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툭. 율리아의 구두가 모래 위에 떨어졌다.
“넌 죽지 않아.”
카루스의 말이 귓바퀴에 내려앉았다. 어릴 적 소라를 귀에 대고 느끼던 바닷소리처럼, 습기를 머금은 먼바다의 숨소리. 그의 목소리가 율리아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널 잊지 않을 거다.”
그가 자신을 위로하려 하는 말이라는 걸 안다. 뻔하디뻔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틀에 박힌 위로.
잘될 거야. 힘을 내라. 널 염려하고 있어. 그런 말들이 때로는 더 깊은 상처가 되기도 했다. 잘되지 않을 걸 아니까, 더는 힘 낼 수가 없으니까, 염려한다면서 결국엔 날 잊을 거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카루스가 그렇게 말을 해 놓고 저 스스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율리아는 기묘하게 위로받았다.
“네가 다시 시작하는 일이 없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하겠다. 카루스가 율리아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 어느 한구석에도 바람이 스며들지 않게 두 팔과 가슴으로 꽉 붙들었다.
율리아는 그 안에서 슬픔으로 위로받았다.
아, 나는 불쌍하구나. 이 사람, 내가 불쌍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구나. 무혈 제독이라 불릴 만큼 냉철하고 대단한 남자가 나를 품에 안고 어떻게 어르고 달래야 할지 몰라 당황할 정도로 내가 불쌍하구나.
그래서 물어보았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서.
“제가 죽지 않을 거란 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알아.”
“다시 시작해도 날 기억할 거예요?”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율리아가 가슴으로 웃었다. 메마른 바람이 가슴에서 빠져나와 입으로, 코로 흘러나왔다. 웃을 때마다 제 가슴을 긁어 상처를 만들던 바람이었다.
그 비웃음 섞인 한숨에도 카루스는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고 다시 말했다.
“널 죽게 놔두지 않아.”
그의 말은 율리아의 귀에 꼭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다시 시작하게 되면 그때도 또 그녀를 살릴 남자라서, 죽게 놔두지 않고 매번 계속 살릴 거라서,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로 들렸다.
화를 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됐다. 바닷바람과 뜨거운 햇살, 파도 소리까지 다 막아 버린 카루스 때문이었다. 그의 품은 너무 뜨겁고 단단해서 다른 걸 느낄 새가 없었다.
그 안엔 그냥 율리아뿐이었다.
변덕스레 들끓던 분노가 축 가라앉았다. 율리아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카루스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넓은 가슴은 딱딱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차가운 제복이었다. 얼굴에 닿은 모든 것이 서늘하기만 한데,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훅 열기가 솟아올랐다.
날씨가 더운 탓일 거야. 그의 체온이 높은 탓일 거야. 율리아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뺨에 오른 열기를 감추었다.
“저는 복수할 거예요. 마조람 후작의 세력을 낱낱이, 하나하나 쓰러뜨릴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는 그가 텅 빈 성에 혼자 남아 고독하게 무너지는 걸 지켜볼 거예요.”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저 혼자 절망 속에 죽어 가도록 만들 것이다.
“그래야 이 저주가 풀릴 것 같아서 그래요. 마조람 후작 때문에 죽으면서 시작되었으니까. 그를 죽여야만 끝날 것 같아서.”
“너는 자격이 있어.”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고, 신의 시선으로 보면 나 역시 한낱 살인자에 불과할 거라며, 율리아가 웃었다.
“어쩌면 사람 사는 이 세상이 지옥인 게 아닐까요? 우리는 여기가 지옥인 줄도 모르고 한 줄기 희망에 기대어 헛된 꿈을 반복하는 거죠.”
“그럼 난 살인자의 친구가 되어야겠지.”
사람 죽인 거로 지옥에 간다면 가장 밑바닥으로 끌려갈 인간은 자신일 거라며, 카루스가 웃었다. 어쩌면 거기서도 황제와 자신은 우열을 가리겠다며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율리아가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그럼 전 지옥까지 따라가서 그 싸움에서 카루스 님이 황제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와야겠네요.”
“그래, 그러니까 어설프게 나쁜 척하지 말고 제대로 싸워.”
“제가 과거에 무슨 짓을 하고 살았는지도 모르시면서.”
“어디 한번 보여 줘 봐.”
허수아비처럼 뻣뻣하게 안겨 있던 그녀가 천천히 몸의 긴장을 풀었다. 경직되어 있던 어깨가 서서히 내려앉고, 가슴이 느리고 크게 오르내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는 늘 다음 삶을 위해 살았는데, 카루스 님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계시네요.”
율리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그와 닿아 있던 곳의 온기가 금세 사그라들었다. 뺨에서 느껴지던 아지랑이 같던 열기도 바닷바람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카루스가 팔을 내리고, 손가락을 말아쥐었다. 뜨겁게 타오르던 그의 눈빛이 그녀가 물러나 생긴 공간만큼 차가워졌다.
“어떡하죠.”
