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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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경연을 재개해야 한다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1왕자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지만, 불안해진 왕가에 후계자의 존재가 절실해졌기 때문이었다.
젊은 귀족들은 왕위 후계자로 급부상한 샤트린 공주를 시험하고 싶어 했다. 공주의 상대라고 해 봤자 레위시아 왕자 한 명뿐이지만, 그래도 그녀의 실력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는 왕궁 경연이 유일했다.
국왕은 귀족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던 경연이 재개되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코코가 율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손에서 부채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다행히 경연의 주제가 미리 공개되었기에, 율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워낙 어려운 주제이다 보니…….”
“빼지 마. 벌써 다 생각해 놨으면서.”
“코코도 마찬가지잖아요.”
“흥.”
코코가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레위시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숙제 아직도 못 했어요? 머리 나쁜 애들이 꼭 이렇게 오래 고민하지. 문제라는 건요. 딱 봤을 때 정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모르는 거예요.”
레위시아는 두꺼운 책을 잔뜩 쌓아 놓은 채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율리아가 가끔 안쓰럽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럴 때마다 코코가 쓰읍 소리를 내며 눈치를 주는 바람에 도와줄 수도 없었다.
이번 경연은 아주 중요했다. 레위시아가 샤트린의 파벌에서 떨어져 나온 뒤 처음으로 치러지는 경연인 데다, 1왕자의 죽음으로 위축되어 있던 젊은 귀족들이 대거 참여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드추바 섬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라.’
국왕의 이 한마디에 경연이 시작되었다.
드추바 섬은 오르테가 남부 해상에서도 꽤 큰 섬에 속했다. 그곳엔 오래전부터 토착민들이 마을 단위로 살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해적들이 쳐들어와 그곳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고자 했다.
드추바 섬의 토착민들은 오르테가 왕국에 배타적인 편이었다. 그곳 역시 오르테가의 국토에 속했으나 그들이 폐쇄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토착민들은 끝까지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버티다가, 해적들의 약탈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뒤늦게 왕가에 사람을 보냈다.
“다 죽일 수도 없고, 다 살릴 수도 없는 문제야.”
레위시아가 중얼거렸다.
“그동안 뭐든 다 거부했잖아. 자기들끼리 알아서 살 거라고 했다면서. 해적이 돈을 주면 해적의 편을 들고, 제국군이 돈을 주면 제국군의 편을 들고.”
“그렇다고 드추바 섬을 해적의 손에 쥐여 줄 순 없잖아요.”
“알아. 그 사람들을 다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진짜 경연은 일주일 뒤였으나, 그건 발표회에 가까웠다. 레위시아와 샤트린은 일주일 동안 귀족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답을 찾아야만 했다.
“미치겠네.”
레위시아가 책 위에 머리를 박았다. 코코가 또 뭐라 잔소리를 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율리아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렸다.
알렉사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그렇게 어려운 문제입니까?”
“쉽게 해결할 수 있는데, 그러면 안 되니까 고민하시는 거예요.”
제일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아무도 죽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피를 덜 흘리는 방법을 찾고 싶으니까.
아픈 사람처럼 끙끙 앓던 레위시아가 벌떡 일어나 흰 종이를 펼쳤다. 그러곤 펜을 들고 거침없이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오르테가와 남부 해상, 그리고 제국의 남쪽 국경에 이르는 지도였다.
“여기가 드추바 섬이야.”
그가 펜으로 진하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샤트린은 제국군 남부 함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하겠지. 그게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마조람 후작의 방식이기도 하고요.”
“우리 왕국의 국경을 지키는 일에 언제까지고 제국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어. 난 반제국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해. 그들이 내 지지 기반이 될 테니까.”
레위시아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드추바 섬은 오르테가 남부 해상에 속해 있으면서 해적들의 영역에 가까웠고, 서쪽으로는 바이칸 제국의 항로로 향할 수도 있을 만큼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다.
율리아가 또 한 번 레위시아와 코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조그만 단서만 줘도 될 것 같은데, 코코가 이번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해요. 이런다고 없는 정답이 튀어나오지 않으니까요.”
코코가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는 엄한 스승이었기에, 레위시아가 이번 문제만큼은 혼자서 해결하길 바랐다.
긴 밤이 지났다. 전날 잠을 설쳤던 탓인지, 율리아는 저녁부터 아주 깊은 잠을 잤다. 그러곤 평소처럼 이른 아침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화사한 크림색의 드레스에 청록색 리본 허리띠를 매고, 어깨엔 비스듬하게 늘어지는 레이스를 둘렀다. 머리카락은 둥글둥글하게 말아 느슨하게 묶었다.
