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 *
며칠 동안 비가 왔다. 오르테가 하늘에 묵직하게 드리워진 검은 구름이 비를 뿌렸다. 차라리 확 쏟아지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비는 답답할 정도로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거기에 아침저녁으로 부연 안개까지 깔려, 신경 예민한 사람들이 통증과 우울감을 호소하던 때였다.
본래도 늦게 일어나는 편인 코코가 날씨 때문에 더 늦게까지 잠을 잤다. 다른 사람은 약간 기분이 가라앉은 정도인데, 코코는 거의 앓아누운 수준이었다.
하녀들도 이런 날은 한가하기 마련이었다. 일찍 일어나 식사까지 마친 율리아가 하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노는 부엌에 나타났다.
“미안한데, 튀김 좀 해 줄 수 있어요?”
하녀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튀김이요? 율리아 시녀님은 식사하신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부족하셨어요?”
“아, 제가 먹을 게 아니에요.”
그러면 그렇지. 하녀들이 방긋방긋 웃으며 물었다.
“누가 튀김이 먹고 싶다 하셨구나. 코코 시녀님일까요, 알렉사 시녀님일까요? 음…… 왕자 전하께서는 기름진 음식을 잘 안 드시니까.”
하녀들은 오랜만에 튀김 소리 좀 듣겠다며 재빨리 소매를 걷어붙였다. 가뜩이나 비가 그치질 않아서 영 입맛이 없었는데, 다 같이 나눠 먹을 수 있도록 이것저것 해야겠다고 했다.
솜씨 좋은 하녀들이 각종 채소와 해산물을 튀기는 동안, 늦게 일어난 코코가 아주 얇고 가벼운 재질의 원피스를 입고 식당에 나타났다.
“이게 무슨 냄새니? 안 그래도 기름진 게 먹고 싶었는데.”
“코코, 그러다 감기 걸려요. 비 때문에 기온이 찬데.”
“잔소리하지 마. 옷이 몸에 달라붙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단 말이야. 우리 집이었으면 잠옷만 입고 살았을 텐데, 개 같은 왕궁 법도. 왜 내 방에서도 잠옷만 입고 있으면 안 되는 건데?”
“잠옷만 입고 있으면서…….”
웃으며 말대꾸하는 율리아에게 코코가 뭐라 짜증을 내려던 순간이었다. 식당 문이 홱 열리더니 알렉사가 나타났다.
“이게 무슨 냄새입니까?”
다른 사람은 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알렉사 혼자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훈련을 쉬지 않는 그녀는, 방금 씻었는지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코코가 중얼거렸다.
“쟨 어려서 그런 걸 거야.”
“코코는 어릴 때부터 비 오는 날만 되면 아팠다면서요.”
“그야 난 아카시아 같은 여자니까…….”
힘없이 중얼거리던 코코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율리아가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 하녀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열린 부엌문 너머에서 귀를 자극하는 튀김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율리아가 하녀들과 함께 튀김이 가득 담긴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어머, 시녀님들 다 모이셨네요?”
하녀들은 즐거워했다. 율리아 시녀님 덕분에 이렇게 다 같이 튀김도 해 먹고 얼마나 좋으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둥근 테이블에 각종 튀김이 예쁘게 차려졌다. 하녀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이 먹을 걸 튀기겠다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빗소리 은은한 식당에 바삭바삭 소리가 퍼졌다. 코코는 알렉사와 함께 튀김을 먹다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넌 왜 안 먹어.”
“전 식사한 지 얼마 안 됐어요.”
“블라이스 백작한테 또 연락 왔다면서?”
“거절했어요. 샤트린 공주님은 화가 나셨는지, 요즘엔 연락이 없네요.”
“당연하지. 한낱 시녀가 공주의 초대를 거절했으니.”
율리아가 그냥 평범한 시녀였다면 상당히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분노한 공주에게 언제 어디서 해코지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샤트린이 무섭지 않았다.
알렉사가 작게 자른 튀김 조각을 코코의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블라이스 백작이 1왕자를 죽였다는 증거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마조람 후작이 해방군에게 몰래 자금을 대 주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진짜 놀랐지만…….”
“꼬리를 잘랐으니까 이제 마음을 놓겠지. 잔인한 말이지만, 나 같아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두 사람은 율리아에게서 마조람 후작과 해방군, 그리고 블라이스 백작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알렉사가 먹여 준 튀김을 오물오물 씹던 코코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블라이스 백작의 목적이 우리 왕국에 전쟁을 일으키는 거라면, 마조람 후작의 세력이 어느 정도 약해진 뒤엔 손을 떼겠네?”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블라이스 백작은 율리아에게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졌고, 나는 네 편’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를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때까지만 한시적으로 그를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 같긴 해요. 코코, 어떻게 생각해요?”
율리아가 물었다. 코코는 잠시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얼굴을 콱 찡그리며 말했다.
“그 뱀 같은 작자를 이용하려면 결국 네가 그 말 같잖은 데이트 신청을 계속 받아들여야 하잖아. 때려치워. 나나 알렉사랑 같이 만나는 거 아니면 다 거절해.”
