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뭐라고요?”
기가 막혔다. 율리아는 코코가 이런 일에 얼마나 단호한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솔직하게 털어놓기만 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말을 했다.
“말해, 말하라고! 네가 무슨 예언자라도 되는 것처럼 구니까 불안해서 자꾸 이상한 생각만 하잖아. 널 완전히 믿을 수가 없어! 정체가 뭔지 빨리 말해!”
“말 못 해요.”
“이게 진짜…… 너 진짜 이럴 거야? 말하면 비밀이 새어 나가기라도 할까 봐? 우리가 너한테 그런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
“미안해요. 말 못 해요.”
“우리는 그럼 네가 그렇게 가끔 던져 주는 정보나 받아먹으면서, 끊임없이 널 의심하고 너한테 의지하고…… 그렇게 살라고?”
말 못 한다. 율리아가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코는 그런 율리아를 보다 못해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그녀의 팔을 잡고 세게 흔들었다.
“말하라니까? 용서해 줄게. 네가 우리를 이용하러 들어온 카루스 란케아의 첩자라고 해도, 한 번은 용서해 준다고 했잖아. 율리아, 날 봐. 외면하지 말고!”
아니다. 첩자라니. 율리아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코코와 알렉사만은 절대 그런 식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위험한 싸움이라는 걸 알면서도 또 코코의 곁으로 온 건, 가까이에서 그녀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아서 그랬다.
율리아가 더욱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코코가 두 손으로 율리아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러곤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너 왜 그래. 평소엔 한마디도 안 지고 말대꾸 잘만 하던 애가…… 왜 이러냐고! 누구 복장 터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코코, 나는요.
“약속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나 혼자 알고 있으면 되잖아. 레위시아 님이나 알렉사한테 해가 되는 일만 아니면……. 그러니까 그냥 나한테만 말해.”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또 들을 자신이 없어요.
“율리아! 너 진짜 이럴 거야?”
코코가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답답함에 고함치듯 한숨을 내쉰 그녀가 율리아를 더 세게 다그치려던 때였다.
“이게 진짜……!”
율리아의 눈동자에 물기가 고였다. 투명한 눈물이 순식간에 눈동자 가득 차올라, 소리도 없이 뚝뚝 떨어졌다.
코코는 말을 잃은 채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는데, 율리아는 눈동자도 제대로 깜박이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꽉 다문 입술에도 핏기가 없었다.
“너…….”
율리아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코코에게 말했다.
“내가 만약, 당신을…… 배신한다면.”
목소리가 떨려 어린애처럼 흘러나왔다. 너무 간절해서 아프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냥 날 죽여요.”
차라리 그게 낫다. 율리아는 생각했다. 지난 삶에서처럼 코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이번에는 맨정신으로 버텨 낼 자신이 없었다.
‘당신은 죽는 순간까지 내게 도움이 되려고 했어요.’
그때 율리아는 감옥에 갇혀 사형이 예정되어 있었고, 도주 중이던 코코는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다음 삶의 율리아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찾아 나섰다.
율리아는 밤마다 빌었다. 코코가 제발 멀리 달아나기를.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까지 달아나서 남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코코는 율리아의 사형 집행일 직전까지 오르테가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코델리아 힌치는 죽었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다가 죽었다. 위험한 상황에 무모하게 뛰어들어서, 율리아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 율리아는 차가운 감옥 안에서 그녀의 부고를 들었다.
‘나 때문에 죽은 거야.’
미친 듯이 후회했다. 코코에게 자신의 저주에 관해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렇게까지 무모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
“죽이라니.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나한테 모든 걸 털어놓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거야? 그게 그 정도로 싫을 일이야? 말해!”
코코가 화내고 있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율리아를 다그치는 그녀의 얼굴엔 분노와 짜증, 걱정이 가득했다.
“누가 협박이라도 했어?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널 죽이겠대? 그런 거라면 당장 말해. 말하라고! 내가 지켜 주면 되잖아!”
