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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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빛이 뜨거웠다. 일꾼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연신 찬물을 끼얹었다. 그래도 열기를 다 식힐 수는 없어서 일찍 일을 마치고 부두를 벗어나는 사람이 많았다.
마차에 오르던 힌치 백작이 그런 일꾼들을 지켜보며 집사에게 말했다.
“야간작업으로 돌려. 수당 더 챙겨 주고. 저러다 쓰러지겠다.”
“그럴까요? 다들 좋아하겠네요.”
“날짜 봐서 휴가도 넉넉히 챙겨 줘. 이 더위에 땡볕에서 몸 쓰는 일 하는 거 아니다.”
“백작님이 이렇게 따뜻한 분인 걸 다들 알아야 할 텐데.”
집사가 깔깔 웃으며 마차 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마부가 큰 소리로 출발 신호를 내렸다. 저택 앞 거리를 메우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마차가 지나갈 길을 비켜 주었다.
“아빠가 따뜻하다니? 집사가 아부 잘하는 건 알았지만, 그건 좀 아니다. 도대체 월급을 얼마나 받는 거야? 매일 술만 마시는 악덕 고용주 아냐? 말해 봐. 칭찬할 때마다 금화 하나씩이야?”
마차 안에는 코코가 앉아 있었다. 밝은 오렌지색 원피스에 흰 모자를 쓴 그녀가 집사에게 말했다.
“어차피 가을 되면 두 배로 굴릴걸? 그게 아빠 방식이잖아. 당근 주고 채찍질하고, 당근 주고 채찍질하고.”
“당근 먼저 주는 게 어디예요. 게다가 두 배 주시잖아요. 부두에선 우리 무역선 짐꾼들이 제일 일당을 많이 받아요. 다들 여기로 오려고 하니까, 고용 담당들이 뒤에서 뇌물까지 받는다고요.”
“그걸 내버려 뒀어?”
“저한테 가져왔으면 내버려 뒀을 텐데, 자기들끼리 나눠 가지길래 백작님한테 고자질했죠. 다 해고됐어요.”
집사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코코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힌치 백작에게 물었다.
“집사는 누가 뽑았어요?”
“내가.”
“잘했네.”
집사가 또 한 번 깔깔 웃으며 마차 벽을 두드렸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코와 힌치 백작은 왕궁으로 가고 있었다.
2왕자 레위시아를 한 번 보러 오라는 딸의 요청을 바쁘다는 말로 몇 번이나 거절하던 힌치 백작은 어느 날 갑자기 ‘네가 데리러 오면 가겠다’라고 전갈을 보냈다. 물론 성격 급한 코코는 그 전갈을 받자마자 왕자궁을 박차고 나와 아버지를 데리러 왔다.
“아니, 무슨 공주님이야? 데리러 와야 가겠다는 말은 뭐예요? 누가 보면 아빠랑 내가 되게 사이좋은 부녀 관계인 줄 알겠네.”
“바보냐? 사이가 나쁘니까 좋은 척이라도 해야지. 우리 상단 책임자들이 요즘 나만 보면 후계자 타령이란 말이야. 누구 닮아서 성격이 그렇게 급한지. 건방진 놈들이 나 아직 안 죽는다고, 앞으로 오십 년은 더 살 거라고 말을 해도 도통 듣지를 않아.”
“어머, 세상에! 누구 닮았을까?”
코코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백작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의 주홍색 눈동자가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아빠, 오십 년이나 더 살 거면 내 상속분 미리 주세요. 그때쯤 되면 나도 죽을 날 얼마 안 남은 할머니가 될 텐데, 그때 상속받아서 뭐 해. 지금 줘요.”
“싫어. 네가 내 병시중하는 거 봐서 줄 거야.”
“병시중을 내가 왜 해요! 전문가를 고용해야지!”
“배우면 되잖아!”
마차 문은 꽉 닫혀 있는데, 안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밖까지 다 들렸다. 마부가 남몰래 혀를 쯧쯧 차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차를 호위하던 나이 든 병사들도 그를 따라 고개를 저었다.
저 똑같은 부녀는 왜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가.
코코는 누가 보더라도 힌치 백작의 딸이었다. 백작은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사내치곤 피부가 희었고, 진한 주홍색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코코가 태어났을 때, 자신은 하나도 닮지 않고 남편만 닮아 나온 딸을 본 그녀의 어머니가 실망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는 소문이 있었을까.
“그럼 그동안 왕자 때문에 바빠서 집에는 코빼기도 안 비친 거냐?”
“겸사겸사.”
“앞에 겸사는 뭐고, 뒤에 겸사는 뭔데?”
“앞에 겸사는 레위시아 님 때문에 바빴던 게 맞고, 뒤에 겸사는 새로 들어온 시녀 때문에.”