“데이트라니, 그냥 식사예요.”
“세상엔 단둘이 식사 좀 했다고 저 혼자 흥분해서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등신들이 있단다.”
“그 초대를 거절했다면 저는 마조람 후작이 해방군 변절자들을 죽여 없앴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거예요.”
“그 정도는 추측으로도 알 수 있잖아.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걸 다 확인하면서 살았니.”
코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아와 코코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튀김을 집어 먹는 알렉사의 손이 느려졌다.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을 빠르게 깜박이다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그러다 블라이스 백작 때문에 진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코코와 율리아가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바이칸에서 전쟁 용병으로 일하던 당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바이칸은 정말 강합니다. 사람들은 제국의 방대한 크기나 병사들의 압도적인 숫자만 가지고 승률을 계산하는데, 그건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알렉사는 만약 지금 당장 오르테가 왕국이 바이칸 제국을 상대로 싸우게 된다면 필패할 거라고 했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전쟁 중이었어요. 그건 한낱 보병조차 전쟁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입니다. 오르테가는 바이칸을 절대 이기지 못합니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코코도 알렉사의 말에 동의하더니, 그렇게 되면 블라이스 백작으로부터 마조람 후작과 친제국파를 지켜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코코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암살자를 고용해서 지금 죽여 없애는 게…….”
“황제의 사절이 오르테가에서 참살당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요.”
“그럼 어떡하니! 우리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못 막으면 어떡해. 마조람 후작만 신경 쓰다가 전쟁이 진짜로 일어나면 어떡하냐고. 그 죄책감을 어떻게 견디려고!”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요.”
율리아가 말했다.
“황제는 당분간 전쟁을 일으킬 수 없어요. 조만간 바이칸 북부에서 정복 전쟁에 반대하던 세력이 패전국 연합과 함께 봉기를 일으킬 거예요.”
“……뭐?”
“우리에겐 시간이 있어요. 황제가 내실을 핑계로 반란을 진압하는 시간이죠.”
“너…….”
코코는 율리아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부엌문이 열리더니 하녀들이 음료수를 들고 나타났다.
비는 밤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어두운 하늘에서 점점이 떨어지던 빗방울은 캄캄한 밤이 되자 아예 안개처럼 부서지며 온 세상을 빗물에 가둬 버렸다.
코코가 노크도 없이 율리아의 방문을 열었다.
“말해 봐. 너 나를 바보 등신으로 알고 있지.”
그녀는 하얀 잠옷을 입고 있었다. 종아리를 반쯤 덮는 원피스 잠옷이었는데, 촛불에 비친 하얀 얼굴까지 더해지자 꼭 유령이 찾아온 듯했다.
“이 시간에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누구야, 말해.”
“네?”
“너한테 그 많은 정보를 알려 주는 사람이 누구냐고. 카루스 란케아야? 그 남자가 오르테가를 정복하려고 한 10년 전부터 여기다 첩자를 심어 둔 거니?”
“무슨 말이에요. 카루스 님이 거기서 왜 나와요.”
“우연히 산맥에서 만났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혹시 마조람을 쓰러뜨리는 일에 우릴 동참하게 하려고 일부러 널 보낸 거야?”
“아니에요, 그게 무슨…….”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서 그래. 어떤 가정을 해도 설명이 안 돼서 그래! 나도 이게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거 아는데!”
코코는 웃지 않았다.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고 애썼지만, 그녀의 붉은 눈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율리아를 직시했다.
“말해 봐. 너 내가 이런 날씨에 힘들어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진주를 좋아한다는 거, 물망초를 좋아한다는 거, 내 생일 그리고…….”
“코코.”
“알렉사는 너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하는데, 너는 그 애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건데. 생명의 은인이라며? 그건 무슨 뜻이야. 그냥 둘러댄 거니?”
“코코, 잠깐만요.”
“율리아.”
코코는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율리아가 그동안 숨겨 온 비밀들, 그 위화감을 떨쳐 내야만 한다고.
“황제도 모르는 반란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어?”
날 이해시켜. 코코가 말했다. 안 그러면 서로를 완전히 믿을 수 없어서 언젠가는 가슴 한쪽이 불안해질 것이다.
이건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이었다. 심지어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도 함께 걸려 있는 싸움이었다. 코코는 그녀가 오랫동안 가꾸고 지켜 온 왕자궁에 이런 방식으로 위화감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았다.
“…….”
말문이 막혔다. 율리아는 창가에 우두커니 선 채 코코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내가 그렇게 많은 실수를 했던가. 상대가 코코였기 때문일까. 다시 만났다는 기쁨에 빠져서, 나도 모르게 긴장을 풀었나 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 줄 알면서도 그랬다. 조금 더 조심해야 했는데.
후회해 봤자 늦은 일이었다.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율리아는 머릿속에 떠오른 어설픈 거짓말을 지웠다.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코코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다 털어놔. 그러면…… 네가 무슨 목적으로 우리한테 접근했건, 한 번은 용서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