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이날은 아침부터 레위시아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슬픔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응접실 한가운데서 물고기처럼 뱅글뱅글 도는 레위시아를 지켜보던 율리아가 그를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그러자 그가 이번에는 한쪽 다리를 정신없이 떨었다.
율리아가 곁에 앉아 그의 무릎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전하, 테이블 떨려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 그거 좀 줘.”
“어떤 거요?”
“네가 고른 제왕학 서적, 요점 정리한 거.”
레위시아가 꼭 시험 직전에 벼락공부하는 학생처럼 요점 정리를 찾았다. 율리아는 그가 요구하는 대로 노트를 넘겨주면서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설마 힌치 백작님 때문에 이러시는 거예요?”
“율리아, 빨리 나한테 아무 질문이나 던져 봐. 어려운 거로. 왕이 꼭 알아야 하거나, 왕위 후계자가 꼭 알아야 하는 것들.”
“20년 전 보호 동맹이 체결되던 당시 바이칸의 황제가 오르테가를 향해 남하하던 중에 티타니아 산맥에서 일어났던 세 번의 전투와 그가 왜 발길을 돌렸는지 이유를 설명해 보세요.”
“어…… 세 번이야? 난 그냥 패전국 연합이 산맥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기습했다고만 들었는데. 겨울이라서 돌아간 거 아니었어?”
레위시아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율리아가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오르테가 국법에 명시된 왕위 후계자의 자격 조건 중, 품위 조항에 있는 배우자의 소양이 뭔지 아세요?”
“몰라.”
“나라를 다스리는 자를 현명하게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해?”
레위시아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긴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율리아는 그런 그를 보며 몰래 웃다가, 이렇게 물었다.
“백작님이 그렇게 무서우세요?”
“넌 몰라! 그 양반이 얼마나 짜증 나고 지독한 인간인지!”
레위시아가 버럭 소리쳤다가 금세 사과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는 그에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며, 율리아는 힌치 백작을 떠올렸다.
짜증 나고 지독한 인간인 건 맞지만, 사실 그는 율리아가 가장 존경했던 귀족이기도 했다.
“야. 귀족이랑 싸울 때는 닭 잡듯이 하면 안 돼. 넌 그게 틀려먹었어. 귀족은, 특히 마조람은 생선처럼 잡는 거야. 명심해라.”
“생선…….”
“그래! 일단 떡밥을 풀어. 식탐이 많아서 먹음직스러운 게 눈앞에 있으면 안 물고는 못 배길 테니까. 그다음엔 그물을 넓게 펼치는 거야. 지가 갇힌 줄도 모르게.”
“포위하란 말씀이시죠?”
“그렇지! 그다음에 점점 몰아야지. 좁게, 더 좁게. 빠져나갈 데가 없어서 놈들끼리 부딪치다가 튀어 오르게.”
“그다음에는요?”
“이 자식이…… 아예 떠먹여 주랴? 내일까지 생각해 와!”
힌치 백작은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의 율리아가 마조람 후작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선택했던 대적자였다. 그는 반제국파의 숨은 거두 중 하나였고, 상인연합이 가장 두려워하는 적이기도 했다.
일곱 번째의 율리아는 어렵게 힌치 백작의 수하로 들어가 승냥이처럼 살았고, 여덟 번째의 율리아는 이전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힌치 백작의 측근이 되어 코코와 만날 수 있었다.
“너 내 딸이랑 친해졌냐?”
“아…… 죄송합니다. 아가씨가 어젯밤에 갑자기 저택에 오셔서.”
“뭐가 죄송해? 내 딸이 쳤냐? 막 머리채 잡고 싸웠어?”
“네? 제가 왜요!”
“걔 성질이 더러워서…… 너도 만만치 않고. 아니면 됐어.”
“백작님, 해방군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해적들이 미끼를 물었다고 합니다. 오늘 밤 긴밀하게 만나자고 하는데, 약속을 잡을까요?”
“네가 다녀와.”
“제가요?”
“언제까지 내가 직접 다녀? 넌 인마, 대장이 나서서 피라미들 만나고 다니는 거 봤어? 피라미는 피라미가 해결해.”
“뭐라고 말하고 오면 되는데요?”
“이 자식이…… 그렇게 많이 배우고도 여태 질문이야? 알아서 처리해!”
율리아의 영리함을 알아보고, 아낌없이 가르쳐 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사람.
힌치 백작은 정의의 수호자는 아니었으나, 최소한 정의를 목표로 삼고 행동하는 귀족이었다.
“괜찮을 거예요, 전하.”
“너는 그 양반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레위시아가 치를 떨었다.
왕자가 아무리 불안해해도, 율리아는 힌치 백작이 그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백작이 레위시아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면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것도 알았다.
백작은 상대가 불쌍하다고 봐주는 법이 없었으니까.
* * *
오래 지나지 않아 힌치 백작이 도착했다. 왕자궁은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레위시아를 응접실에 혼자 두고 알렉사와 함께 왕자궁 입구로 나갔다.
