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레위시아는 샤트린이 앉아 있는 곳과 정반대에 있는 곳으로 걸었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고, 움직임에도 막힘이 없었다.
두 사람이 갈라섰다.
귀족들이 숨을 죽이며 눈치를 살폈다. 레위시아는 여유로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의자에 앉았다. 샤트린은 그런 레위시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번 경연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좋은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국왕께서 드추바 섬의 토착민 문제를 해결하실 때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왕족뿐만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엄청난 기회였다. 그들이 제출한 방안을 국왕과 대신들이 검토한 뒤 실제로 적용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경연에 참석한 젊은 귀족 중에는 가문에서도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경연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거나 파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돌파구였다.
왕의 보좌관이 무표정한 얼굴로 경연장 가운데 나와 섰다.
“그럼 경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샤트린은 제국군 남부 함대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루스 란케아가 함대를 이끌고 드추바 앞바다에 나타나기만 해도 해적들은 전력을 다해 달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효과적이면서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배타적인 토착민들을 공포로 다스리면서, 오르테가 병사들의 피를 흘리지 않을 거란 점에서도 이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드추바 섬은 바이칸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질 게 자명했다.
레위시아는 어렵고 복잡한 방법을 제안했다.
“남부 해상엔 왕국에 호의적인 섬사람들이 있어. 하지만 그곳은 과포화 상태라 모든 게 부족해. 그들은 늘 변덕스러운 바다 날씨에 휘둘리며 굶주림과 싸우지.”
“그들이 어떻다는 겁니까?”
“드추바 섬에 이주시키자는 거야.”
레위시아의 계획은 아주 섬세했다. 그리고 시일이 오래 걸렸다.
“제국군을 보내 해적을 내쫓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선 오랫동안 우리 왕국을 배척해 온 토착민을 유화시켜 흡수할 수 없어. 해적은 우리 병사들이 내쫓아야 한다.”
“희생자가 나올 겁니다!”
샤트린의 파벌에 속한 한 귀족이 큰 소리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레위시아가 그를 노려보며 되물었다.
“그럼 그대는 해적 따위가 무섭다고 제국군에게 우리 왕국의 국경을 전부 맡길 셈인가?”
“그건…… 바이칸 제국은 우리 동맹국입니다.”
“황제도 그렇게 생각할까? 우리가 그의 동등한 친구라고? 배가 고프면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는 먹잇감이 아니라?”
귀족이 입을 다물었다. 레위시아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샤트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행히 드추바 섬은 배타적인 토착민들 덕에 전혀 개발되지 않았어. 이주민들에겐 좋은 정착지가 될 거야. 정착민들은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고, 우리에겐 믿음직스러운 병력이 생기겠지.”
“이상적이네.”
샤트린이 웃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걸려. 20년? 30년? 그동안 죽어 나가는 건 우리 병사들과 가엾은 정착민들일 거고.”
“왕족이라면 무릇 100년 뒤를 내다봐야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이번 경연의 승자를 정하는 건 함께 토론한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샤트린과 레위시아의 안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는 실제 국왕이 정무 회의 때 대신들과 함께 일하는 방식이었다.
왕의 보좌관이 경연에 참석한 귀족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샤트린 전하의 안건에 찬성하시는 분, 손을 들어 주십시오.”
“레위시아 전하의 안건에 찬성하시는 분, 손을 들어 주십시오.”
레위시아는 샤트린을 꼭 이길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율리아도, 코코도 같은 생각이었다. 레위시아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그가 반제국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승패 따위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레위시아 전하가…….”
아주 근소한 차이로 레위시아가 경연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모두가 놀란 결과였다. 레위시아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샤트린과 귀족들, 왕의 보좌관까지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잊었다.
“왕께는…… 레위시아 전하께서 승리하셨다고 보고하겠습니다.”
충격으로 얼어붙은 경연장 구석에서 알렉사가 율리아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왜 다들 얼어붙어 있습니까?”
“젊은 귀족들이 바이칸 제국에 가지고 있는 반감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에요.”
그게 바로 혈기라는 것이죠. 율리아가 중얼거렸다.
* * *
국왕은 샤트린의 방법을 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게 돈이 덜 들기 때문이었다.
레위시아의 방식은 긴 시간 동안 정착민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 줘야 한다는 점에서 경제적이지 않다며, 정무 회의에서 폐기되었다.
“난 드추바 섬을 요구할 거다.”
카루스는 웃고 있었다. 미소라고 하기엔 너무 사나워 보였지만, 어쨌든 웃고 있긴 했다.
율리아가 물었다.
“주둔지를 만드시게요?”
