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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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시아와 짧은 대담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율리아는 트루디에게서 세 사람으로부터 저녁 초대가 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귀빈궁에선 여느 때처럼 꽃바구니와 과일이 왔어요. 공주궁에선 뭘 따로 보내진 않았는데, 저한테 심부름하느라 수고한다고 금화를 쥐여 줬어요. 마지막으로 이건 왕궁 심부름꾼이 가져온 초대장이에요.”
공교롭게도 모두 이날 저녁 초대였다. 율리아는 초대장을 손에 들고 가만히 서서 생각에 빠졌다.
귀빈궁에선 블라이스 백작이 그녀를 초대했고, 공주궁에선 샤트린이, 마지막으로 심부름꾼을 통해 초대장을 보낸 건 카루스였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귀빈궁 손님한테 가실 거면 적당한 외출복을 준비할게요. 요즘엔 밤에도 더우니까 가벼운 드레스랑 부채면 되겠죠?”
트루디가 드레스룸 문을 열어놓고 물었다.
“공주궁으로 가실 거면 조금 더워도 제대로 입으셔야 하잖아요. 거기 시녀님들은 다 멋쟁이고, 공주님도 워낙 화려하게 꾸미는 걸 좋아하시고…….”
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트루디가 혼자 신이 나서 이 옷 저 옷을 꺼내 보였다.
“시녀님, 어디로 가실 거예요?”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샤트린의 공주궁이나 블라이스의 귀빈궁으로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카루스가 보낸 저녁 초대장을 쥔 손가락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어떤 분위기였어?”
“뭐가요?”
“이걸 주고 간 사람들.”
트루디가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그녀는 율리아가 질문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귀빈궁 시종이 그러는데요, 그 블라이스 백작인가 하는 분이 요즘 외출이 잦대요. 특히 밤마다 어딜 나가는지 모르겠다고. 찾아오는 여자들이 하도 많아서 도망 다니는 것 같대요.”
“그리고?”
“공주궁에서 온 사람은 율리아 시녀님이 벌써 자기네 식구라도 된 것처럼 말하던데요? 나중에 짐 옮길 때 자기가 도와줄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건 샤트린의 자만심이 아랫사람에게까지 전염되어서 그렇다. 지금 당장은 샤트린이 가장 유력한 왕위 후보였으니까.
“그 초대장 가져오신 분은 별말 없었어요.”
그렇다면 공주궁이 아니라 귀빈궁의 초대에 응하는 편이 좋았다. 샤트린은 예상 가능한 상대이지만, 블라이스 백작에 대해선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율리아가 손에 쥐고 있던 초대장을 탁자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카루스를 만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산도발을 처리했던 날, 율리아는 그의 품에 안겨 오랫동안 외면했던 자신의 약한 얼굴을 마주했다.
카루스는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를 말없이 꽉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넓고 따스했으나 율리아는 그 온기에 취할 수 없었다.
트루디가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귀빈궁 손님한테.”
그렇게 말하면서도 율리아의 손가락은 탁자 위에 놓인 초대장을 조심스레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 위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율리아는 블라이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귀빈궁의 외딴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친제국파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자꾸 찾아와서 외부 만찬장은 쓰기가 좀 그래. 나는 너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거든.”
블라이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의 긴 눈꼬리가 웃을 때마다 나비처럼 접혔다. 제국식 예복을 입은 블라이스는 근사해 보였으나, 율리아는 그에게 미소 한 자락 보여 주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율리아에게 의자를 빼 주려던 그가 하하 웃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오르테가를 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다고 했나? 내가 특별히 바이칸 양식의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거든. 남부 음식도 맛있지만, 자극적인 북부 음식에도 특별한 매력이 있지.”
블라이스는 바이칸에서도 훨씬 더 북쪽에 있는 산지 국가 출신이라고 했다. 그는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율리아는 블라이스가 말하는 동안 표정이나 말투, 제스처를 통해 그의 속내를 읽으려 애썼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수상한 남자의 의도가 읽히지 않았다.
“어때, 맛있겠지?”
“글쎄요.”
율리아는 그에게 빌미나 여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호의를 보일 때, 그 상대가 웃어 주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블라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아가 그의 지극한 호의 앞에서도 전혀 웃질 않자, 북부 음식에 대한 찬양을 금세 멈추었다.
사실 그녀는 이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바이칸으로 달아났던 과거가 있었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상단을 따라다니며 온갖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다.
“일단 식사할까. 이야기는 먹으면서 해도 되잖아.”
블라이스가 다시 자연스레 말을 건넸다. 수상한 눈빛과는 별개로 그의 태도는 여전히 신사적이었다.