힌치 백작이 코코와 함께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반가운 마음이 반, 긴장되는 마음이 반이었다. 아직도 이전 삶의 기억이 생생했다.
“어린애들이네.”
힌치 백작은 율리아와 알렉사를 보자마자 한탄을 내뱉었다.
그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은 아직 너무 어린 여자애들이었다. 예쁜 옷 입고 바닷가에 소풍이나 다니면 좋을 나이. 그런데 하나는 마조람을 상대로 싸우려 하고, 하나는 부모 빚을 갚겠다고 노예처럼 살다가 최근에 구해졌다.
“하긴, 내 딸은 너희보다 더 어릴 때 왕궁에 들어왔으니까.”
힌치 백작이 피식 웃더니 두 사람의 인사를 대충 받아 주고 성큼성큼 걸어 왕자궁 안으로 들어갔다.
“레위시아 2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모를 장면이었다.
힌치 백작은 여유가 넘쳐흐르는데, 레위시아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뻣뻣하게 일어나 그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백작……. 오래간만입니다.”
“많이 자라셨군요.”
백작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레위시아는 그의 손을 잡고 악수한 뒤, 응접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힌치 백작은 레위시아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냥 편하게 소파에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다만 그의 붉은 두 눈은 집요하게 왕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얼굴, 태도, 행동, 목소리, 표정에 이르기까지. 백작의 시선이 레위시아의 모든 것을 샅샅이 훑었다.
보다 못한 코코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하녀들이 식사 전에 다과를 준비해 줄 거예요. 저희가 응접실로 가져올 테니까…….”
“됐으니까 다 나가 있어.”
힌치 백작이 피식 웃더니 코코와 율리아, 알렉사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레위시아와 둘이 할 얘기가 있다며, 다과는 됐으니 저녁 식사 때나 보자는 것이다.
코코가 눈썹을 찡그렸다. 백작의 꿍꿍이가 의심스러웠던 그녀는 안 나가고 버티려 했으나, 레위시아가 그의 편을 들었다.
“그래, 다 여기 있을 필요 없잖아. 백작의 말대로 해.”
그렇게 말하고, 레위시아가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는 그의 눈동자를 한 번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에서 코코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코코, 나가요.”
코코가 어미 새처럼 레위시아 옆에 붙어 있을수록 힌치 백작은 왕자에게 실망할 것이다. 코코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율리아에게 이끌려 응접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녀들이 모두 나가자 가뜩이나 침묵으로 가득 찼던 응접실이 이제는 숨 막힐 듯한 긴장감으로 뒤덮였다.
레위시아는 힌치 백작이 어려웠다. 만난 적도 몇 번 없는데, 유난히 그가 어려웠다. 백작은 레위시아가 어릴 때부터 어쩌다 그를 마주칠 때마다 저 소름 끼치도록 붉은 눈으로 그를 꿰뚫듯 노려보곤 했다.
레위시아가 어떻게 대화의 문을 열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힌치 백작이 불쑥 말을 꺼냈다.
“저는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왕좌엔 왜 앉으려는 겁니까? 권력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편하게 살면 될 텐데.”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냉큼 대답한 레위시아가 최대한 여유로워 보이기 위해 다리를 꼬았다.
그런데 힌치 백작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내 사람’이라는 걸 지키기 위해서 누이인 샤트린 공주의 목을 칠 자신은 있으십니까?”
“예?”
“전하의 어머니는 어떻고요. 그분은 왕을 사랑합니다. 아주 맹목적으로요. 버려진 채 살아온 전하라면 잘 알고 계실 텐데.”
“백작, 말씀이 심합니다.”
“심하지 않습니다. 왕자께서 왕좌 때문에 국왕과 반목하게 된다면 그분은 왕의 그림자 뒤에 숨어서 왕의 편만 들 게 뻔합니다. 그럼 그때는 어쩌시겠습니까. 어머니를 버릴 마음의 준비는 하셨는지?”
레위시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힌치 백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왕좌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닙니다. 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자인 것도 아닙니다. 오르테가는 특히 그렇고요.”
“압니다.”
“모르는 것 같으니까 알려 드리는 겁니다. 왕좌는 살육의 트로피에 불과해요.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왕의 자식만이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습니다.”
힌치 백작의 목소리가 레위시아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내 딸을 이용해서 나까지 끌어들였으면, 응당 그 정도의 각오는 하셨겠지요. 아니면, 나를 등에 업으려고 내 딸을 이용하신 건가?”
“코코는 제 가족입니다!”
“틀렸습니다. 당신은 내 딸의 가족이 아니라, 주군이 되어야죠.”
백작의 질책이 날카로웠다. 레위시아는 그가 주는 압박에 점점 더 무거운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코코가 어렵게 마련해 준 기회를 놓치게 될 것 같았다.
힌치 백작은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하는 상대였다. 이미 국왕에게 그를 상인연합 대표로 임명하라고 강력하게 추천해 놓은 상태이기도 했다.
손바닥에 땀이 축축했다. 날씨는 더운데, 차갑게 식은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레위시아는 그때 율리아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