여기가 감히 어딘 줄 알고!”
밀수업자들이 뒤늦게나마 무기를 들었다. 운 나쁜 해방군이 여기저기에서 피를 뿌리고 있었다.
“다 죽여 버려!”
블라이스는 양손에 칼을 들고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며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두건을 쓰긴 했지만, 해방군은 모두 그가 블라이스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르테가 사람도 아니면서, 이미 멸망한 북부의 왕국을 재건하고자 희망을 찾기 위해 남부로 왔다는 남자.
그가 그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이쪽이다!”
해방군이 블라이스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날 해방군은 마조람 후작의 가신들이 운영하는 은밀한 사업장을 네 군데 습격했다. 심지어 그것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부상자가 많아 여기까지인가 싶었을 때, 블라이스가 제국에서부터 그와 뜻이 같았다는 동료를 잔뜩 데리고 왔다.
그들은 모두 북부 왕국 출신이라고 했다. 고향이 없어진 자들이란 뜻이었다.
해방군은 몇 번의 습격으로 지칠 대로 지친 뒤였다. 그러나 한껏 달아오른 심장은 식을 줄을 몰랐다.
“놈들이 가장 방심했을 때가 우리에겐 가장 유리할 때다. 나는 이대로 놈들의 저택을 칠 생각이야. 누가 나와 함께하겠나!”
블라이스가 피를 토하며 외친 말에 손들지 않는 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