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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17/319)

104화

왜 그랬는지는 몰랐다. 궁지에 몰리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율리아의 암녹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러자 심장엔 열이 오르고,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율리아라면 어떻게 했을까.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왕좌를 살육의 트로피라고 말하는 상대에게 무슨 말로 반격을 해야 하나.

힌치 백작은 레위시아에게 책에 적혀 있는 정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왕위에 오르겠다니, 그렇게 순진하고 물러터진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율리아, 너는 아마 이렇게 말했겠지. 생각을 마친 레위시아가 어렵게 입술을 뗐다.

“제 앞에 길은 하나뿐입니다. 그 길 끝에 왕좌가 있는 게, 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레위시아는 이제 차분하려 애쓰지 않았다. 꼬았던 다리는 어느새 풀려 있었다. 그는 힌치 백작을 향해 상체를 내밀고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목소리가 떨려 나와도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비참하게 죽느냐, 살아남아 왕이 되느냐. 그럼 살아야죠. 이왕이면 좋은 왕이 되어야겠지만, 지금은 착한 일이나 하면서 자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왕좌를 감당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살육의 트로피를 내게 안겨 달라고, 레위시아는 아예 대놓고 말해 버렸다.

응접실에서 쫓겨난 율리아와 코코, 알렉사는 만찬이 준비되고 있는 식당에 와 있었다.

하녀들이 온갖 산해진미를 차리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곧 저녁 시간이었다. 그런데 레위시아와 백작이 응접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불안해진 코코가 중얼거렸다.

“뭔 놈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거야? 그냥 쳐들어가서 데리고 나올까?”

“코코가 그럴수록 백작님은 레위시아 님을 우습게 여길 거예요.”

“네가 우리 아빠를 몰라서 그래. 아픈 데만 찌르고 쑤시고, 후벼 파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고, 그 위에 침을 뱉는다고.”

누가 들으면 힌치 백작이 성격파탄자에 파렴치한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율리아가 걱정하지 말라고, 레위시아 님은 잘 해낼 거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창가에 서서 응접실이 있는 쪽을 유심히 살피던 알렉사가 말했다.

“나오시는데요?”

“나오다니, 어딜?”

“두 분 말입니다. 밖으로 나오셨어요.”

코코가 창가로 달려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러곤 치맛자락을 붙잡고 식당 밖으로 번개같이 달려갔다.

율리아도 알렉사와 함께 코코를 따라갔다.

힌치 백작이 왕자궁을 떠나고 있었다. 그를 배웅하는 레위시아의 얼굴이 창백하고 퀭했다. 이대로 만찬장으로 데려갔다간 체하거나 토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반가웠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레위시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백작은 그런 왕자를 힐긋 바라보더니, 그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코코가 달려와 물었다.

“아빠! 어디 가는 거예요? 하녀들이 만찬 준비까지 해 놨는데, 이대로 가 버리면 어떻게 해요?”

“만찬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그게 뭔데요.”

“난 이제 왕을 만나러 가야겠다.”

힌치 백작이 피식 웃더니 코코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몸을 돌렸다. 그는 왕자궁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성큼성큼 걸어서 궁을 빠져나갔다.

* * *

국왕의 병사들이 도시를 이 잡듯이 뒤진 끝에 일부 해방군을 찾았고, 그들은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해방군은 혼란에 빠졌다. 1왕자를 죽이지 않았는데, 국왕을 비롯한 온 나라가 그들을 범인이라고 몰아세웠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은 비밀 조직이었으니까.

그중에서도 몇몇 간부들의 마음이 제일 복잡했다.

“마조람 후작에게 우리가 결백하다는 것부터 알려야 해. 안 그러면 다시는 후작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지 못하게 될 거야.”

“다 모였습니까?”

“관련자들과 얘기하고 싶다고 하셨으니, 아는 놈들은 대충 다 오라고 했네.”

그곳은 바닷가에 있는 빈 건물이었다. 해방군 간부 중 활동 자금과 회계를 담당하는 자들이 모여 앉았다. 그들은 모두 11명이었는데, 그중엔 해방군 우두머리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자도 있었다.

“도착하셨군.”

빈 건물 앞에 마조람 후작의 마차가 도착했다. 캄캄한 밤에 조명까지 어두워, 해방군은 후작이 마차에서 내려 얼굴을 드러낸 뒤에야 안심하고 그를 들여보내 주었다.

마조람 후작은 제법 많은 수의 수하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문 앞을 지키던 해방군이 그들을 들이려고 하지 않자, 후작이 말했다.

“네놈들이 1왕자처럼 나를 죽일 수도 있는데, 그럼 혼자서 들어가란 말이냐?”

“그게 아닙니다. 저희가 한 짓이 아니라는 걸…….”

“닥쳐라. 너희 때문에 내가 지금 얼마나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아느냐? 내가 그동안 1왕자에게 퍼부은 시간과 돈을 네놈들이 갚아 줄 것이냔 말이다!”

안에 있는 해방군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조직 내에서도 비밀리에 마조람 후작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왔고, 만약 이 일이 들통난다면 누구에게건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었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렸다. 마조람 후작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 모여 있던 해방군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모두 11명이었다.

후작이 물었다.

“다 모인 건가?”

“네, 이들은…….”

“그럼 죽어라.”

후작이 손을 휘저었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수하들이 품에서 칼을 꺼내 들더니 해방군을 베기 시작했다. 번개 같은 솜씨였다. 숙련된 용병이거나, 노련한 기사가 분명했다.

해방군은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좁은 건물 안에 비명이 난무했다. 시뻘건 피가 튀고, 죽은 자의 몸 위에 죽은 자의 몸이 쌓였다.

마조람 후작은 11명의 해방군이 모두 죽은 걸 확인한 뒤에야 건물을 나섰다. 그의 수하들이 죽은 해방군의 시신을 마차에 실어 날랐다.

어두운 골목 안, 누군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들어갈 때는 걸어서 들어가더니, 나올 때는 실려서 나오는군.”

블라이스 백작이었다.

“물러 터진 시골 촌구석이라 재미없는 놈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가 붉은 입술을 매만지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제법 귀족다운 놈도 있었잖아. 저자가 마조람 후작인가?”

“그렇습니다.”

“오르테가를 혼란에 빠뜨리려면 저자의 세력부터 깎아 내야 한다고 했지?”

“파벌에 대한 통제력이 강한 귀족입니다. 1왕자가 죽었으니 한동안은 내리막길을 걷겠지만, 세력이 워낙 공고해 저희가 조금 더 손을 써야 할 듯합니다.”

블라이스 백작은 부하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군.”

마조람은 그녀의 적이니까.

역시 우리는 운명이 틀림없다고, 블라이스가 혼자 생각했다.

그는 오르테가에 전쟁의 씨앗을 심기 위해 친제국파의 거두인 마조람 후작의 세력을 약하게 만들어야 했고, 율리아는 그를 원수로 여기고 있으니.

‘저걸 괴롭히면 율리아가 날 좋아해 줄까?’

묻고 싶었다. 그러면 그녀는 그 매혹적인 말투로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번에도 괜찮다면서 거절하려나. 아니면 동류인 자신을 알아보고 웃어주려나. 상상만 해도 손끝이 짜릿했다.

블라이스가 독사처럼 눈을 빛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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