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왼손에 잡혀 있는 그녀
국왕이 남부상인연합의 새 대표로 힌치 백작을 임명했다.
전임 대표는 너무 많은 죄를 저질러서 재판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릴 예정이었다. 비자금 세탁은 물론이거니와 인신매매와 노예 거래, 그리고 밀무역에 이르기까지.
왕실 기사단의 조사에 의하면 상당한 수의 상단과 용병단, 그리고 귀족들이 그 일에 연루되어 있었다.
분노한 국왕은 힌치 백작을 새 대표로 임명하면서 ‘상인연합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악의 고리를 끊어라’라는 특명을 내렸다.
대부분은 그동안 상인연합이 저질러 온 죄를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분노했다. 남부에서 가장 돈 많은 상인이 모여 한다는 짓이 고작 약자를 착취해 검은돈을 불리는 거라니.
그러나 일부 귀족들은 상인연합이 아니라 힌치 백작에게 주목했다.
그가 중앙 귀족계를 떠난 게 정확히 몇 년 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0년 전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20년이 넘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거나 힌치 백작은 본인의 괴팍한 성미에 걸맞게 말도 없이 중앙을 떠나 상단 활동에 집중해 왔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왕궁에 나타나 2왕자 레위시아 오르테가를 만나더니, 남부상인연합의 새 대표가 되었다.
이 일은 귀족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했다.
마조람과 왕가의 반목이 공식화되었다는 것, 힌치 가문이 복귀했다는 것, 2왕자 레위시아 오르테가에게 기반이 생겼다는 것.
왕궁은 왕족의 동향을 파악하려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거렸다.
“힌치 백작님은 전하께 그걸 바라셨을 거예요.”
“뭐, 막말하는 거?”
“비슷한데…… 백작님은 왕의 자질 중에서 결단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결과를 감당할 정신력도 중요하고요.”
“마음이 선하고 똑똑한 왕이 아니라?”
“전하는 이미 마음이 선하고 똑똑해요. 그러니까 백작님은 전하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셨던 거죠.”
예를 들면 우유부단함이라거나, 유약함 혹은 애정결핍.
율리아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굳이 자신까지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또 그녀가 생각하기에 레위시아에게는 그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할 수 있는 자질이 있었다.
레위시아가 두 눈을 천천히 끔벅거렸다. 힌치 백작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는 듯했다.
“백작한테…… 내 앞에 왕좌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엄청 시건방지게.”
“잘하셨네요.”
“뭐? 잘했다고?”
“신하를 잘 부리는 것도 왕의 중요 덕목이죠.”
레위시아는 질색하는 얼굴이었다. 힌치 백작을 신하로 삼아 호령하는 왕이 되어야 한다니, 신경쇠약으로 요절할 것 같다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는 힌치 백작님과 아주 잘 지내실 수 있어요.”
“네가 어떻게 알아?”
“그분은 코코의 아버지잖아요. 전하는 코코의 작품이고요.”
레위시아는 율리아의 말에 반박하려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율리아에게 말했다.
“나 방금 끔찍한 상상을 했어.”
“뭔데요?”
“언젠가 내가 코코를 엄마라고 부르면서 놀리는 걸 힌치 백작한테 들키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전하, 그러다 맞을 수도 있어요. 율리아가 이번에도 뒷말을 꿀꺽 삼켰다.
“티타니아로 변장하고 사교 클럽에서 술 마시고 노는 걸 힌치 백작한테 들키거나…….”
난 아무래도 비밀이 많은 왕이 되어야 할 것 같아. 레위시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율리아도 그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