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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114/319)

101화

“뭐?”

율리아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카루스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산도발을 처리하면서 혼자만 아는 과거에 갇혀 두 번, 세 번 고통받았다. 당시의 고통을 곱씹어 현재의 아픔을 무디게 했다. 그게 그녀의 생존 방식이었다.

카루스는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가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믿는데도 그랬다.

‘이토록 무력한 기분이라니.’

카루스에게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그는 아무리 높은 성이라도 끝끝내 방법을 찾아 함락시키는 지휘관이었고,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반드시 이기고야 말았던 지독한 검사이기도 했다.

한데 율리아를 지키는 법은 몰랐다.

그녀의 마음은 바다 같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답기 그지없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장엄함에 위축되고 만다. 발목까지 담그면 한없이 무력한 필부가 되고, 깊이 빠진 뒤에는 목숨을 잃고야 마는.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

“너한테 잘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자꾸 잘해 주지 말라고 하는군.”

“저는…….”

율리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안다. 화가 난다는 말은 그가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그녀를 책망할 때 쓰는 말이었다.

“죄송해요. 그렇게 살 수 없어요.”

율리아가 말했다.

“이 삶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 수 없어요. 사소한 것들이 너무 중요해지니까요. 그러면 마조람을 무너뜨릴 수 없잖아요.”

가장 중요한 걸 이루려면 사소한 것들은 모두 포기해야 한다.

“제게는 삶과 죽음이 명확하지 않아요. 카루스 님, 저는 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라요.”

“살아 있어.”

“가끔 생각해요. 내가 미쳐서 환각 속에 사는 건 아닐까. 이곳은 혹시 말로만 듣던 지옥이 아닐까. 내가 너무 못되게 살아서 불행, 실패, 죽음 이런 걸 반복하면서 사는 건 아닐까.”

“여긴 현실이다. 너는 미치지 않았고.”

“괜찮아요. 그냥 제 방식대로 살게 놔두세요. 카루스 님께 절대 폐 끼치지 않을 거예요. 제가 거슬린다면, 맥스웰을 통해 정보만 주고받아도 괜찮아요.”

“뭐?”

“저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아요. 이번 삶에서는 절대로.”

카루스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그는 율리아가 담담하게 꺼내 놓은 말에 표정을 잃었다.

“이번 삶에서는?”

그가 물었다.

율리아 딴에는 그를 안심시키려 한 말이었다. 이번 삶에서는 당신과의 동맹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죽음을 담보로 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카루스가 화를 냈다.

“계속 그렇게 살 건가?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에게도 손 내밀지 않고, 복수에 미쳐서 네 살을 깎아 먹으면서 살 거냐고.”

“왜 화를 내세요?”

“율리아!”

카루스가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율리아는 그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의 눈동자가 격정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이 낯설었다.

“왜 자꾸 화를 내세요? 저는 카루스 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당신을 위해 살 수도 있어요. 복수에 성공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너는 그렇게 하겠다면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당신한테 목숨을 바쳐도 상관없어요.”

“그런 말을 하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어?”

카루스가 율리아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검고 매혹적인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율리아는 그걸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차라리 지금 말해. 네 과거, 네가 말하지 않았던 비밀들. 전부.”

“안 돼요.”

“왜!”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데요.”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율리아는 카루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절제하지 못하고 흘리는 뜨거운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말했잖아. 이게 네 마지막 삶이라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율리아가 카루스의 손을 떼어 내려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가 율리아의 어깨를 짚었던 손을 움직여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카루스 님.”

이 고귀한 남자가 왜 이렇게 흔들리고 있나. 그가 말하는 대로, 이게 정말 나 때문일까. 날 걱정해서, 내가 가여워서. 그래서 그런 건가.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내가 당신의 염려를 기꺼워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나를 미워하려나.

“저를 약하게 만들지 마세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는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어요.”

“율리아.”

“선한 약자가 아니에요.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애도 아니에요. 첫 번째 율리아도 그랬어요. 착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았죠. 멍청해서 죽은 거예요. 제가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아세요?”

원수를 갚기 위해, 누군가의 원수가 되는 삶을 살기도 했다.

“이거 하나는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카루스 님, 당신이 미치도록 미웠던 때도 있었어요. 죽고 싶은데 자꾸 살리니까. 죽어서 편해지고 싶은데, 당신이 자꾸 나를 살려 놓고 가 버리니까.”

그래서 증오했다.

율리아가 카루스의 손을 떼어 냈다. 그에게서 몸을 돌려 한 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런데 카루스가 다시 그녀의 팔을 잡고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그럼 미워해. 화를 내. 왜 그랬냐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해.”

“싫어요.”

