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코코는 관저 1층의 빈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카루스가 인사도 없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잘 들어요. 율리아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당장 말해요.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애를 다시는 못 보게 될 수도 있으니까.”
코코는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서 있었다. 바바슬로프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화를 내려고 해서, 카루스가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곤 코코와 단둘이 남게 되자 짧게 물었다.
“다시 묻지. 왕자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묻는 말에나 대답하세요.”
“난 아무것도 말해 줄 수가 없어.”
카루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코코가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베어 물었다.
“왜요. 율리아가 당신이 집어넣은 첩자라서?”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군. 내가 율리아를 너희 애송이 왕자의 궁에 첩자로 집어넣을 이유가 뭐가 있지? 오르테가의 왕위 후계 따위는 내 관심사가 아니야.”
“말 돌리지 마세요!”
“코델리아 힌치. 무례를 지적하기 전에 돌아가라.”
“그럼 그 애가 조만간 바이칸 제국 북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거란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황제도 모르는 사실 아닌가요? 황제가 그걸 알았다면 당신을 오르테가로 보내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뭐?”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해 보세요!”
의자에 앉으려던 카루스가 벌떡 일어나 코코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무섭게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반란이라니…… 바이칸 북부라고? 그게 정확히 언제지?”
“뭐야. 왜 모르는 척을…….”
카루스도, 코코도 당황한 채 서로를 보았다. 코코는 그 순간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카루스는 정말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율리아가 그렇게 말했나? 반란이 일어날 거라고?”
“패전국 연합이 반란 세력의 손을 잡고 봉기할 거라고.”
“그게 정확히 언제지?”
“몰라요. 너무 놀라서 날짜까지는 못 물어봤어요.”
“바바슬로프!”
카루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바바슬로프가 달리듯 들어와 그의 앞에 섰다. 카루스는 탁자 위에 있던 종이에 뭔가를 휘갈겨 쓰곤 바바슬로프에게 내밀었다.
“기사단 본대에 보내라.”
“알겠습니다.”
코코는 두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바슬로프가 다시 밖으로 나가고, 카루스는 그제야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계속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따끔거리기 시작한 목을 한 손으로 문지르면서, 코코가 그에게 말했다.
“율리아가 예언을 자주 했었나 보네요?”
카루스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덜컥 믿어 버리는 걸 보니까. 그렇죠? 산맥에서 처음 만났고, 율리아 덕분에 목숨을 구원받았다고 했나요? 하이에나에게 쫓기던 것도 모자라 얼어 죽어 가고 있던 그 애가, 도대체 무슨 수로 당신과 부하들의 목숨을 구했죠? 그때도 예언이었나요?”
그는 코코가 쏟아 내는 말을 막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바실리나 크리스틴 마조람이 그렇게 반응하리란 걸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성공할 수 없는 계획이었어. 1왕자의 연인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아플 때 튀김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거기까지 말하던 코코가 입을 딱 다물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아가 카루스의 끄나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앞뒤 없이 달려와 물고 늘어지긴 했는데, 사실 이 남자에겐 그럴 이유가 없었다.
카루스 란케아가 레위시아를 왕으로 만들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뭐란 말인가. 차라리 국왕이나 샤트린의 손을 잡는 편이 수월했을 텐데.
카루스 역시 머릿속이 복잡했다. 율리아의 비밀을 지켜 주고 싶지만, 이 빨강 머리 시녀는 이미 너무 비밀에 근접해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수상할 것이고, 어떤 말로 속여도 의심할 것이다.
“무례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내겐 무혈 제독의 협조보다 율리아가 더 중요해. 그러니까 말해 주세요.”
“…….”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말해 줄 수도 있었다. 코델리아 힌치는 율리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카루스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율리아가 죽을 때마다 같은 시점으로 돌아가 계속 다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한단 말인가. 실패와 고통을 반복하고, 고독에 몸부림치며 망가지고 있다는 걸.
과거를 떠올리는 것조차 너무 아파서, 아픔을 잊으려 주먹으로 가슴을 치던 그 모습.
카루스는 율리아의 그 모습이 떠올라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과거로 들어가고 싶었다. 들어가서 그녀를 대신해 싸우고 싶었다. 이제는 하다못해 그녀를 몰랐던 과거의 자신에게까지 화가 났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주에 걸려 있어.”
“뭐라고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지독한 저주에 걸려 있다. 그 대가로 우리가 모르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거야.”
“그게 무슨…….”
“덕분에 나는 목숨을 건졌고, 너희도 그만큼의 도움을 받았지.”