“그래. 섬을 통째로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주둔지 정도는 되어야 수지가 맞지. 드추바는 남부를 아우르는 거대 항로의 숨은 교차로야. 이번 기회에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나야 대환영이지.”
레위시아에게 말하진 않았으나, 율리아는 이번 경연도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국왕이 마조람 후작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해도, 그는 기본적으로 친제국파였다. 혈기를 앞세워 독립을 꿈꾸는 젊은 귀족들의 의견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어쨌든 덕분에 카루스 님께서 남부 해상의 서쪽 경계까지 통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 궁극적으로는 이득이에요.”
“그 애송이 왕자도 알고 있어?”
“코코가 설명해 주겠죠.”
코코라. 카루스는 며칠 전 그의 기지에 쳐들어와 율리아의 비밀을 토해 내라고 협박하던 여자를 떠올렸다.
“카루스 님, 조만간 바이칸 북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거예요. 늘 반복되던 일이니까 틀림없어요. 카루스 님의 기사단이 휩쓸리지 않도록 조치하시는 게…….”
“해 뒀어.”
“네? 어떻게요?”
“코델리아 힌치가 다녀갔거든.”
카루스가 또 웃음을 흘렸다. 그는 율리아와 함께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며칠 동안 맑은 날이 이어지더니 파도까지 잠잠했다.
“코코한테 뭐라고 하셨어요?”
“네가 저주를 받았다고, 하지만 그 이상은 알려 줄 수 없다고 했지.”
“죄송해요. 제가 잘 숨겼어야 했는데.”
“코델리아 힌치에게 다 털어놓는 방법도 있어.”
“안 돼요.”
율리아의 말투가 단호했다.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걷고 있던 카루스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한 걸음만 더 걸어 나오면 모래사장이었다. 카루스는 율리아가 신고 있는 작은 구두를 응시하다가,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카루스 님!”
“발.”
그가 율리아의 발에서 구두를 벗겨 냈다. 그러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못 본 척하며 모래사장에 발을 내디뎠다.
율리아는 카루스의 손에 잡힌 채 달랑달랑 흔들리는 자신의 구두를 바라보았다.
맨발로 밟는 모래의 느낌은 아주 특별했다. 율리아는 그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코코는 저 때문에 죽었어요. 제 사형 집행일이 정해지자마자, 죽기 전에 뭐라도 하나 더 건져야 다음 생에 유리할 거 아니냐고 말하면서. 멀리 도망치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율리아, 만약 네가 삶이 반복되는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면 코델리아 힌치가 널 버리고 멀리 도망갔을 거라고 생각해?”
율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카루스는 그것 보라는 듯 피식 웃었다.
“그 여자는 그래도 끝까지 싸웠겠지.”
만난 건 짧은 순간이었으나, 카루스는 코코가 율리아를 버리고 달아날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고 해도 끝까지 투쟁했을 것이다.
“코코는…….”
“그게 그 여자의 최선은 아니었을까.”
“네?”
“상대의 심정을 헤아려 봐. 네가 만약 그 여자였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지.”
율리아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만약 자신이 코코의 입장이었다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싸우고 또 싸웠으리라.
“코코라고 했나.”
카루스가 율리아의 구두를 한 손으로 모아 잡았다. 그러곤 다른 손으로 모래 사이에 파묻힌 흰 조개를 주워들었다.
“내가 그 여자라면 서운했을 거다.”
“카루스 님.”
“네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아서.”
그럼 어쩌란 말인가. 율리아는 그의 말에 화답해 줄 수 없었다. 코코의 마음을 지레짐작하고, 멋대로 단정 짓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에게는 형벌과도 같은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율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카루스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코코를 만나고, 알렉사를 만나고, 레위시아 님을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관계가 깊어지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기는 줄 아세요?”
율리아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죽기가 싫어요.”
“율리아.”
“죽기가 싫어져요. 마음이 깊어질수록, 살고 싶어요. 내 가장 강력한 무기는 내 목숨인데, 그걸 아끼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저는 어떡해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또 죽고, 그 사람들은 결국 나를 잊어요.”
말을 하면 할수록 슬픔이 차오르더니, 분노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율리아는 자신이 그에게 크게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카루스 님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살 작정이야? 네가 지키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네가 아프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냐?”
“그럼 어떡해요? 어차피 잊을 텐데, 누구냐고 물어볼 텐데! 당신도…… 결국엔 또 똑같은 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눈으로 날 바라볼 거잖아요!”
카루스의 손에서 율리아의 구두가 툭 떨어졌다.
“왜 날 살리는 거예요? 왜! 그냥 죽게 놔두지……!”
그가 팔을 뻗어 율리아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두 팔이 긴장으로 굳은 율리아의 몸을 빈틈없이 바짝 조였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그는 강한 힘으로 그녀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