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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127/319)

113화

바바슬로프는 감동했다.

율리아가 한 주먹이 조금 넘는 조개껍데기를 내밀자, 조끼가 찢어지도록 주머니를 벌려서 그 안에 담았다. 그러곤 어항으로 달려가 하나씩 신중하게 자리 배치를 하기 시작했다.

율리아가 카루스를 슬쩍 쳐다보았다. 반은 그가 주운 것인데, 바바슬로프에게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카루스가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마. 저 자식이 고맙다고 인사하면 기분 나쁠 것 같으니까.”

“바바슬로프도 카루스 님이 주워 줬다고 하면 기분 나빠할까요?”

“당연하지.”

아마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며 갖다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면서, 카루스가 살벌하게 웃었다.

율리아가 그의 곁에서 벗어나 바바슬로프에게 다가갔다.

“열대어는 어디서 잡을 건데요?”

“어딘가엔 있겠지? 이제 곧 출정이라던데, 어딘가에서 운명처럼 만날지도 모르잖아.”

“키워 본 적 있어요?”

“사실은…… 그냥 물만 채워 놔도 괜찮을 것 같지 않냐. 빨간 물고기가 예쁠까, 파란 물고기가 예쁠까 상상만 해도 좋잖아. 이놈의 관저는 너무 삭막해서 내 솜털 같은 감수성이 죽는다고.”

“바바슬로프가 이렇게 낭만적인 사람이란 걸 다들 알아줘야 할 텐데.”

“복덩이 네가 알아주니까 됐어.”

바바슬로프가 히죽거리며 웃더니 율리아가 주워 온 푸르스름한 돌을 어항 한쪽에 고이 내려놓았다. 이제 이 돌을 율리아라고 부르겠다는 그의 말에, 카루스가 ‘가관이군.’이라고 중얼거렸다.

함께 식사하고 가라는 바바슬로프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율리아가 카루스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바바슬로프, 너는 기사들과 함께 먹어라.”

“싫습니다.”

“내 기사가 언제부터 이렇게 상관의 명령을 개 짖는 소리로 알게 되었지?”

“그게 아니라…… 그럼 율리아는 제가 데려갈까요?”

“왜?”

“저랑 식사하려고 남은 거잖습니까.”

카루스가 얼굴을 구기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모든 게 남의 일인 양 담담한 얼굴로 음식의 양을 가늠했다. 그러곤 냉정하게 말했다.

“3인분이에요. 남기지 않으려면 셋이 먹어야 해요.”

바바슬로프가 율리아 옆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카루스 님, 이제 한동안 오르테가에 머물러야 할 텐데 관저를 새로 꾸미는 건 어떻습니까? 칠도 새로 하고, 담장만도 못한 성벽도 다시 세우고.”

“관저는 됐어. 기지 보수가 더 시급해. 전임 사령관은 도대체 그동안 뭐 하고 살았던 건지 모르겠군. 군함에 기지까지…….”

“그 자식은 애인 만나러 다니느라 배에 거의 오르지도 않았다고 하던데요. 참! 맥스웰이 그러던데, 교수형이었답니다.”

“교수형이라고?”

“예, 재판이니 할 것도 없이 그냥 죽여 버렸대요. 군법으로 처리한다면서.”

“그래도 꽤 고위 귀족일 텐데?”

“그 자식 가문에서 항의를 좀 했던 모양입니다. 일개 병사도 아니고 이러는 법이 어디 있느냐면서. 한데…… 우리 황제께서 그런 걸 귀담아듣는 분은 또 아니니까요.”

어쩌면 증거가 부족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카루스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율리아를 바라보자, 그녀도 같은 의견이었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바바슬로프가 달콤한 과일을 율리아에게 밀어 주며 카루스에게 물었다.

“드추바 섬이라고 하셨죠? 출정은 며칠 뒤입니까?”

“내일 바로 출발할 거다.”

“해적이랑은 오랜만에 싸워 보네요. 제국에선 해적 보기가 어려워서.”

그는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

그들이 바이칸에 있을 때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리바이어던 함대와 함께였다. 무혈 제독과 리바이어던 함대가 바다를 점령한 뒤에는 감히 해적 세력이 날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해적 놈들이 멸종할 때까지 몰아붙일까요?”

“아니.”

카루스가 눈짓으로 율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적당히 겁만 줘서 쫓아낸다. 율리아가 말하길 남부 해적만큼 이용하기 편한 이웃이 없다고 하니까.”

“돈 주고 부리는 깡패 같은 건가.”

“비슷해요.”

율리아는 해적을 다 죽여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바바슬로프는 이제 이유 같은 건 묻지도 않았다. 그냥 율리아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세 사람이 식사를 마쳐갈 무렵, 맥스웰이 관저에 도착했다.

그는 지저분한 행색이었다. 여기저기서 하는 일이 많은 줄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차림새는 깔끔한 편이었는데. 놀란 율리아가 벌떡 일어나 그를 살폈다.

“어디 다쳤어요? 무슨 일이에요?”

“예? 아, 이거는…… 별거 아닙니다. 잠복을 좀 길게 했더니 안 씻어서 그래요. 근데 시녀님,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무슨 일 있어요?”

“블라이스 백작이 돌아 버렸습니다.”

맥스웰의 얼굴이 이상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그는 율리아와 카루스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놈이 해방군에 들어갔어요.”