“도대체 왜!”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율리아가 결국 화를 냈다. 그녀는 카루스의 손을 뿌리치고, 그에게서 또 한 걸음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좁은 선실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잘해 주는 게 싫었다. 걱정하는 게 싫었다. 차라리 쓸 만한 여자라고 말하면서 적당히 이용하고 버리는 게 나았다.

율리아는 그에게서 물러나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되뇌었다.

율리아, 단단해져라. 차갑고 단단해져라. 무른 마음은 감추고, 딱딱한 껍데기만 남아라. 그러자 금세 평정심이 돌아왔다.

하지만 카루스가 마지막으로 꺼낸 말에 그녀는 깨지기 직전의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다음에 다시 살게 되면 나부터 죽여.”

“……네?”

율리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고 카루스에게 화를 내면서도 단단하기만 했던 그녀의 벽에 균열이 생겼다.

“네게 반복되는 삶이 지옥이라면, 매번 그렇게 만드는 나부터 죽여야지. 그리고 여덟 번째와 똑같이 살아. 그게 네가 복수에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무슨…….”

기가 막혔다. 카루스는 여덟 번째의 율리아가 복수에 거의 성공할 뻔했다가 자신 때문에 실패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왜 당신을 죽여요!”

“죽이지 못할 이유는 뭐지? 네 말대로라면, 그거야말로 네 방식 아닌가.”

싫다.

율리아가 이를 악다물었다. 그에게 화를 내고 싶은데, 무슨 말로 화를 내야 할지 몰라서 자신의 입술만 깨물었다.

그는 은인이었다. 매번 그녀를 살리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복수밖에 모르는 율리아 아르테는 카루스 란케아를 죽여야 해.”

“싫어요! 내가 왜…… 내가 얼마나 당신을.”

미워했는데.

미워한 만큼 죽이고 싶었다.

내가 감히, 당신을.

율리아를 가두고 있던 벽에 균열이 번졌다. 벽은 견고했으나, 균열을 타고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틈이 벌어지자 그 안에서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감정들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의 마음 안엔 수많은 율리아가 있었다. 첫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 그 안에 있는 건 율리아가 감추고 싶어 했던 과거의 자신이었다.

더러운 욕심, 추잡한 살의, 비틀린 욕망과 비겁한 자기합리화. 외면해야 했던 오래전의 순수하고 어린 율리아까지. 수많은 율리아가 그 안에서 썩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벽 안에서 아홉 번째의 율리아를 끌어당겼다.

어차피 너도 여기서 우리와 함께 썩게 될 거라고, 그렇게 발악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고, 저주받은 율리아 아르테는 이 지옥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속삭였다.

“율리아.”

율리아가 선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떨림을 감추기 위해 온몸에 아프도록 힘을 주고 있던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자마자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한 번, 두 번. 퍽퍽 소리가 나도록 거세게 쳤다.

“율리아!”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율리아는 주먹이 옷에 쓸려 빨개지도록 세게 문지르고 때리는 걸 반복했다.

무너지면 안 된다. 이 안에 있는 건 복수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실패자들이었다. 율리아는 계속 자신을 때렸다. 그래야 저 안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 있을 수 있었다.

“……그만해라.”

그때 카루스가 율리아를 품에 안았다. 그가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던 그녀를 일으켰다. 그러곤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품에 안았다.

“그만해.”

율리아는 떨고 있지 않았고, 울고 있지도 않았다.

“카루스 님, 저는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하지 않으면 정말로 울어 버리게 될 것 같았다.

배가 기지에 도착한 건 한밤중이었다. 먼저 배에서 내린 율리아가 바바슬로프와 함께 부두를 거닐었다.

멀리서 맥스웰이 두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배고팠는데 마침 잘됐다며, 왕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졸랐다.

카루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율리아는 바바슬로프의 농담에 웃고, 맥스웰의 장난에도 웃었다. 그녀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카루스의 눈에는 그 모든 게 위태로워 보였다. 잠깐이나마 그녀가 무너졌던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이제는 율리아의 저 평온한 얼굴마저 불안하게 느껴졌다.

“잠시.”

카루스가 그의 뒤를 따르던 덩치 큰 기사를 불렀다. 티타니아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였던 리바이어던 기사단의 기사였다.

“부르셨습니까.”

“수도에 전갈을 넣어. 극비리에 조사할 게 있다.”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 않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라고 해. 그런 저주나 사례가 있는지.”

“알겠습니다.”

기사가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 카루스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파도를 등지고 서 있는 율리아는 그의 눈에 아주 작아 보였다. 하지만 파도처럼 밀려온 그녀는 어느새 그의 가슴에 끝없는 바다가 되어 출렁였다.

카루스는 다짐했다.

저주를 거는 누군가가 있다면, 저주를 풀어내는 방법도 있으리라. 그게 이 땅 어디에 있든 반드시 찾을 것이다.

멈춰 있는 율리아의 삶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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