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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123/319)

109화

21. 아무것도 모르면서

‘난…… 코코가 알아주길 바랐던 걸까.’

율리아는 새벽까지 지난밤의 일을 되새기다가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그 바람에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그녀는 며칠 동안 끊임없이 내리던 비가 그치고, 쨍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 기억해 달라고.’

하녀들이 부산스럽게 일하고 있었다. 이불과 커튼을 말리고 궁 전체를 환기해야 한다며, 여기저기서 창문을 열고 먼지 터는 소리가 들렸다.

‘멍청한 율리아.’

율리아는 그녀가 가진 것 중 제일 수수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긴 머리카락은 대충 하나로 묶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다.

그렇게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식당에서 레위시아와 함께 식사 중이던 코코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 칙칙한 드레스는 뭐야? 날씨도 화창한데, 좀 화사하고 예쁜 옷 없니? 지난번에 샤트린 공주님이 이것저것 줬잖아. 후원자는 도대체 뭐 하는 작자야? 여름이 온 지가 언제인데 여름옷을 새로 사 줘야지!”

레위시아가 포크로 닭고기를 콱 찍더니 코코의 눈앞에서 흔들며 말했다.

“그 후원자가 카루스 란케아라는 걸 알고도 그렇게 말하다니, 역시 내 시녀야.”

“그게 뭐가 어떻다고요.”

“율리아가 어떻게 그런 소릴 해? 그 무서운 남자가 드, 레, 스? 이러면서 눈썹만 꿈틀거려도 심장이 벌렁벌렁할 텐데.”

“쟤가 그럴 애예요? 하여간 사람 볼 줄을 몰라.”

“드레스는 내가 사 주면 되잖아.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오르테가에서 나보다 드레스 잘 고르는 남자는 없을걸?”

“그걸 자랑이라고 하고 앉아 있다니, 역시 우리 전하.”

코코와 레위시아는 이제 율리아는 뒷전이고 둘이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포크로 삿대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긴장으로 굳어 있던 율리아의 어깨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테이블 한쪽에 앉았다.

“시녀님, 오늘은 늦으셨네요? 식사 준비할까요?”

“네, 고마워요.”

하녀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날씨가 좋아져서 다행이라며, 율리아에게 미리 만들어 둔 수프와 샐러드, 빵과 닭고기 요리를 가져왔다.

코코는 달라진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율리아는 코코가 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드레스는 충분히 가지고 있어요.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카루스 님이 지난번에 주신 금화도 많이 남았고. 오늘은 그냥 치렁치렁한 옷이 귀찮아서 그랬어요.”

“치렁치렁한 게 귀찮으면 짧은 걸 입어. 여름엔 무릎까지 오는 것도 많이들 입잖아. 머리카락도 좀 예쁘게 다듬고! 누가 보면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겠다!”

“율리아는 정상이야. 코코가 이상한 거라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 매일 그렇게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보잖아요!”

코코가 레위시아에게 당당하게 소리쳤다. 거울 안에 내가 있지 않으냐며, 다른 사람 시선 따위 뭐가 중요하냐고 나는 내 눈에 제일 예쁘다고 말했다.

할 말을 잃은 레위시아가 왕자궁에서 거울을 없애 버린다는 협박을 하려던 찰나, 문이 열리고 알렉사가 들어왔다.

“다들 모여 계셨습니까? 제가 제시간에 왔네요.”

알렉사는 막 씻은 듯 축축한 머리카락을 대충 털어 말리고, 셔츠에 편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그녀를 보며 레위시아가 코코에게 말했다.

“율리아한테 한 것보다 정확히 세 배는 잔소리해야 할 거야. 아니면 이건 명백한 차별이니까.”

“쟨 저래도 괜찮아요.”

“왜?!”

“어울리잖아요.”

레위시아는 자기가 차별당한 것처럼 황당해했다. 휘두르던 포크까지 접시 위에 내려놓은 그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두르는 스카프나 장신구 하나까지 다 잔소리하면서 신경 썼잖아. 나한테는 왜 그랬어.”

코코가 입꼬리를 얄밉게 씰룩이며 대답했다.

“전하는 봐줄 게 얼굴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잘 꾸며야죠.”

레위시아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코코에게 단단히 토라진 척하며 왕자궁을 박차고 나갔다. 율리아는 그를 달래려 했으나 이어지는 알렉사의 한마디에 얼른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샤트린 전하가 불러서 가는 거면서…….”