잠옷 소매로 율리아의 젖은 얼굴을 문지르면서, 코코는 어쩔 줄을 몰랐다. 아무리 닦아도 율리아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표정 없는 얼굴에 눈물만 뚝뚝 떨어져 꼭 망가진 인형을 연상케 했다.
율리아가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저주는 병과 같아서 불행을 옮기고 다닌다. 율리아는 삶을 거듭하면서 자신이 여러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만약에 과거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자신은 두 번 다시 코코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지 않고, 감정 없는 도구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율리아는 맹세했다.
복도로 나온 코코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녀는 방금 율리아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되새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율리아는 무언가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율리아는 코코가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겁이 없는 애였다. 왕족을 만나도 신기하리만치 대담했다. 원수인 마조람 후작을 바라볼 때도 증오만 가득할 뿐, 두려움은 없었다.
그런 율리아가 울었다. 코코를 바라보면서, 코코가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울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코코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두운 복도 한편에 알렉사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좀 됐습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저 똑똑한 애가 같은 실수를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지나친 걸까? 그렇잖아. 거짓말하거나, 숨기면 되었을 일인데.”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들 말입니까?”
“그래.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저 계집애가 아는 코델리아 힌치는 내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꼭 어딘가에 나랑 똑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서, 지네끼리 지지고 볶다가 갑자기 내 앞에 뚝 떨어진 느낌이라고.”
거기까지 말하던 코코가 입술을 깨물더니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나도 알아. 미친 소리인 거.”
알렉사가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저는…… 그게 너무 신경 쓰입니다.”
나도 그래. 코코가 속삭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네?”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 코코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율리아가 왕자궁에 처음 왔던 날의 광경이 떠올랐다.
그날 율리아는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계단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 코코가 나타나자마자 눈으로 웃었다. 코코가 짜증을 내며 쌀쌀맞게 대할 때는 고개를 돌리고 몰래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심지어 율리아를 방까지 안내했던 시종은 새로 오신 시녀님이 코코 시녀님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하고 가기도 했다.
율리아 아르테.
외면할 수 없었다. 때론 남이 터뜨려 줘야 하는 비밀도 있다. 코코는 율리아의 비밀이 무엇이든 함께 짊어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진주, 물망초, 튀김.”
“네?”
“첩자가 그딴 정보를 뭐 하러 외워. 그건 그냥…… 내 취향인데.”
이대론 잠 한숨 잘 수 없었다. 달리듯 걸어간 코코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드레스룸 문을 열었다.
이 깊은 밤에 어딜 가냐고 묻는 알렉사에게, 잡히는 대로 아무 옷이나 꺼낸 코코가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카루스 란케아를 만나야겠어.”
* * *
남부 함대의 새로운 제독이 된 카루스는 전임 사령관 밑에서 해적과 내통하던 제국군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초강수를 두었다.
해군 병사들의 발이 뭍에 닿지 않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임무를 위해 바다에 나가는 날을 제외하곤 풍요로운 오르테가 항구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병사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전임 사령관과 그의 세력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카루스의 실력을 직접 목격한 자들이 가자미처럼 납작 엎드려서 벌벌 떨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넓은 관저엔 카루스와 제국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기사들, 그리고 최소한의 인력뿐이었다.
“카루스 님.”
고요한 새벽이었다. 카루스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바바슬로프가 문밖에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손님이 왔는데, 좀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바바슬로프의 목소리가 심각했다. 카루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셔츠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지?”
“2왕자궁에서 웬 시녀가 찾아왔는데.”
“뭐?”
“카루스 님을 당장 불러 주지 않으면 다시는 율리아를 못 만나게 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카루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바바슬로프도 그를 따라 미간을 찌푸렸다.
“빨강 머리인가?”
“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율리아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바바슬로프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카루스의 걸음이 빨라졌다. 무너진 채 가슴을 때리던 율리아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환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