율리아는 별다른 대답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북부 음식은 자극적인 매력이 있었다.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는 그녀는 블라이스 백작을 앞에 두고도 불편함 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율리아가 매콤한 닭고기 샐러드를 입에 넣고 씹을 때였다. 블라이스가 돌발적으로 물었다.
“카루스 님하고는 잘 지내고 있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그 애송이 왕자도 널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 율리아 아르테. 원하는 게 뭐야? 왕자비? 왕비? 아니면…… 카루스 란케아의 옆자리라거나.”
이상한 질문이었다. 불쾌하기도 했다. 율리아는 책망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블라이스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넌 모르는구나.”
그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율리아를 보고 자꾸 웃었다. 음식을 덜어 주거나 음료수를 가져다줄 때는 한없이 자상한데, 무례한 질문을 아무렇게나 던질 때도 있었다.
“그거 알고 있나? 내가 모시는 분은 카루스 란케아를 사랑해.”
알고 있다.
“그냥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미치도록 사랑하지. 집착이란 말로도 부족할 정도야. 세상에는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도 있거든.”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카루스 님하고 가까이 지내지 마. 데네브라 황비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분은 널 끓는 기름 솥에 산채로 집어넣을 수도 있어.”
율리아가 들고 있던 나이프를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러곤 블라이스에게 말했다.
“먼 곳에 있는 황비께서 저 같은 평민한테 신경 쓰실 이유는 없을 텐데요.”
“카루스 란케아의 일이라면, 그분은 자기 자신보다도 우선하시지.”
“협박하는 건가요?”
율리아가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물었다. 평소보다 훨씬 느린 말투였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블라이스의 시선이 율리아의 입술에 고정되어 떠나지 않았다.
“블라이스 백작님.”
“그래.”
“가서 말하세요. 오르테가의 하찮은 평민 계집이 감히 카루스 란케아의 곁에서 얼쩡거린다고요.”
“율리아, 이건 농담이 아니야.”
“마찬가지예요.”
블라이스가 이번에는 율리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했다.
율리아는 그가 자신을 마음껏 관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율리아는 죽음이나 두려움을 무기로 협박할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용건은 그게 다인가요? 그러면 식사만 마치고 물러가겠습니다.”
“그럴 리가.”
블라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술을 가져왔다. 율리아는 이번에도 유리잔을 뒤집은 채 밀어 버렸고, 그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잔에만 술을 따랐다.
“내가 며칠 전에 바닷가에 있는 어떤 빈 건물에 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마조람 후작을 봤지.”
이게 용건이었나. 율리아가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근데 이상하지 뭐야. 마조람 후작이 나타나기 전에는 두 발로 멀쩡히 걸어 다니던 해방군들이, 후작이 들어갔다가 나오니까 전부 들것에 실려 나오더라고.”
죽였구나. 그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아마도 마조람 후작에게서 자금을 받아 전달하던 해방군 내의 변절자들이었으리라.
“시체를 어디에 갖다 버리는지, 그것도 봤지.”
블라이스가 율리아에게 자신의 빈 손바닥을 내보였다.
“봐, 난 네 편이야. 너한테 뭐든지 다 말해 줄 수 있어.”
“블라이스 백작님.”
“내 적은 마조람 후작이고, 네 원수도 마조람 후작이잖아. 우리가 손을 잡는 데 이 이상의 이유가 필요해?”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율리아도 그 점엔 동의할 수 있었다. 블라이스와 한 편이 되면 마조람 후작과의 전쟁에서 조금 더 빨리, 수월하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손잡지 않을 생각이었다.
“식사 고마워요.”
율리아가 귀빈궁에 온 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갑고 무표정하던 얼굴에 선득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녀의 눈빛은 말라죽은 나무 같기도 하고, 얼어붙은 꽃잎 같기도 했다. 깊이를 알 수 없어 오만해 보였다.
블라이스는 율리아를 읽을 수 없었다.
율리아가 말했다.
“당신이 1왕자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날 고발하려고?”
블라이스가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그려낸 웃음이었다. 그에게는 잘 어울렸지만, 율리아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아뇨.”
고발은 무슨. 율리아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고마워요.”
다음 삶의 나에게 당신이라는 변수에 대해 알려 줘서. 대처할 방법을 알려 줘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율리아가 귀빈궁을 떠났다.
블라이스는 가만히 앉아서 율리아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지배하던 미소가 사라졌다가 이내 전혀 다른 미소로 피어났다. 그려낸 것처럼 완벽하던 미소가 아니라, 어딘가 무너지고 일그러져 환희에 찬 듯한 미소였다.
“고맙다고?”
그가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참을 수 없이 기뻤다.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율리아 아르테는 독사였다.
동면에서 깨어난, 굶주린 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