카루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코코의 얼굴이 밀랍처럼 하얗게 굳었다. 저주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뱃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그런 전설을 말하는 건가.
“저주라니……. 나한테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카루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걸어간 그가 한 손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때였다.
코코가 그의 등에 대고 물었다.
“당신한테 율리아는 어떤 의미죠?”
“뭐라고?”
“영리한 부하인가요? 쓸모 있는 정보원?”
코코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그의 얼굴을 강렬하게 쏘아보았다. 카루스도 그런 코코를 노려보다가, 짧게 말했다.
“그 이상.”
“그 이상?”
“나도 몰라.”
카루스가 문을 활짝 열었다. 코코는 그게 자신을 쫓아내려 그가 일부러 한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아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집요하게 물었다.
“모른다니, 그렇게 무책임한 말로 대답할 거면…….”
“내가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한계. 그 이상이라서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
그는 답을 찾고 있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가만히 서서 카루스를 바라보던 코코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카루스 란케아, 당신 설마…… 율리아를.”
“말하지 마라.”
그는 코코가 뒷말을 꺼내도록 놔두지 않았다. 새카만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사납게 웃었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고 싶지 않으니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삐딱하게 서 있던 카루스가 복도로 나가자마자 큰 소리로 바바스로프를 불렀다. 그러곤 코코를 왕궁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명령했다.
* * *
왕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코코는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조명이 없는 마차는 몹시 어두웠다. 코코는 창밖에서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거리의 불빛에 기대어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저주.’
오래된 뱃사람들은 저주나 전설,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힌치 백작은 뱃사람들의 친구였고, 매일 밤늦도록 술을 마시던 그들은 어린 코코를 놀리려고 일부러 무시무시한 옛날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그중엔 이런 것도 있었다.
아주 오래전, 낮도 밤도 없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한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해선 안 되는 사이였다. 하나는 낮에만 살았고, 하나는 밤에만 살아야 했으니까.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이 허락되지 않은 장소에서 사랑을 나누었기에, 그들은 신의 저주를 받았다.
신은 남자에게 말했다.
왼손으로 여자의 손을 잡아라. 오른손으론 칼을 잡아라. 여자의 손목을 잘라 끊는다면 여자를 살려 줄 것이고, 네 손목을 잘라 끊는다면 너를 살려 줄 것이다. 잡은 손을 놓는다면 서로를 잊게 되리라.
남자는 자신의 손목을 자르려 했으나, 여자가 그의 손을 놓았다.
무정한 신은 웃었다.
너희는 영원히 다시 살게 되리라. 서로를 잊은 채, 같은 비극을 반복하면서.
왜 이 이야기가 떠올랐는지는 몰랐다. 이건 뱃사람들이 바다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할 때 꺼내곤 하는 전설이었다. 워낙 오래된 이야기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영원히 반복되는 비극, 뱃사람들은 그걸 파도라 불렀다. 낮도 밤도 없는 생과 사의 갈림길, 그건 바다였다.
마차 안에서 생각을 거듭하던 코코가 창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곤 한 손으로 마차 벽을 두드리며 외쳤다.
“마차 돌려요! 힌치 백작가로 가 주세요!”
밖에서 말을 타고 코코를 호위하던 바바슬로프가 그녀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마부에게 마차를 돌리라고 한 번 더 말했고, 그들은 동이 틀 무렵 힌치 백작가에 도착했다.
“기다리겠습니다, 시녀님.”
“그냥 돌아가세요.”
“괜찮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여긴 우리 집이에요. 지금 날 감시하는 건가요?”
“제독께서 시녀님을 왕궁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했으니, 저는 그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코코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바바슬로프를 노려보다가 홱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 집사!”
“아가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백작님 일어나시려면 아직 멀었는데요.”
“긴한 부탁이 있어.”
집사를 부를 때는 화통하던 코코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잦아들었다. 눈치 빠른 집사가 코코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말씀하세요.”
“오래된 뱃사람들을 수소문해서 저주에 걸린 사람에 대해서 알아봐. 정말 그런 게 실존하는지, 기록이 남아 있는지. 그런 것들.”
“오래된 뱃사람이라면…… 해적들도 포함인가요?”
“당연하지.”
“구체적으로 어떤 저주요?”
“예지나 예언, 초감각적인 통찰력.”
집사는 되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입이 무거운 사람을 풀어서 알아보겠다고 했다. 코코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밖으로 나와 마차를 향해 다가왔다.
“이제 진짜 왕궁으로 가죠. 당신 상관의 명령을 이행하러.”
바바슬로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쪽 손을 내밀었다. 코코는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마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