힌치 백작이 의외라며 코웃음을 쳤다.
“얘기를 듣긴 했는데…… 평민이라고? 2왕자는 시녀 데리고 다니는 걸 꼭 엄마 손 잡고 다니는 것처럼 창피해하던 녀석이잖아. 웃기지도 않는 놈. 그러던 놈이 갑자기 왜 그런 건데?”
코코는 레위시아가 가끔 자신을 놀릴 때 코코 엄마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죽을 때까지 백작에게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율리아는 좀 달라요.”
“뭐가 달라. 브레웨 훈장의 주인이라서?”
힌치 백작은 이미 율리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알렉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왕궁에서 누구와 지내는지 모를 정도로 무신경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나도 처음엔 그냥 좀 영리하고 무모한 애가 들어왔구나, 생각했어요. 마조람 후작을 상대로 싸우겠다니, 돌았나?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고.”
“그런데?”
“아빠, 율리아는 왕자궁의 시녀가 된 것뿐인데…… 바실리 마조람과 크리스틴 마조람이 재기불능이 됐어요. 이상하지 않아? 고작 평민 시녀 하나. 그 아이 때문에 레위시아 님은 왕좌에 도전하겠대. 심지어 걔 후원자가 누군지 알아요?”
“누군데.”
“카루스 란케아.”
이번에는 힌치 백작도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무혈 제독을 움직이다니 보통이 아니구나. 자세히 좀 들어 보자. 이름이 뭐라고 했지?”
“율리아 아르테.”
코코는 그녀가 알고 있는 율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려주었다. 마차 밖까지 새어 나오도록 큰 소리로 싸우던 부녀가 갑자기 조용해지자, 마부와 병사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차가 왕궁 앞 광장을 지날 때였다.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코코와 힌치 백작도 의아함을 느끼고 대화를 멈추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평범한 웅성거림이 아니었다. 누군가 큰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다수의 울음이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바깥에…….”
코코가 창문을 열려고 하자, 힌치 백작이 손으로 막았다. 그러곤 딸 대신 자신이 나서서 창문을 열고 바깥을 확인했다.
코코는 긴장감 없이 풀려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지는 걸 보았다. 백작의 주홍색 눈동자에 깊은 수심이 어렸다.
“무슨 일인데요? 나도 좀 봐요.”
“볼 거 없어.”
“왜요. 무슨 일이냐니까?”
“국왕의 병사들이 기어이 해방군을 잡아낸 모양이야. 전부 보란 듯이 광장에 매달아 놨구나.”
코코가 입을 벌렸다가 빠르게 닫았다.
“매달아 놨다고요? 공개 처형 말하는 거예요?”
아무래도 코코가 힌치 백작을 데리러 간 사이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았다. 시선이 절로 창으로 향했다. 매달린 시신의 하반신이 보였다. 적어도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수였다.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본보기겠지. 1왕자가 죽었잖아. 정식 재판도 없이 저런 식으로 처리하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게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뇨. 왕한테 그런 게 어디 있어. 왕족이 죽었으니까 더 확실하게 조사하고, 더 확실하게 기록하고, 재판에 부쳐야…….”
“자식이잖아, 이놈아.”
힌치 백작이 코코를 나무라듯 말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의 죽음 앞에서 냉정할 수 있겠냐.”
코코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무거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그녀도 얼마 전에 레위시아에게 국왕에 대해서 비슷한 충고를 한 적이 있었다.
“아빠 말이 옳아요. 국왕도 인간이고, 아버지인데.”
“내 딸이 다 컸네.”
“뭐래. 내일모레 서른인데.”
코코는 제 나이를 좀 기억하라며 투덜거렸지만, 힌치 백작에게는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딸이 보살피는 왕족이라고 해서, 레위시아 왕자까지 따스하게 대해 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놈이 왕좌에 앉겠다고 했으니까.’
왕의 재목인지 아닌지, 그것만 살펴볼 것이다.
두 사람은 처형당한 해방군의 시신을 애써 외면하며 왕궁으로 들어갔다. 달리던 마차가 왕자궁 앞에 멈추고, 힌치 백작과 코코가 문을 열고 내렸다.
왕자궁 앞을 지나던 몇몇 귀족들이 코코를 알아보곤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코코 옆에 그녀와 너무나 닮은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뭐야. 저 사람…… 힌치 백작 아냐?”
“그동안 왕궁엔 그림자도 안 비치던 사람이 왜…….”
그들은 마조람 후작과 같은 파벌이었다. 1왕자의 죽음 이후 4왕자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 매일 왕궁을 들락거리는 중이었는데, 2왕자궁으로 들어서는 힌치 백작을 목격하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빨리 마조람 후작께 알려야 해. 빨리!”
거물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