“뭐가.”
“벌써 죽기가 싫어졌어요.”
이렇게 빨리 마음이 물러진 적이 없는데. 율리아가 말했다.
“코코가 잔소리하는 게 좋아요. 알렉사가 절 지켜 주는 게 좋아요. 레위시아 님이 제게 의지하는 게 좋아요. 카루스 님이…… 제 편인 게 좋아요.”
카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울대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꺼내 놓을 수 없는 무언가를, 그는 꿀꺽 삼키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번에 실패하면 저는 아마 미쳐 있을 거예요. 다음번의 카루스 님은 눈보라 속에 갇혀 죽어 가던 미친 여자를 구하게 되겠죠.”
그래도 상관없다. 율리아는 마음을 굳혔다.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 볼래요.”
“율리아.”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멀리 하늘 높은 곳에서 흰 새가 날았다. 율리아의 시선이 새를 따라 움직였다. 하얗게 밀려드는 파도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물거품.
율리아는 멈춰 있던 걸음을 옮겼다.
모래사장 위에 작은 구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카루스가 허리를 숙여 율리아의 구두를 집어 들었다.
“이리 주세요.”
“됐으니까 이거나 주워.”
구두를 달라고 했더니, 그가 됐다고 말하며 구두 대신 작고 하얀 조개껍데기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모래사장엔 그런 조개껍데기가 아주 많았다. 잘 찾아보면 성한 것도 많을 텐데, 카루스가 준 건 마모되어 찌그러지고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건 왜…….”
“바바슬로프가 좋아해. 멀쩡한 건 내버려 두고, 부드럽게 깎인 것들만 줍더군.”
“왜요?”
“열대어를 기르겠대. 어항에 넣는다나.”
날카로운 건 물고기를 다치게 할 수 있으니까.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그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다가 허리를 숙여 조개껍데기를 하나 줍고, 또 몇 걸음 걷다가 하나 줍고. 그러다 멀쩡한 걸 주우면 다시 내려놓았다.
율리아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넓은 모래사장에 우뚝 선 카루스 란케아는 무혈 제독이란 별명에 걸맞게 강인하고 차가워 보였다.
하지만 뒷짐을 지고 있는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이리저리 매만져지고 있는 하얀 조개껍데기를 보는 순간, 어쩐지 그게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모래에 카루스의 커다란 발자국이 남았다. 신발 모양이 그대로 남진 않았으나, 움푹 파여 부드럽게 들어간 자국이 남았다.
율리아는 그 위를 따라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그러다 카루스가 마음에 드는 조개껍데기를 발견해서 걸음을 멈추면, 그를 따라 멈춰선 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주워야 하는데요?”
“나도 몰라. 대충 한 주먹 주워다 주면 좋아하겠지.”
율리아의 시선이 카루스의 손끝을 떠나 모래사장을 훑었다. 하얀 모래 속에 파묻힌 조개들은 각양각색으로 예뻤다.
문득 어릴 때 생각이 났다. 보육원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쓰는 놀이를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배가 빨리 고파지기 때문이었다.
놀잇감도 없고 먹을 것도 없던 시절, 어린 율리아는 가까운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만들며 놀곤 했다.
다른 아이들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모래를 쌓고 조개를 주워 거기에 모았다.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였다. 한데 율리아는 언제나 바닷물과 가까운 곳에 성을 쌓았다.
파도가 밀려와 모래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좋았다. 그래야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으니까. 보육원에 맡겨질 때도, 보육원을 떠날 때도 늘 똑같았다. 미련이 많을수록 상처가 깊었다.
“바바슬로프가 물고기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요.”
“작은 건 다 좋아해.”
“무기는 큰 걸 좋아하던데…….”
“센 척하려고 그러는 거지.”
율리아도 카루스를 따라 모래사장을 훑었다. 예쁘고 동글동글한 게 보이면 얼른 다가가 주웠다.
처음엔 카루스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걷던 그녀가 어느 순간 그의 그림자를 벗어나 모래사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카루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율리아의 치마가 종처럼 부풀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하얀 얼굴에 달라붙어 자꾸만 손가락으로 떼게 되었다. 그녀는 발가락 사이에 모래가 잔뜩 끼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으로 다가가 바닷물에 발을 씻었다.
“씻는다고 안 달라붙진 않을 텐데.”
“그래도 시원하잖아요.”
율리아는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겠다고 했다.
원하던 대답을 들었는데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가 그 뒤에 숨어 있는 그녀의 결심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실패하면 다시는 새로 살지 않겠다는 말. 그건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되풀이할망정 삶에 미련을 갖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다시 시작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맹세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는 그 맹세를 반드시 지킬 생각이었다.
“이것 보세요. 바바슬로프가 좋아할까요?”
율리아가 다가와 반질반질하고 푸르스름한 돌을 내밀었다. 카루스는 일부러 심드렁한 투로 대답했다.
“나도 몰라.”
한 주먹만 주워다 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