1왕자가 죽은 뒤 공주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래도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장식을 좋아하는 샤트린은 이제 아예 궁 전체에 자신의 명망을 덧씌우는 중이었다.

커튼이나 화병 하나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게 없었다. 바람이 불면 차랑차랑 소리를 내는 커튼 장식이 레이스와 함께 흔들렸고, 화병엔 황금색 띠를 둘러 풍성한 매듭 장식을 달았다.

레위시아는 공주궁 응접실에 깔린 새하얀 카펫을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 말았다.

“하녀들 곡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더러워지면 새 걸 깔면 돼. 바보니?”

“아깝게…….”

“우린 왕족이야. 돈보다 품위가 우선이라고. 카펫 값이 아깝다고 화내는 왕족은 너 하나뿐일 거야.”

샤트린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새 드레스가 구겨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녀들이 다과를 가져오려 했지만 둘 다 식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절했다. 샤트린은 레위시아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한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러곤 다짜고짜 말했다.

“마조람 후작이 날 찾아왔어.”

살짝 풀려 있던 레위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샤트린은 그런 그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이내 싫증 난 듯 몸을 뒤로 물렸다.

“날 지지해 줄 거라고 말하더라.”

“샤트린.”

“처음엔 의심했거든. 나보다는 4왕자를 손에 넣는 게 훨씬 마조람 후작다운 선택인데, 왜 여기까지 왔을까.”

레위시아 때문이었다.

“힌치 백작이 널 만나고 갔다면서. 상인연합의 새 대표가 되고. 아버지가 마조람 후작한테 화가 단단히 나 있다는 건 알겠는데, 자기 사업에만 열중하던 힌치 백작이 왜 갑자기 나타났을까.”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으니까.”

“그래, 나도 알아. 능력 있는 사람인 거. 그러니까 네가 손을 내밀었겠지.”

샤트린이 레위시아를 노려보았다. 레위시아도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느 형제와 다르지 않았던 두 사람은 순식간에 타인이 되어 서로를 응시했다.

“잘 들어, 레위시아. 마조람 후작이 날 찾아왔다는 건, 그가 널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힌치 백작이 레위시아의 기반이 될 것이기에, 마조람 후작은 그를 왕궁에 기생하는 식충이가 아니라 서둘러 잘라야 할 싹으로 보게 되었다.

레위시아도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마조람 후작이 이렇게 빨리 샤트린의 파벌로 갈아탈 줄은 몰랐지만,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무슨 수를 쓸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샤트린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그냥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되었을 텐데. 굳이 자신을 공주궁에 불러 놓고 떠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레위시아가 샤트린에게 말했다.

“너 마조람 후작의 손을 잡았구나.”

샤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레위시아는 그녀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내가 마조람 후작과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면서…… 그의 손을 잡았어. 죄책감이라도 들어서 그래? 그런 거라면 걱정할 거 없어. 샤트린, 네 말대로 우린 왕족이야. 가족 간의 정보다는 권력이 우선이지.”

“너 때문이야.”

“뭐?”

“네가 힌치 백작을 데려왔으니까. 나도 널 견제하게 되잖아. 말해 봐. 내 밑에서 충성을 바칠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었지? 그러니까 오빠가 죽고 없어진 지금 세력을 키우려는 거겠지.”

나와 함께하고 싶었으면 힌치 백작이 나를 찾아오게 했어야지. 샤트린의 말이 길어질수록 레위시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도 진해졌다.

“그래서 마조람 후작의 손을 잡았다고? 샤트린, 그게 현명한 선택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 당장은 내게 이득이야.”

“그게 언제까지 갈 것 같은데? 마조람 후작은 손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멍청한 왕족을 원해.”

“나도 알아.”

샤트린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녀 역시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언젠가 가슴을 치며 후회하게 되더라도, 결국엔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삶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거야, 레위시아. 목숨이 걸린 싸움이라는 걸 모두 아는데, 미래에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고민하다가 현재를 그르칠 순 없어.”

레위시아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그는 이 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샤트린은 이미 결정을 내렸고, 그는 이제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오빠가 죽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려는 그에게, 샤트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부터 너랑 싸우게 되겠구나.”

레위시아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잘 있어, 샤트린.”

그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유 있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왕족이 됐구나, 레위시아.’

일그러져 있던 샤트린의 얼굴이 천천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만하고 도도해 보이는, 왕족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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