“시녀님, 오늘 아주 우아해요!”
“고마워요.”
코코의 잔소리가 좋아서 또 수수하고 칙칙한 옷을 입을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또 입지도 못할 옷을 잔뜩 선물받을 것 같았다.
햇살 쏟아지는 복도를 지난 율리아가 식당으로 향하던 때였다.
작은 응접실 안쪽에서 누군가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레위시아가 두꺼운 책을 산처럼 쌓아 두고 경연에 걸린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던 곳이었다.
‘설마 벌써 일어나셨나?’
율리아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전하?”
레위시아는 어제 그 모습 그대로였다. 테이블 위엔 오르테가의 복잡한 남부 해안선을 그린 종이가 펼쳐져 있고, 여기저기 책과 노트가 아무렇게나 굴러 다녔다.
밤을 새운 탓인지 레위시아의 얼굴이 퀭했다. 붉게 핏발선 눈을 주먹으로 비비던 그가 율리아를 발견하곤 씩 웃으며 말했다.
“준비됐어.”
“벌써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국군의 힘을 이용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은 떠오르지 않더라고. 그런데 가만 보니까…… 내가 꼭 경연에서 샤트린을 이길 필요는 없는 거잖아?”
레위시아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곤 어지럽게 그려 놓은 지도를 뿌듯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가는 중이니까.”
율리아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레위시아가 그려 놓은 지도와 그 위에 빽빽하게 적힌 메모를 들여다보곤 눈으로 살짝 웃었다.
“정답이네요.”
코코가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아마 이걸 보면 전하를 칭찬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고, 율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레위시아는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코코보다 율리아 네 칭찬이 더 듣고 싶은데.”
“네?”
“코코는 엄하지만, 결국엔 내 편을 들어 주거든. 근데 넌…… 너그럽지만 내 편은 아니란 느낌이어서.”
가까운 시녀에게조차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삶. 그게 바로 왕족 아니겠냐며, 레위시아가 율리아에게 팔을 내밀었다.
“갈까.”
“어디로요.”
“식당. 배고파.”
율리아가 레위시아의 팔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은 작은 응접실을 벗어나 식당으로 가기 위해 복도를 걸었다.
“전하, 저는 전하의 편이에요.”
“알아. 하지만 그건 다른 왕족들과 비교했을 때 마조람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절한 게 나라서 그런 거잖아.”
율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레위시아는 괜찮다는 뜻으로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만약 내가 카루스 란케아와 대립하게 된다면…….”
거기까지 말하던 레위시아가 하, 하고 짧게 웃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율리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냥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전하께서 국왕의 자리에 오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렇겠지.”
하지만 나한테 오진 않겠지. 내 곁에 남지도 않을 거고. 레위시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애타는 시선을 느낄 법도 하건만, 율리아는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따름이었다.
시간이 흘러, 경연이 치러지는 날이 되었다.
왕궁은 오랜만에 들뜬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왕궁 여기저기에서 젊은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번 경연의 주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경연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파벌이 있는 자는 무리를 자랑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무리를 비웃었다.
“샤트린 공주 전하!”
승부사의 기질을 타고나 경연에 빠진 적이 없는 샤트린은 이번에도 자신의 시녀들을 잔뜩 이끌고 나타났다.
그녀의 곁엔 본래 공주를 지지하던 가문의 자식들과 이번에 새로이 파벌에 편입된 가문의 자식, 마지막으로 마조람 후작의 왼팔이라 불리는 궁내부 대신의 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마조람 후작이…… 공주 전하한테 붙었어?”
귀족들은 혼란스러워했다. 궁내부 대신의 아들은 크리스틴이 등장하기 전까지 1왕자의 곁에서 마조람 후작을 대신해 그를 보필하던 자였다.
샤트린의 곁에 모인 자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피던 한 귀족이 물었다.
“그럼 레위시아 전하는?”
레위시아 2왕자는 분명 지난 경연에서 샤트린 공주에게 공개적으로 지지 선언을 한 바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누구 아는 사람 없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공주의 측근이 귀족들을 째려봤지만, 정작 공주는 오만한 자세로 앉아 오늘 경연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따름이었다.
레위시아는 그때 나타났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출렁였다. 부드러우면서 시원해 보이는 푸른색 슈트에 새하얀 셔츠를 입은 그는 경연장에 있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세 명의 시녀가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왕궁 시녀들 사이에서 유명한 3인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