블라이스 백작은 마조람 후작이 해방군 간부들을 참살한 이후, 그 정보를 매개체로 해방군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해방군도 처음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마조람 후작이 간부들의 시신을 어디에 버렸는지 알려 주고 손수 장례까지 치러 준 뒤에는 조금씩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은 모두 그들의 동지였고, 대장이었으며, 믿었던 친우였다.

블라이스 백작은 죽은 자들이 마조람 후작에게서 검은돈을 받아 전달했던 배신자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해방군의 분노를 부추기려면 그들을 순교자인 양 포장하는 게 좋았다.

“이 시신을 좀 봐. 무덤조차 만들지 못하도록…… 이 얼마나 잔악한 놈이냔 말이야. 가족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돌아갈 몸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얼마나 미친 비극인지 알아야 한다고!”

블라이스가 화를 내고 있었다. 그는 며칠 새 핼쑥해진 얼굴에 쩍쩍 갈라져 쉰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는 왜 화를 내지 않는 거야. 이제 너무 지쳤나? 마조람 후작이 무서워서, 더는 싸우지 않기로 했어? 그런 거냐!”

“닥치시오, 백작!”

젊은 해방군 하나가 블라이스의 멱살을 잡았다. 그들은 제국의 귀족인 블라이스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내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했다.

블라이스는 멱살을 잡히고도 화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바이칸의 귀족인 주제에 참견하지 말라고 하고 싶겠지. 나도 알아. 그런데 그거 알아? 아냐고! 이 버러지만도 못한 남부 촌뜨기들아! 우리 왕국은…… 여기 같았어! 내 고향은 설원 위에 핀 꽃처럼 아름다웠다고! 결국엔 시체의 산으로 변해 버렸지만!”

블라이스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 죽었어! 내 친구, 동료, 가족……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전부!”

좁은 창고 안에 그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했다. 동료의 시신을 앞에 둔 해방군들도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닥쳐라, 블라이스. 네놈이 오르테가를 좀먹는 기생충이란 걸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라고?”

“황비의 개가 되어 살았던 주제에…….”

“이 새끼들아! 내가 왜 그러고 살았는데!”

블라이스가 온몸으로 화를 냈다. 그는 차고 있던 무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뒤, 두 손으로 셔츠를 찢었다. 등불 아래 그의 맨몸이 드러났다.

해방군이 숨을 죽였다. 그들은 블라이스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성한 부분보다 흉터가 더 많았다. 그의 심장 위에 그려진 문신은 어떤 여인의 나신이었다. 그 아래엔 화상 자국이 있었다. 아름답지만 끔찍했다.

“아무리 빌고, 울고, 애원해도 소용없어. 황비는 마취제를 주지 않아. 나는 이걸 늘 맨 정신으로 버텨야 했다고. 그래도…… 그래도 버텼어. 끝까지! 황비가 날 신뢰하고, 내가 그 여자의 측근이 될 때까지! 개처럼 엎드려서 발가락을 입에 물고 끙끙 앓았지! 왜! 왜 그랬는지 알아?”

“미친…….”

“그래야 우리 왕국의 독립을 꿈꿀 수 있었으니까-!”

블라이스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격정적인 연설과 뜨거운 눈물, 그가 겪어야만 했던 비극이 해방군의 마음에 닿았다.

“북부는 망가졌어. 내가 데네브라의 곁에서 기생충처럼 사는 동안…… 손쓸 수 없이 망가졌다고. 이제 내겐 기회조차 남지 않았어. 난 그동안 아무 가치 없는 쓰레기 짓을 해 왔던 거지.”

하지만 너희는 다르다. 블라이스가 말했다.

“오르테가엔 아직 기회가 있잖아. 해방군이 있잖아! 너희로는 부족해, 부족한데…….”

방법은 있을 것이다. 찾으면 된다. 부족한 힘을 기르고, 동지를 모으자. 왕국을 좀먹는 간악한 귀족 놈들에게 해방군 전사들의 저력을 보여 주자.

이곳이 누구의 것도 아닌 오르테가 백성들의 땅임을 알려 주자.

불안하게 떨리던 블라이스의 목소리에 단단한 힘이 실렸다. 그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고 테이블 위에 놓인 칼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그 칼끝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를 듯 가리키며 외쳤다.

“너희들은 남부의 저력이야. 심장이다! 아직도 그걸 모르겠어? 저 마조람 후작의 세력을 상대로 싸울 만큼 용기 있는 전사가 이 땅에 누가 있어! 너희뿐이란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야.”

해방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처참하게 살해당한 동료들의 시신을 앞에 두고 보니 장례마저 숨어 지내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더욱 화가 났다.

한 해방군 전사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겁쟁이 국왕은 왕궁에 처박혀 애첩의 치마폭에나 싸여 있고, 귀족들은 왕족 애새끼들을 앞세워 후계 싸움이나 처하고 있잖아!”

“우리가 오르테가의 심장이다!”

“우리는 1왕자를 죽이지 않았어! 우리는 억울한 희생자다!”

해방군이 들썩거렸다. 블라이스는 울컥한 얼굴로 그들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언젠가…… 북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저 먼 남쪽에선 너희 같은 자들이 있어서, 바이칸의 폭압에 맞서 용맹하게 싸웠다고.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고.”

블라이스가 흉터투성이인 손을 내밀었다.

“내게 희망을 보여 주겠나?”

해방군이 그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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